생각 / 말하다

마을이장 2016.05.20 20:51 조회 수 : 1890

 

 

 

5월 12일 목요일.

대략 13개월 만에 서울로 향했다.

가기 싫었다. 그러나 가야했다. 영후보다 두세 살 어린 학생들 수십 명 앞에서

뭔 소리를 하고 질문을 받아야 했다. 할 말이 없었다. 희망이 없다는 말을

어린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예정된 나의 말이었기에 가기 싫었다.

13개월. 내 기억으로는 2015년 4월 서울행 이후로 가지 않았다.

서울 갈 일을 가급이면 만들지 않는 것이 요령이다.

그 정도로 서울을 가는 것은 하나의 ‘일’이다.

이번에는 작심하고 염두에 둔 북카페와 <호모루덴스>가 이후로 사용할 커피 문제로

역시 5년 만에 <커피리브레> 서필훈 선수와 약속을 했다.

그리고 연남동 리브레 사무실에서 편집자까지 만났다.

<화개 프로젝트>에 관한 내 생각을 ‘통보’ 했다. 두 권 해결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13개월 전에 담당 편집자와 EBS를 방문한 것이 마지막 서울행이었다.

1년, 5년 이런 단위들이 이제 책 한 페이지 넘기듯 그냥 넘어간다.

네 가지 정도의 미션을 완료했으니 아주 빡빡한 서울길이었다. 그러면 지친다.

그리고 빨리 구례로 돌아가고 싶다. 절대 서울에서 잠을 자지는 않는다.

서울 길은 백년 만에 기차를 탔다. 내려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

밥 먹을 시간이 빠듯했기에 롯데리아에서 모짜렐라인더버거를 사서 입 안으로 구겨넣었다.

목이 막혔다. 콜라가 아닌 생수를 샀다. 1년 이상 믹스커피와 콜라를 거의 먹지 않았다.

이빨 치료와 볼록이 뱃살 때문이었다. 배가 많이 들어갔다. ‘끊었다’는 가혹한 표현은

맞지 않다. 구매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면 간혹 먹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입에 달고 살던

시절과 비교하면 끊은 수준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시 일주일이 지난 5월 19일 목요일.

춘천으로 가는 길이다. 강연을 하러 가는 길이다. 메일을 보니 3월 21일에 제안을 받았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던 시기였다. 지리산 자락을 빠져 나갈 수 있는 작은 숨통은

되겠다는 생각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호모루덴스>는 며칠 문을 닫기로 했다. 지금 인력 상황으로는 어차피 3일 동안 가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치열한 생계형이 아니라는 이유와, 어차피 정상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유와, 사실은 최근의 급변으로부터 잠시 나를 환기시키고 싶었던 마음이 복합하여

오래간만에 혼자 차 안에서 담배 피고 음악 소리를 잔뜩 높이면서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긴 운전을 할 때 생각을 가장 구체적으로 하는 듯하다. 더구나 중앙고속도로 아닌가.

미루고 미루다가 읍내 병원으로 가서 피 검사 등을 했다.

최근 몇 개월간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살이 왜 그리 빠졌나?” 라는 것이다.

맞다. 내가 봐도 많이 빠졌다. 바지 사이즈도 달라졌다. 볼은 몇 년 만에 그늘이 생겼다.

하루 지나서 병원 전화를 받았고 이상이 없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심한 피로감과 무기력증은 검사와 결과지표의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냥 늙어가는 것인가. 다른 이들보다 좀 빠르게.

그런데 나는 지난 2년 이상의 무기력함을 벗어나려고 새로운 일을 준비 중이지 않은가.

 

 

 

 

 

 

 

영후가 군대 있는 동안 구례-춘천을 5~6회 왕복했다. 경부선으로 가서 서울외곽순환을

돌아서 춘천으로 가는 길을 택하면 1시간 이상 운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지랄 맞은 <팔팔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를 스치고 <중앙고속도로>를 택했다.

금호 분기점 지나 안동이라는 팻말이 보이면 마치 여행의 본격 가도에 들어 선 방랑객의

기분을 느꼈다. 동명휴게소 지나면 차량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군위 – 안동 – 영주 – 풍기로

이어지는 그 길에서 나는 항상 아련했거나 생각이 많았다.

지난 몇 년간 <중앙고속도로>에서는 나는 몇 가지 결심을 했었다.

권헌조 어르신의 책을 만들겠다는 결심,

영후와 같이 책을 쓰겠다는 결심,

세상에 없는 아버지와 화해하겠다는 결정 같은 것이었다.

결심이 곧 실천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이 길에서의 결심은 실행 확률이 높았다.

이 길의 어떤 대목은 분명 나의 DNA와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중앙고속도로>는 나를 약간 긍정적으로 만든다.

 

 

 

 

 

 

 

혼자서 풍기 서부냉면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혼자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에게는 휴게소 라면이나 돈까스가 어울린다.

약간 여유 있게 출발했기에 핸들을 풍기로 꺽었다.

이 역시 1년 전에 영후 제대하고 내려서는 길에 먹었으니 대략 1년 만이다.

근래 2년 동안 두 번 정도의 방문에서 맛이 변했나?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이날 서부냉면은 처음 만났을 때 그 맛이었다. 좋았다.

월인정원에게 사진을 날리고 서부냉면의 안녕함을 알렸다.

다시 달렸다.

중앙고속도로에서 음악은 주로 <콜드플레이> 아니면 <오아시스>를 듣는다.

라이브 앨범을 좋아하는데 현장의 함성과 떼창 때문일 것이다.

<중앙고속도로>의 직선형 진행과 떼창은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을 추동시키는 힘이 있다.

 

 

 

 

 

 

 

도착하고 배정받은 숙소에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다섯 시간 이상 운전은 역시 힘들다. 그리고 기획자들을 만나서 저녁을 먹었다.

점심을 냉면으로 먹었는데 막국수가 되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면돌이다.

곱빼기다. 다 흡입했다. 이 집, 내가 강원도에서 먹은 막국수 중 2위는 하는 맛이다.

대부분의 막국수는 기름 맛이 너무 강했다. 막국수도 빈대떡도 모두 담백했다.

처음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세 번 놀란다.

생각했던 것 보다 사람이 작다.

생긴 것과 다르게 술을 못한다.

몸집에 비해 너무 많이 먹는다.

그리고 이 집은 5월 말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건물주가 나가라고 했단다. 자신이 하겠다고. 자주 보았던 장면이다.

 

 

 

 

 

 

 

서향 집은 석양이 깊고 뜨거웠다.

강연 전에 잠시 집 구경을 했다. 아름다웠다.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가 지은 집은 대학로 쪽도 그러하고 성당도 그러하고 대부분 빨간 벽돌집이었다.

내가 볼 때 그는 건축물 전체의 덩어리감과 실루엣으로의 아웃라인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변의 여백, 공간을 극대화 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그가 설계한 것은 집이 아니라 여백이었을 것이다.

이전에 이미 인용한 글은 이 대목에서도 유효하다.

 

디자이너의 삶은 싸움의 삶입니다.
조악한 것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의사가 병과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시각적인 병은 주변에 늘 있습니다.
우리가 애쓰는 것은 디자인으로 그것을 치료하는 겁니다.
좋은 타이포그래퍼는 항상 낱자들 사이의 거리에 대한 감각을 가집니다.
우리는 타이포그래피를 블랙 앤 화이트라고 생각합니다.
타이포그래피는 블랙이 아닌 화이트입니다.
블랙 사이의 공간들이 타이포그래피를 만드는 것입니다.
음악과 비슷하죠.
음악은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음악을 만드는 기록들 사이의 공간입니다.
사람들은 서체가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관점과는 다릅니다.
저는 서체가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og' 글자는 어떤 서체로도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강아지 모양으로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dog'라고 썼을 때,
그것이 짖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Massimo Vignelli

 

 

 

 

 

 

 

김수근은 호수로 떨어지는 석양을 오랫동안 보면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구조와 높이, 각도, 바닥재의 배치는 의도한 것이다.

나는 그의 의도대로 셔터를 눌렀다. 건축가 김수근, 쉰다섯 해를 살았다.

지금의 나보다 한 해 더 살았다. 나이로 업적을 비교하는 따위의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표현되지 않은 숨은 업적들은 삶의 곳곳에 옹이로, 흉터로 아로 새겨져 있다.

김수근이 지은 집의 어느 한 방에서 구례에서의 지난 10년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PT화면을 한 장씩 넘기면서 가장 깊게 감정에 빠진 사람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구례에서 만난 얼굴들이 지나갔다.

그 모든 것은 과거지사였다.

간혹 강연이라는 것을 하지만 반복될수록 나는 이 형식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짧게 모두 발언하고 묻고 답하는 대화의 자리가 더 편한 듯하다.

화개 <호모루덴스>에서는 싫건 좋건 이런 자리를 자주 기획해야 한다.

 

 

 

앞으로 당분간 지리산닷컴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서 처음 발설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자꾸 미루어지고 있는데 다음 주에는 정말 기획안을 지리산닷컴에 알릴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지리산닷컴 주민 세 분과 맥주를 한 잔 나누었다.

어느 곳을 가건 지리산닷컴 주민들은 존재하고 있다. 소문내지 않았으나 달려와 주셨다.

구례 밖으로 나오면 잠을 청하는 것이 힘들다. 다시 혼자 숙소 방에 앉아 있다가

새벽 1시가 넘어서 춘천 시내로 차를 몰았다. 그러니까… 쌀을 먹고 하루를 마감해야지.

돌아와서 새벽 2시경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깊고 늦은 잠을 잤다.

오전 10시 무렵에 숙소를 출발했다. 얼굴은 심하게 부어 있었고 다행스럽게 나는

외모로 승부할 일은 없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어제와 같은 음악을 들으며 구례로 돌아왔다.

원주휴게소의 황태해장국은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으로는 훌륭했다.

5월 23일 월요일에 <호모루덴스>를 함께 운영할 친구들이 최초의 회의를 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공간을 맡게 되었고 누군가는 부친상도 있었다.

이제 다시 걸어가라고 아버님은 그리 시간을 맞추셨던 모양이다.

다시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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