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 우중산책

마을이장 2018.03.15 23:27 조회 수 : 1284

 

 

 

3월 15일 목요일.

눈 뜨자마자 빗소리 시원하다. 비는 반갑다.

농사짓지 않아도 시골 살면 일기예보에 민감하다.

작물에 좋겠다. 먼지 씻겠다. 꽃에 좋겠다. 커피가 마시고 싶다.

12년째다. 열한 번째 봄이다.

아직 마을에 인사하지 않았다.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장님도 닦달이 없다.

지난 가을 공사 중에 두어 번 뵙고 거처 방식을 전달했고 마을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을에 있는 동안은 전형적인 외지것 모드로 일관할 생각이다.

그러나 집 앞이 예쁘다.

파란지붕이 저온저장곤데 그 앞에서 산수유나무까지 나무와 넝쿨을 걷어내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젠장.

 

 

 

 

 

 

 

주차하고 차문을 나서면 만나는 산수유나무는 수형이 못났다.

가꾸지 않은 탓에 도장지가 하늘로 치솟아 나이로 봐서는 이제 나무 모양을 잡기 힘들 것이다.

바로 위로 전깃줄도 흐르니 이 나무는 이래저래 타이트한 포커스만 유효하다.

낮 기온이 20도 육박한 며칠이었고 이런 비는 꽃의 색을 좋게 만든다.

예보로는 이번 토요일 새벽이 영하 3도다. 한방 두들겨 맞을 것이다.

결국 경험적으로 다음 주, 22일과 23일 정도에 이 나무는 절정을 맞이할 것이다.

 

 

 

 

 

 

 

매화도 터지기 시작한다. 작업장 아래로 매화 몇 나무가 이어지니 다음 주에는

노랑과 화이트, 녹색과 붉은 흙이 채도를 높일 것이다.

봄이 되고 담벼락 아래 사람 소리가 자주 들린다. 전지를 한 나무다.

몇 그루 되지 않아도 관리하는 나무다. 전형적인 세 손가락 형태로 수형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만큼의 욕망도 있을 것이니

쌀쌀맞게 처신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경우는 첫인상이 더러운 것이 편하다.

 

 

 

 

 

 

 

산수유 식재 면적이 조밀하니 나무 모양이 자유분방하지 않다.

나무도 당연히 표정이 있는데 오래된 나무에 비해 젊은 나무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다음 주에 오후 석양빛에 이 자리에서 역광으로 한 번 잡아봄직한 포커스다.

 

 

 

 

 

 

 

작업장 장독대에서 담배를 피우면 항상 저 소나무를 바라본다.

골프장으로 팔려나가기 좋은 수형이다. 최종 가격은 억대를 찍을 것이다.

그러나 20톤 정도 크레인이 진입할 조건이 아니다.

그 조건이 저 나무가 아직 저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는 방어막이다.

원래 소나무가 훨씬 많았던 마을이라고 한다.

 

 

 

 

 

 

 

찾아 온 지인과 점심 하고 커피 마시고 이르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방으로 구례는 운해 쇼를 진행하는 형국이었다. 다행스럽게 카메라는 충전 상태다.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차를 세우고 몇 컷 누르다가 카메라를 조수석에 두었다.

아무래도 집으로 가는 길에 몇 번은 차를 세울 것 같았다.

 

 

 

 

 

 

 

구례사람들 중에 이곳을 보는 이들은 당연히 사진의 장소를 알겠지만

뭐랄까, 이제 내가 머무는 작업장의 구체적인 마을 이름이나 촬영 장소 같은 것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댓글 한방에 노출될 정도의 습자지 두께 방어막이지만 어느 마을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간혹 생기기에 드는 생각이다.

여행자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이다. 나는 이곳에 살기에 책임이 따른다.

 

 

 

 

 

 

 

하루 전만 해도 미세먼지로 볼 것 없던 노고단 아래 마을도 어떤 때를 만나면 빛이 난다.

지난 구정 때 불이 났던 낮은 산허리와 작은 등뼈는 내린 비에 검은 색이 더 선명하다.

 

 

 

 

 

 

 

네이버 메인에 ‘FARM’ 이라는 메뉴가 추가되면서 농촌은 보다 더 많이 노출되고 있는 중이다.

마을이건 사람이건 사업이건 댓글이건. 간혹 아는 이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어 본문 보다는

댓글을 일별하는 편인데 보고나면 거의 ‘역시 노출은 피곤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노출은 상품화를 염두에 둔 것인데 진열대에 올려 진 상품은 만져지기 마련이다.

결국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구례를 노출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텍스트보다 이미지를 기억한다. 내 생각의 변화는 분명하다.

‘구례로 오라!’ 가 아니라 ‘당신의 구례를 찾아라!’

그러하니 ‘관광구례’ 따위 슬로건은 사실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가급이면 오지 마시라.

 

 

 

 

 

 

 

10년 전 상황과 다른 점은 삼십 대 귀촌자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12년 전에는 나 역시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귀촌자 모임’ 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상기에 불과하지만 최근 귀촌자들은 구체적인 생계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기능이건 직장이건 뭔가 근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나처럼 집도 땅도 없이

막무가내로 우연히 살아가는 방식을 취하는 주민보다 장기거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중앙정부로부터 인구수에 비례한 예산지원을 받는 가난한 지자체는 필사적으로 인구수에

매달리고 공무원들은 할당을 받는다. 연말이면 증가하고 연초면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대한민국 기초단체의 인구 이동 현황일 것이다.

구례는 장부상으로 27,000명 정도이니 자체 소비로 경제가 굴러갈 수 없다.

실거주는 이만 명 정도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마을공동화를 이야기하지만 나는 내 생전에 구례의 일백칠십 개 이상의 자연부락 중

단 하나의 마을도 자연 소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보면 하나의 마을이

사라지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자체 재생산으로 유지되지

못한다는 한계는 명확하다. 그러나 이제 그 ‘한계’는 ‘조건’에 가깝다. 악조건도 조건이다.

 

 

 

 

 

 

 

인간은 단 한 번도 지구를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 적이 없다.

이 들판 사진을 지난 12년 동안 찍었지만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나 흔적은 증가했다.

풀이 맨땅을 점령하고 종을 번성시키듯 인간의 성장은 결국 풀과 나무를 밀어낼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같은 들판을 바라보면 농사와 땅의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들판에서 점점 묘목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이 밭으로 변하면 투입하는 물질이 변하고 땅도 변화한다. 물론 나쁘게 변한다.

해결책은 단 하나다. 성장을 멈추면 된다. 그래서 해결책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녁 메뉴만 고민한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사는 일은 제법 괜찮다. 아직은.

무엇보다 불가항력적 변화에 대해 나는 사실 큰 불만은 없다.

 

 

 

 

 

 

 

8년 전에 이 들판은 천 세대 이주 후보 부지로 검토되기도 했다.

성사되었다면 지금 나는 대규모 주택단지 지붕을 찍고 있을 것이다.

 

 

 

 

 

 

 

오산 아래 섬강에서부터 구름이 올라오고 구례 전역이 구름이 되어 움직이는 오후다.

이런 날은 송전탑조차 그림의 필수요소로 보인다.

 

 

 

 

 

 

 

이번 주부터 구례는 산수유 축제 기간에 들어서니 주말이 붐빌 것이다.

출퇴근 불편한 세 번의 주말을 앞두고 있다.

라면 사둬야겠다.

 

 

 

 

 

 

fourd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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