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밀어내기

마을이장 2017.05.28 21:49 조회 수 : 803

 

 

 

2004. 2. 4

 

12시 기차라 11시에 연신내를 나서서 역으로 갔다.

기차 안에서 먹는 밥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셔서 버거킹에서

버거와 감자를 사서 넣어드렸다.

심한 퇴행성관절염으로 다리를 절며 개찰구를 지나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담배가 몹시 생각났다.

 

 

 

 

 

 

 

2004. 2. 5

 

향기 없는 듯,

정신없는 듯,

항상 벗어나서 뭔가 숲과 바다를 향해

도망가고픈 갈구를 안겨 주는 연신내.

이 마을에서 몇 년을 더 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2년 정도는 더 머물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 마을에서 이리 저리 이동하면서 몇 년을 보낼 생각이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말이다.

이곳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몸으로 먹고 살아가는 마을.

대단한 놈들도 없고 대단한 차들도 굴러다니지 않는 마을.

오르지 못할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봄이 오면 방 한 칸 정도 더 보태어서

이사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할 수 있는 마을.

내가 살기 딱 적당한 마을.

연신내다.

 

 

 

 

 

 

 

2004. 2. 13

 

11시 심야버스로 올라오려는데 선배 한분이 잡는다. 대화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어렵사리 웃는 얼굴로 터미널로 향하는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선배의 입김이 남아 있다.

터미널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오지 않는 잠을 포기하고

이런 저런 생각에 집중한다. 의자를 뒤로 젖히지도 않고 정좌한 자세로 시커먼 버스 속에서

몇 가지 상황을 정리했다. 올라가면 어떤 순서로 전화를 하고 어떤 일정으로 일을 진행하고

우선적으로 누구누구를 만나고 하는 가닥들을 정리한다.

지난 10년 이상 나의 머리를 정리한 장소는 고속도로였다.

그 정리가 개운할 때 도착한 터미널의 밤공기는 상쾌하다.

 

 

 

 

 

 

 

2004. 2. 25

 

전주를 지날 무렵 고속버스 안 라디오에서 어떤 대목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다.

노무현 취임 1주년에 비교해서 '나의 1주년'이라는 청취자 전화 프로그램인데

어떤 청년이 전화를 했다. 진행자 김미화가 물었다.

 

"어떤 1주년이세요?"

"6년 동안 재단사 시다를 했는데 작년 오늘 재단사가 되었어요.“

 

나는 이상하게 이런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버릇이 있다.

멀리 서울이 보인다.

 

 

 

 

 

 

 

2004. 5. 4

 

빡빡 깍은 내 머리와 나의 왼쪽 소매만 노란색으로 프린팅 된 검정 티와

전반적인 불량끼를 감상하듯 나를 살핀다.

틀림없이 상담원은 기록된 나의 나이와 나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갭을 가늠하는 듯 했다.

 

"원하시는 직종은 어떤 것입니까?"

"웹디자인이나 파출부요."

"네?"

"말씀드린 그대로요."

"희망 근무지는요?'

"서울이나 3호선 일산 라인요."

 

몇 초간 침묵 이후 미소를 결심한 듯 웃음이미테이션을 날리면서 말한다.

 

"최대한 신속하게 희망하시는 일자리를 알아보겠습니다.

5월 *일에 구직활동 확인서 작성하셔서 오시면 됩니다. 안녕히 가세요."

 

 

 

 

 

 

 

2004. 8. 9

 

만약에 내가 힘을 가진다면 이런 개소리는 무시하고 나와 내 주변을 살찌우는데

사력을 다하겠다. 모든 이권과 권력 가진 자리는 나하고 친하고, 내가 믿을 수 있고,

내가 봐서 '이 자식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싶은 녀석에게 다 나누어 주겠다.

내가 만약 힘을 가진다면 밤마다 나와 가까운 이들을 불러 성대한 만찬의 밤을 즐기겠다.

내 주변의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능력 되는 놈으로 보좌하게 하고

가능하면 내가 줄 수 있는 파이의 최대 분량을 줄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겠다.

그리고 이런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어쩌구 하는

주둥이가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하여 사망 여부조차 알 수 없게 처리해버리겠다.

화염병을 들고 있었던 시절에도 가장 듣기 싫었던 소리는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 는 개소리였다.

폭력은 애당초 정당화를 증명하기 위해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2004. 9. 14

 

내일부터는 정말 유치한 카탈로그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좋지 않은 상태의 사진, 보고 싶지도 않은 카피들,

한 페이지에 무조건 많은 사진을 집어넣어야 효율적인,

표2부터 바로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하는 작업.

이 유치한 일을 나는 아주 집중적이고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 일을 주문한 '갑'으로 출발한 친구에 가까운 사람의 삶이

누구보다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는 밤이면 양복바지 끝단을 접어 올리고

머리에 화장지를 칭칭 감고 한쪽 눈엔 맥주병 뚜껑을 끼우고 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거래처 사장들을 웃긴다. 그는 항상 룸싸롱이건 가라오케건 모든 술자리에서

온몸을 던지는 공연을 펼치면서 '그' 라는 사람을 각인시킨다.

중학교를 졸업했고 불난 공장의 유리를 훔쳐 와서 팔아먹는 것으로 유리장사를 시작한 사람이다.

안 해 본 것 없고, 모르는 것 없고, 모든 일에 간섭하는 그를 간혹 볼 때 마다 나는

내가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모진 생존력을 목격한다.

같이 이동하는 중에 식사를 하면 나는 항상 허름하지만 맛있는 집을 주장하고

그는 항상 맛없어도 간판 거창하고 마당에 주차할 수 있는 집을 주장한다.

그렇게 해야 나를 대접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가 싫어하는 우거지 해장국집에서 맛난 식사를 끝내고 나와서 그의 차로

이동하는 중에 그가 말했다.

 

"나는 우거짓국 같은 거 정말 싫다. 남들은 옛날 생각하면서 잘도 먹는데 나는 정말 싫다“

 

이후 나는 그가 횟집을 가도 실속 없는 무채로 장식 한 간판 큰 집을 가도 거부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이번 여름 그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해 주어야 할 더욱 큰 사명이 생겼다.

카페를 가면 항상 그의 유난히 큰 목소리 탓에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일이

좀 불편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았고 나는 그를 존중한다.

사실 그것은 그를 핑계로 한 나를 위한 일이 아닌가.

 

 

 

 

 

 

 

2004. 12. 30

 

빨래가 널려 있는 옥상은 아름답다.

빨래가 널려 있는 옥상을 가진 집은 누추하다.

빨래가 널려 있는 옥상 아래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의 삶은 구차스럽다.

빤스를 옥상에 휘날릴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구차함을 거부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휘날리는 빤스는 지금 여벌의 다른 빤스를 입고 있다는 나름대로 자신 있는 富의 과시이며,

내일도 갈아 입을 빤스가 있다는 낙관의 근거다.

갈아 입을 빤스가 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근거를 가진 것이다.

희망의 근거는 거창한 것에 있지 않다.

빨랫줄에서 휘날리는 빤스가 바로 우리들 희망의 근거다.

햇볕에 말린 뽀송뽀송한 빤스는 우리들 안락함의 미학적 준거틀이자

내일도 새 빤스를 입자는 도원결의다.

옥상에 빤스가 휘날리는 한,

옥상에 빨래가 너울거리는 한 게임은 계속 되어야 한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볼 수 없는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옥상의 저 빨래는 바로 영원한 상록수다.

 

 

 

 

 

 

 

그럴만한 날이라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가족 여행이었던 탓에 사진을 찍는데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몇 컷은 사용해도 될 것 같아서 십수년 지난 옛글에 버무려 내어놓는다.

그러니까 일종의 밀어내기다. 나는 왜 글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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