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또 보내다

마을이장 2017.02.07 23:06 조회 수 : 1999

 

 

다시 명확하게 감기가 찾아왔다.

몇 년 동안 감기를 하지 않은 듯 한데 지난해부터 이맘때면 빚쟁이처럼 감기가 나를 찾는다.

발작적 기침과 몸살 기운이 주요한 증상이다. 지난해만큼 심한 상태는 아니다.

냉큼 병원으로 가서 주사 맞고 약 처방을 받았다.

그리고 화요일. <호모루덴스> 쉬는 날이다.

화요일은 그래서 위아래 80평 공간에서 오로지 나 혼자 밀린 작업을 하는 1/7day다.

그러나 2월 7일 화요일은 몸살 기운과 퀭한 공간의 차가운 공기 탓에 점심 무렵 철수를 결정했다.

버티고 일을 계속 한다면 정말 심하게 아플 것 같은 몸 안의 예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와서 3시간 정도 끙끙 앓거나 기침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멍하거나

여하튼 이불을 뒤집어쓰고 뻗어 있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꼭 아픈 사람같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는 하는 일도 없거나 지지부진한데 오랜 시간 동안 쉬는 날이 없었다.

나는 쉬는 날을 챙겨야 할 정도의 염치 있는 일상이 아니라는 가학성이 좀 있다.

 

 

 

 

 

같은 화요일 밤 10시. 전화가 온다. 드문 일이다. 시골에서는.

<구례를 걷다>를 정말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부탁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쓴 책인지 인쇄물인지 규정이 애매한 <구례를 걷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보기 싫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처음엔 흔했던 책이라 이리 저리 나누어 주고,

몇 번인가 부탁해서 수십 권씩 생기면 또 나누어 주고 하다 보니 정작 내 손에 내 책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절판될 것으로 생각되는 내가 쓴 책 몇 권을

구매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러 권 가지고 있으면 꼭 남을 줘 버리니

아예 가지고 있지 않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판단에 그랬다.

 

“그럼 이자앙님~ 혹시 파일은 없습니까?”

 

<구례를 걷다>는 내가 디자인한 책이니 파일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파일이 없다.

 

 

 

 

 

1월 5일이었나? 1TB 외장하드를 날려 먹었다.

그런 일은 연초에 발생한다. 해를 넘기고 데이터 정리 등을 하면서 분산 백업된 파일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통합하고 어쩌고 하는 작업을 한다. 원래 두 개였던 백업 장치가 잠시

하나로 줄어드는 그런 백업 트와일라잇.

나의 부주의로 물리적 외부 충격이 가해졌고 외장은 인식 불능 상태가 되었다.

1테라바이트는 1천 기가바이트고 그 안에는 지난 15년 이상의 시간 동안 내 작업 데이터가

모두 담겨 있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외장을 바로 컴으로 연결하고 사망을 확인했다.

퇴근길에 바로 무얼까?에게 들고 가서 소생 여부를 확인했다. 일단 죽었다.

전문 복구 업체에 맡겨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나는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사진 폴더는 두 곳에 보관하였던 덕분에 2002년부터 지금까지의 사진을 모두 확인했다.

음악 파일은 뭐 미련이 없다. 문제는 역시 밥벌이 디자인 작업 데이터인데 이미 불편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이 밤의 전화에서 <구례를 걷다>를 물어오면 ‘그래 그것도 있었지’ 라는 식으로

피해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복구 업체에 맡기면 데이터를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다 속에서 돌아 온 아이들의 데이터도 복구하는 기술력 아닌가.

그런데 나는 한 달이 넘도록 외장을 서울로 보내지 않고 있고 발도 동동 구르지 않고 있다.

 

“이제 헤어질까?”

 

데이터가 모두 사라지면 모든 미련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약간 묘한 유혹이다.

 

 

 

 

 

1월 15일이었나? 주로 86학번 후배들이 화개로 왔다.

86학번 여학생들은 나이 쉰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86학번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구 할은 과거지사다. 잃어버렸던 데이터는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조금씩 복원이 된다. 4개 대학 출신이 모였으니 복원할 데이터의 양도 많다.

이름은 가물거리고 사건의 진실도 흐릿하다.

우리는 절대 그대로일 수 없는데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그대로다’는 말이다.

하하호호 오래간만에 과거의 사람들이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의도적으로 이런 자리를 피해왔었다. 피할 수 없는 문상 길 이외에는 그랬었다.

그러나 흔적을 지우는 일은 어느 일방의 결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내가 고등학생 정도였을 때에 나이 쉰 먹은 포유류는 현생 인류가 아닌 화성인들이었는데

쉰이 넘어 쉰을 보니 그냥 사람이다. 결국 사람에게 있어 기억의 백업 수단은 타인들이다.

6명 중 4명은 거의 25년 만에 만났지만 데이터가 한 번 더 복원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예정할 수 없다. 어쩌면 이제 만날 수 없는 데이터일 수도 있다.

시간은 정말 빠르고 덧없기 때문이다.

이런 만남에서 백업된 기억의 양은 균등하지 않다. 간극만큼 유실된 데이터의 양도 많다.

이를테면 하드디스크에 배드섹터가 난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선별적이라고 한다.

 

 

 

 

 

지난 1월 28일 설 아침.

큰집 형님 댁에서 차례를 모시기 위해 서 있다가 벽에 그어진 선을 보았다.

잠시, ‘뭐지?’ 라는 갸웃 뒤에 바로 형님에게 외손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필 선은 내 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렇게나 자랐나?

나이를 물었다. 초등학교 6학년. 길을 가다 그 아이와 스쳐도 당연히 누군지 모를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도 벽에 선을 그어가며 자람을 견주었다. 유전적으로 거의 결정되어 있는

높이를 조작하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주곤 했었다.

벽에 그어진 선으로 만난 어린 친구는 분명 가계도의 논리로 나와 근접한 데이터지만

내 기억 하드디스크에서는 폴더명만 존재하고 파일은 없는 정보다.

접촉 가능 지점은 어느 장례식장일 것이다.

우린 이미 서로에게 유실된, 가치를 상실한 데이터일 것이다.

아이의 키 높이가 그어진 이 벽은 곧 사라질 것이다. 아파트 재건축이 결정되었다.

 

 

<뱀발>그런데 누군가 <구례를 걷다>를 두 권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 한 권 주시면 좋겠다.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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