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2일 오후 2시경부터 5시경까지 최광두 어르신의 말씀을 받아내다.

23일도 같은 과정이었다. 24일은 청내댁도 함께 자리했다.

 

 

 

 

 

부인할 수 없이 2016년이 가기 전에 5개월을 지연하고 있는

월간 <노력>을 시작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했다.

지난 7월 말에 유료 구독자 모집을 시작했고 제작비의 많은 부분을 채울 만큼의 신청자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 이 일이 대목대목 지연 사고가 날 것이란 것을 예정하고 있었다.

매 월 한 사람의 구술자서전을 완료해 나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란 것은 눈앞의 불 보듯 한 일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분발하지 않으면 실행될 수 없는 자발적 프로젝트는 지난 몇 년간

나의 컨디션 또는 실행 능력으로 보자면 애당초 무리한 기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한다.

 

12월 첫째 날 오미동으로 향했고 염두에 둔 어느 노인과의 첫 과업을 실행하려 했으나

건강 상 집에서 누운 상태로 진행해야 한다는 힘겨움이 있었다. 첫 시도 실패 후 의기소침해졌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다. 노인들은 마을회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녹취를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항상 그럴 일은 아니지만 대상에 따라 어쩌면 화개 <호모루덴스>로 모시고 내려와서

진행하는 것이 안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섭외가 쉬운’ 최광두 어르신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짐작에 대여섯 분은 일단 나와의 관계 또는 밀어붙이기로 진행할 수 있다.

그 어른들은 뒤에 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힘든 미션부터 수행하려고 했지만 순서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일단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다급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 최광두 어르신이 다른 일로 목요일 아침에 전화를 주셨기에

용건은 설명 드리지 않고 오후에 시간되시냐고 여쭈고 바로 결행하였다.

 

 

 

 

 

‘말씀을 받아낸다’는 표현을 하고 싶다. 그 말씀을 ‘듣는 행위’는 뜻밖에 힘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듣는 행위가 아니었다. 일생의 무게,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받아내는 일이었다.

말은 내 눈 앞으로 쏟아져 알알이 파편 되어 내 껍질을 뚫고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두 시간 이상 그 말씀을 받아 내다보면 온 몸이 지쳐왔다.

말과 말 사이에 기억이 끼어들고 말씀은 78년, 683,280시간을 종횡으로 관통했기에

상처는 깊었고 베어진 살에서는 숨을 놓기 전에는 지혈되지 않을 피가 뚝뚝 흘렀다.

아! 이 일은 해야겠다.

누구 보다 많이 배웠고 누구 보다 가진 것 많은 자들의 거짓이 온 세상을 희롱하고

그 거짓을 전하는 주인 없는 말들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수십 억 마디의 소음으로 하루 종일 지지배배 사람의 혼을 빼놓는 역겨운 시공간에서도

변방 어느 못난 나무의 말씀은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말씀은 형용사와 부사는 최대한 거세된

자연발생적 주어, 목적어, 동사만으로 구성된 단아한 문장의 연속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말씀은 그 아름다움을 구축하기 위해 무엇을 더 한 것이 아니라

빼고 빼고 더 이상 뺄 것 없는, 뼈만 남은 앙상한 언어의 뼈다귀였다.

 

한 분의 말씀을 듣고, 적은 분량이지만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가필이 불가피할 것이라 생각했다.

뼈만 남은 언어로 200자 원고지 200매를 채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전 인터뷰의 경험으로 40매 정도의 원고가 적절하고 80매 정도의 인터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억지로 분량을 채워내는 작업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의 관찰기와 덧댄 이야기들이 첨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 하루 말씀을 녹음하고 댁으로 모셔다 드리고 화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사뭇 비장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의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란

엄정한 독대 앞에서 노인은 질서정연했고 체계적이었다.

그 사이에 나의 언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 말씀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에 무엇을 꾸미거나 덧대는 반칙은 용납될 수 없을 것이란 확신 같은 것.

 

 

 

 

 

결국 나의 역할은 녹취를 최대한 풀어내고 살리고 순서를 잡고 맥락을 세우는 것에

집중될 것이고 사실 관계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사료 조사 따위의 잡무만 유효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녹음된 모든 말씀은 며칠이 걸리건 모두 문자로 옮겨져야 한다.

이 방식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지난 세월 동안 모든 인터뷰에서 녹취를 피해 왔는데

지금 이 순간 <노력>에서는 이 방법만이 유일하다.

나의 시도의 모본이 되는 <뿌리깊은나무>에서 발행한 「민중자서전」중에서

5권 「마지막 보부상 유진룡의 한 평생」을 작업한 편집자 김택춘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장돌림 유 진룡이 구술한 것을 글로 옮겨서 편집한 것이다.

여기에서 ‘편집’이라 함은 독자의 이해를 도울 목적으로 겹치는 내용을 빼거나

내용의 전개에 순서를 바로 잡거나 어려운 용어나 사투리에 주를 다는 일을 뜻한다.

 

그래서 이 일은 내 전문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1차 원고가 완료되면 주변을 괴롭혀서 ‘말씀’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나와 가까운 편집자와 사투리 전문가들은 이 일로 파편이 튈 것이란 외람된 예고를 뻔뻔하게 해 둔다.

 

 

 

 

 

이 작업은 어느 한 사람에 대한 선과 악을 평가하는 일이 아니다.

이 작업은 어느 한 사람의 옳고 그름을 가름하는 일이 아니다.

이 작업은 단지 한 사람의 입을 통해 평생 육신이 감당해 온 온전한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고

그 말씀의 진위를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이 작업은 세상에서 허명 가진 시끌벅적한 어떤 이의 이야기도 아니고

소문난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 작업은 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무게가 뒤지는 일이 아니다.

국가 따위 보다는 누군가에게는 당신이 겪은 시간이 훨씬 막중하고 엄중한

일생일대의 사건이고 시간이기 때문이다.

여순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의 각 잡은 보고서로 인용하자면,

“육군본부가 1948년 10월 19일 오전 7시에 여수 제14연대에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항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자, 이에 반대하는 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 이 반란을 일으켰다.”

라고 시작하고 해방과 전쟁 시기의 비극적인 이념 다툼으로 정리하겠지만 노인 최광두에게 있어

여순사건은 여태껏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이를테면 1960년이나 되어서, 그의 아버님이 전주옥(獄)에서 눈을 감고 10년이나 지나서

섬진강을 건너다가 마을 어르신이 정색하고 내리신 말씀,

 

“광두야, 너거 아부지는 죄가 있어 죽은 거이 아니라 세상을 잘 못 만나 죽은거다이.”

 

그는 여전히 ‘죄 없는 사람이 죽은 이유’에 목말라하고 눈을 적신다.

 

어쩌면 나는 오늘 이 주절거림에서 빨라야 앞으로 1년 후에나 나올

합본호 책의 서문을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사진들을 들고 오셨다. 한 장 한 장 소중이 받잡고 설명을 들었다.

사진 속에는 말씀만 들었던 ‘살았던 이들’과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 보였다.

지난 10년 동안의 사진 폴더에서 자료로 사용할 사진들을 골라내면서

짧지만 짙었던 지난 9년 오미동에서의 일들이 와락 달려들어 마음이 힘들었다.

앞으로 1주일 정도 예정으로 녹취를 풀 것이고 이후로 보충 취재하고

연보 작업하고 추가 촬영할 것이다. 그리고 원고 검수 받고 편집디자인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많이 늦어졌지만 1월 말에는 월간 <노력> 첫 호를 받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둘지는 않을 것이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부터는 1주일 한 번 정도 이런 식으로 <노력> 소식을 전할 것이다.

 

 

 

 

 

jirisan@jiri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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