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 섬진강에서 어느 밤과 낮

마을이장 2016.08.29 16:21 조회 수 : 2426

 

 

 

일요일 오후 7시 좀 넘어서 19번 국도를 따라 화개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틀 동안 비는 부족하게 내렸다. 기온은 떨어졌고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해졌다.

어느 정도로 깨끗했냐 하면 백 년 만에 내가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고 싶을 만큼 깨끗했다.

 

 

 

 

 

 

 

이 저녁이 끝나면 지난 한 달 동안 휴식 없었던 <호모루덴스>는 3일 동안 쉴 것이다.

그것은 진작부터 정해진 일이 아니라 불과 이틀 전에 그리 정한 일이다.

5월 1일부터 지금까지 우리 몇몇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화개에 머물렀다.

화개는 아름다운 곳이라 이름났지만 나는 화개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출퇴근길의 섬진강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제법 묵직한 최근의 이 기분은 결국 어딘가에 매인 몸이라는 변화 때문일 것이다.

프로젝트에 매인 경우는 있었지만 공간에 매인 경우는 지난 10년 동안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성격의 다름이 있지만 일종의 직장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2~3년 동안의 나사 빠진 상태에 대한 일종의 처방이기도 했다.

처방이라는 것이 최선인 경우는 드물다.

그 처방이 궁여지책일지라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름은 마침내 끝자락을 보이고 말았다.

 

 

 

 

 

 

 

어딘가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삼 일. 휴가.

그것은 제법 마음을 한가하게 만들거나 약간 여유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오래간만에 느꼈다.

사장인데. 젠장.

 

 

 

 

 

 

 

다시 시동을 걸고 1분 후에 화개에 도착했다.

그 유명한 십리벚꽃길의 녹음을 한 번도 촬영하지 않았다.

이곳에 하루 13시간 정도 머물고 있는데 말이다.

노출이나 뭐나 조작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들고 찍었다.

흔들렸다. 때로 흔들리는 것이 좋다.

사진을 컴퓨터에 집어 넣고 이 사진을 버릴 것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남겨 두기로 했다.

 

 

 

 

 

 

 

8월 29일 월요일. 이른바 휴가의 첫날.

나는 물론 화개로 내려가서 밀린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아침 미션이 있었다. 병원, 온천, 점심 등.

병원에서 온천 행은 저지되었고 점심까지 시간이 남았다.

드라이브. 정처 없이 사성암 아래 동해마을 방향으로 흘러갔다.

세상은 1년에 몇 번 있을 정도의 맑은 색을 보이고 있었다.

목욕탕을 갈 생각이었기에 카메라 가방을 두고 나왔다.

아이폰으로 찍었다. 역시 색깔이 노골적이다. 깊이가 없다.

월인정원, 영후 모두 카메라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사진은 없고 풍경을 마음에 담아 두라는 날인 모양이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다시 집을 나설 때,

두고 온 풍경이 마음에 남아 결국 다시 동해마을 벚나무 길로 나를 이끌었다.

오전 빛보다 기울었고 맑지 못하다. 그러나 충분히 훌륭하다.

 

 

 

 

 

 

 

서울에서 구례로 옮긴 첫 해와 둘 째 해에는 거의 매일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2년 정도, 사계절을 두 번 정도 겪어야 모든 꼴을 구경할 수 있다.

구례는 아름답다. 그것이 간명한 나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고 이 길의 벚나무도 많이 자라서 충분히 터널을 이루고 이제 제법

연식이 된 아우라까지 풍기기도 한다. 그리고 구례의 벚나무는 일찍 잎이 진다.

화개에서 지난 가을을 보고 나서 모든 벚나무가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일종의 병이다. 감나무로 보자면 낙엽병이다.

화개의 벚나무 둥치에는 작은 링거 병 같은 것이 꽂혀 있다.

화개 십리벚꽃길의 벚나무 잎이 오래 가는 비결이었다.

그러나 불과 이틀 전에 확 접어 진 여름의 기세 뒤에 바로 보는 쌓인 낙엽은

여름은 끝났다는 희망의 소리를 위한 유용한 증거처럼 보였다.

 

 

 

 

 

 

 

잠시 2007년이나 2008년의 어느 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편안했다. 약간 가슴도 뛰었다.

이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란 가까운 과거 어느 날의 마음이 얼핏 생겼다.

 

 

 

 

 

 

 

지리산닷컴의 머리에 걸려 있는 물음표 없는 ‘행복하십니까’.

간혹 역습처럼 나에게 그것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또렷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노력 중이다. 오래 전에 했던 말,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주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이면 간혹 이전에 들었던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난다.

염천에 부산 사직실내체육관 천정 작업을 했다고 한다.

천정 전면에 유리를 끼우는 일이다. 손바닥과 팔목은 화상을 입는다.

등짝은, “등짝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난다니까. 하하하.”

나는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을 많이 상실했다.

 

 

 

 

 

 

 

대단하지 않은가. 나무.

하루 종일 저 햇살을 다 받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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