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6일 밤.





북부경북에서는 상갓집 술상에 문어가 올라왔다.
여쭈어보니 문어 없는 술상은 없다고 한다.

"전라도 초상에 홍애 올라오는것 하고 같다고 보면 맞제."

늦은 저녁밥을 먹고 마시지 못하는 소주에 입술을 적시고
권헌조 어르신이 차려주신 문어를 몇 점 씹는다.











12월 12일 예정이었던 KBS스페셜 '아버지의 집'은 방영되지 못했다.
권헌조 翁은 그 다음 날인 월요일에 별세하셨다. 화요일 오후에 유PD의 전화를 받았다.
다음 날 서울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서울을 가기 위해서 나는 진행 중인 작업을 끝내어야했다.
그러나 타블렛펜을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밖으로 나가서 담배연기를 날렸다.











수요일 아침 버스를 놓치고 남원으로 차를 몰았다. 서울에서 남원행 심야버스는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약속은 세 가지였다. 아주 추운 날씨였다. 충무로와 인사동 사이에서 6시간 정도 머물렀다.
마지막 약속은 유PD와 인사동에서였다. 생태탕으로 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역시 영감은 막걸리를, 나는 밥을 먹었다. 권헌조 어르신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촬영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 ENG는 없다. 나만 찍어야 한다. 프로그램은 이미 완료된 상태다. 마지막 몇 초만
들어내고 장례식 관련한 스틸 몇 컷만 삽입하는 것이 유PD의 결정이었다.
유PD는 금요일에 문상을 할 것이고 나는 금요일 오후 몇 시쯤에, 그러니까 역시 몇 가지 일들을
끝내고 구례에서 봉화로 향하게 될 것이다. 강남터미널에서 남원행 심야에 몸을 던졌다.
몇 주일 동안 잠이 부족했다. 그러나 까만 배경 속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잠은 오지 않았다.











'섬진강시멘트자전거도로'를 반대하는 문화공연의 무대현수막 작업을 숨 가쁘게 끝내고,
'수정은 안됩니다. 저 지금부터 토요일까지 없습니다!'라는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구례를 출발한
시간이 목요일 오후 4시경이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늦었다. 어두워진 그 망할놈에 팔팔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어두워져서 대구를 지나칠 듯 했다. 카메라와 밧데리는
제대로 챙겼는지, 도무지 모든 일상이 진행 중인 일들에 견인되어 이렇게 경황없이 떠나는
길은 뭔가 빠뜨린 기분이다.

"어디쯤입니까?"
"조금 전에 출발했습니다. 저 기다리지 마시고 올라가세요."











늦은 아홉 시 좀 못 되어 봉화읍 해성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권헌조 翁을 뵈온다.
슬프다.











정확하게 듣지 못해서 검색을 해도 저 벽을 두른 명단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일종의 장례위원회 명단이자 '당신의 부음을 들었다, 함께한다'는 사람들의 명단이기도 하다.
봉화 유림, 안동 권씨 문중 그리고 금요일 아침에는 안동 유림들의 것이 도착할 것이라는
말이 흘러 들어왔다. 안동에서 올라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소리들을 했다.

* 방송을 보신 분이 알려주셨습니다.
파록(爬錄)이라고 한답니다. 파록은 집사분정(執事分定)이라고도 하며 규모가 큰 유림행사에서는
주로 파록이라고 써 왔다고 합니다.











다음 날 장지에 진설할 예정이니 좋지 않은 날씨에 비닐로 씌울 모양이다.
그 방식을 놓고 설왕설래다.











발인 전 밤이었지만 빈소는 비교적 한산했다. 예상밖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KBS기자'라고 신분을 정리당한 나는 비교적 자유롭게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큰 카메라는 언제 오나' 라는 질문을 열 번 정도 들은 것
이외에는 편안했다.











"한문 배아가꼬 나믄 제문이나 지어주고,
제문 지어주믄 떡 한 접시 준다."

문상객들 중 한복 입으신 어르신들이 나누는 말씀을 동냥한다.











11시가 가까워지고 상주들도 문상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아무도 없는 빈소에 잠시 앉아 어르신과 대면한다.
이곳으로 오는 길은 항상 객관적인 일정은 불가능했지만 억지로 일정을 만들어 낸 다음이었다.
그렇게라도 나는 지난 7월부터 봉화를 찾았다. 즐거움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어떤 요인이 시작부터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아니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한다.
'지난 몇개 월 동안 어르신과 저의 인연은 무엇인가요?'











발인과 관련한 일정을 확인하고 빈소를 나섰다.
새벽 6시 30분 신혼곡 장면을 담는 것이 좋겠다. 역시 지금은 잠이 답이다.
천변에 몇 개 늘어 선 모텔을 찾았다. 그 말을 믿자면 '딱 하나 남은'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여관에 앉아 있었던 경우가 언제였지? 눈바람 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여관방.
상황이 익숙하다. 1991년 12월 어느 날의 이야기를 1995년에 끌적여 둔 글이 있다.

<...난 1cm라도 내 방과 가까운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날 나의 판단은 분명히 시종일관 착오와 비이성적 결정이라는 외길로만 치달았다.
대전으로 가기 위한 흥정을 끝내고나서 택시에 몸을 실었다.
대전에서 기차를 잡아탈 요량이었다. 내가 타 본 가장 비싼 택시는 국도를 질주했다.
캄캄한 터널같은 국도를 감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갔다. 굳이 국도를 고집한 나는
환각과 같은 침묵과 속도 속에서 절대로 내 방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제천을 지나서 나는 멀리서 깜박이는 여관이라는 네온을 보았고 차를 세웠다.
기사아저씨는 대전엘 가야 손님을 태운다면 투덜거렸지만 약속한 돈을 다 지불하자 말없이 돌아갔다...>

기억이 맞다면,
1991년 12월 거의 막바지 어느 날이 내가 혼자 여관에 우두커니 앉았던 마지막 날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경우 나에겐 확실한 방법이 있다.
수면제를 읽는다. 이틀 전 서울에서 만난 어느 편집자가 건내 준 책을 펼쳤다.
서경식, 김상봉 두 선생의 대화를 읽는다. 2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잠이 든다.
그날 역시 직설적으로 물었다.
'인문서를 왜 만들어요?'
그리고 나는 지금 '오래된 인문'의 부음을 듣고 봉화읍 여관방에 쓰러져 있다.











늦었다. 6시에 눈을 뜨지 못했다. 몸이 일어나지 못했다.
신혼곡을 촬영하지 못했다. 7시에 빈소에 도착해서 먹지 않는 아침밥만 먹었다.
그리고 기둥에 등을 세우고 밤을 보낸 다른 문상객들의 소리를 들었다.
다른 지역의 대학 교수들이라고 지난 밤에 들었는데... 아침부터 해장술을 앞에 두고
정세 논쟁 중이었다. 참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이었다.

"연평도 문제는 그렇게 보시면 안되요!
오바마의 위기를 감추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FTA를 숨기고 있는 것이고요."

말씀은 정연했고 소리는 공허했다.
나는 아는 이가 없기에 혼자 묵묵히 발인을 기다렸다.
아침 8시 30분. 예정대로 발인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발이 흩날렸다.
영안실에서 어르신을 모시고 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거의 전부는 권헌조라는 어르신을 알지 못하고
그의 부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상주가 곡을 했다.
나는 사진을 찍었다.











숨길 수 없이 쓸쓸했다.
어르신이 병원이 아닌 집에서 별세하셨다는 지난 밤의 소리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부음을 들었을 때 내 손이 떨렸던 것은 송석헌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지 못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마지막 자리는 송석헌이어야 한다.











손자손녀들의 손에 의해 어르신이 송석헌으로 들어서신다.
마지막 걸음이 되실 것이다.











마지막 외투가 마당에 놓여있다.
송석헌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바람소리만 마당을 가로질렀다.











상여를 씌웠다.











어르신을 더듬었다.











송석헌에 차려진 빈소 앞에서 집을 떠나는 마지막 제를 올린다.











송석헌에서의 사진은 항상 짙었다.
오늘은 빛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인사동에서 유PD와 한탄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집 때문일 겝니다. 집을 떠나 계셔서 몸도 떠나신 것이지요."
"너무 아까워. 그런 어른 다시는 없는데."











"추석 전에 뵈었을 때 피부도 더 좋아보이셨는데. 정신도 또록하시고.
어르신은 추석을 기다리신게 아니라 추석이면 집으로 가실 수 있다는
사실만 기다리시는 듯 했습니다."











'집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길을 떠나실 것입니다.'

상여꾼들이 일어섰다.











상여꾼과 상여, 상여와 상주 사이는 자간과 행간의 여백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로 내 생각을 집어 넣는다. 셔터를 누른다.











떠나신다
파인더 속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래야할 구체성을 찾지 못했는데,
현재는 항상 구체적이다. 그 멍함 속에서 시간은 흘러간다.
세월의 태반이 그렇게 흘러가더라.











마지막으로 집을 대면한다.











집을 슬퍼함인가 사람을 슬퍼함인가.
당신이 집이었고 집이 당신이었는데.











출상이다.











혼백이 앞서고 만가가 하늘을 가른다.











하루 한번은 걸음하던 길이다.
길은 그의 걸음을 알지만 세상은 그를 모른다.











집을 나선지 5분이나 지났을까,
사잇길로 방향을 바꾼다.











하늘은 더 어두워졌다.











가까워진다.











네이버 인물검색에 권헌조라는 '정보'는 없지만
우리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뒤늦은 부음을 세상에 알릴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많이 춥다.
손이 언다.
관계 없다.
그렇게 되려고 왔다.











왜 슬퍼하는가?











유PD는 그의 죽음이, 팔순이 넘은 노인의 죽음이 아깝다고 했다.
그의 가치는 무엇인가?











생각과 일상이 일치한 삶이었다.
낡은 사고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낡음과 새로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달랐다.











짧은 대화에서 나는 그의 사고가 진보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는 북부경북이고 그는 한학자이자 유교적 삶을 평생 이어간 어르신이다.
그런데 나에게 그는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노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복장과 일상과 형식이 세상에 대한 그의 자세와 태도를 규정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렇게 착한 사람 없니더.'
빈소에서 들었다. 착하게 살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착함이란 매일 자신을 되돌아 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日新又日新하는 태도는 소리없는 진보다. 정치적 입장의 날카로움은 저녁 9시 뉴스를
만 번 정도 본 사람들에게 대체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성인과 학자와 허명 가진 사람들의 소리보다 마을 엄니들의 소리에서 더 큰 각성을 얻는 것은
그것이 날生 것의 살아 있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진보란 착함이다.











평토제를 모실 자리에 당도해서 상여를 잠시 내렸다.
거리는 짧지만 여기서부터 길이 험하다. 베어진 논 두어군데에 불을 피웠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장례를 준비하지 못했다.
이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약 권 옹이 별세하신다면' 그런 장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휘날리는 만장과 긴 상여행렬은 없었다.
시골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례행렬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하루 전 밤부터, 개인적으로 장례과정을 기록하시던 분이 나에게 당신의 기록 영상을 권하신다.
감사하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는 소리를 반복했다. 그 역시 아쉬웠던 것이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노인은 병원비를 걱정하셨다.
병원의 답답함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비례했고, 타인들에게 자신의 퇴원을
설득하는 논리는 '병원비'라는 경제적인 현실이었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노인의 살림이다.
그런 근거 위에서 한학을 했고 유학자적인 삶을 영위했다.
한학과 유학은 노인에게 경제적인 이익을 주지 않았다. 노인의 한학은 실생활을 위한 공부였다.
스스로 지키고 실천하기 위한 공부다.











권헌조 옹은 한학과 유학으로 대단한 지위를 얻지 못했다.
권헌조 옹은 강단에 서지도 않았고 설 수도 없었다.
한학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강단에 섰고 한학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살림을 꾸렸다.
단지 퇴계의 학맥을 이어간, 스스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활한 한 사람의 촌로였다.











500년 전의 퇴계는 제도권과 비제도권을 넘나든 영남학파의 영수였다.
그로부터 500년 후의 권헌조는 영남학파의 학맥을 잇는 마지막 정신이었지만
그를 영수로 받드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기이원론이 무엇인지 네이버에서 검색한다.
그는 그런 시절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제대로 된 마이웨이 인생을 걸었다.
곤궁함은 필연적이었다. 곤궁함이 극복의 대상이 아닌,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











마지막 길이 가파르다.
그리고 미끄럽다.











상여꾼들은 마지막 걸음을 위해 잠시 힘을 모은다.
소주와 문어가 다시 돌려진다.











계십니까.











이제 벗어야지요.











먼저 가신분에게로 갑니다.











그때 당신은 뒤를 따랐습니까.











바람이 불고 숨이 차 오릅니다.











올라섰습니다.











이제 당신과 이별할 마지막 멈춤입니다.











모십니다.











자리를 잡습니다.











방향을 확인합니다.











마지막 손길이 잠자리를 살핍니다.











흙이 뿌려집니다.
쏟아지는 흙소리가 심장소리로 울립니다.











슬피 울어야 합니다.
마음껏 울어야 합니다.
흉중의 말씀은 울음으로 모두 흘려보내야 합니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 잎처럼
한 가지에서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구나.











지금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필요'와 '욕망'이 이 순간에 무엇입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존재 아닙니까.
어제까지 마주 보았던 일상적이고 당연했던 존재.
우리는 있을 때 그 존재 자체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다른 무엇을 더 얻고자 갈구하고 욕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더이까.
그래서 사람입니다.











저에게 몸을 주신 분입니다.
그것보다 더한 인연이 있습니까.











"상주는 직토하시요."

가혹하거나 당연하거나.

* 묘에 맏상주가 흙을 받아 관 위에 뿌리는 것을 '직토'가 아니라 '취토(取土)'라고 한다고 합니다.











눈 앞에 보이고 보이지 않고가 지금처럼 절실했던 적이 있습니까.











부인할 수 없는 이별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이별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람의 일이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권헌조 옹을 우리들 눈 앞에서 보내드렸습니다.











눈발은 더 거세게 몰아쳤다.
상여를 이끌던 어르신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효자가 죽어서 하늘이 우는게야."











봉분 작업은 한 시간 반 정도라고 하니 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평토제 자리로 내려와서 다시 몸을 녹힌다.











산소로 직접 문상 온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하지만 그 보다는 내리는 눈이 더 많았다.











봉분 작업을 확인하고 촬영하기 위해 몇 차례 오르내렸다.
26~7년 된 계원들로 짜여진 사람들은 일손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한 단 올리고 소리하고 한단 올리고 소리하기를 반복했다.
내 귀에 들리는 그대로 옮기자면 이런 소리들이었다.

오호~ 달구야. 손이라도 잡아보고오~ 어허 달구야~
정든 날을 빼고 나니~어허 달구야. 단 사십도 못살았네. 어허 달구야~











눈 내리는 모습이 돌아갈 길이 염려되었다.
작년 12월 30일 새벽에 눈쌓인 팔팔고속도로에서 차가 몇 바퀴 돌았었다.
전화가 온다. 구례에도 눈이 온다고. 출발하기 전에 도로 상황을 체크하라고.
눈쌓인 문어를 몇 점 씹었다. 입 안이 시원했다. 껍질은 추운데 속은 뜨거웠던 모양이다.











평토제를 지낸다.
기다린다. 업무적으로 나의 마지막 미션은 '완료된 봉분 모습'까지 촬영을 해야한다.











국밥을 권하시길래 시장하기도 해서 받았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자 몸의 질감은 슬러시가 되었다.











봉분 작업이 거의 끝이 난 모양이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 올라선다.











마지막 잔디를 입히고 있다.
봉분 모양이 정말 예쁘게 나왔다.
상여를 이끌던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 계십니까?"
"봉화 출신인데 지금은 영주삽니다."
"어르신 소리가 대단하신데 함자가..."
"예, 김응섭이라고 합니다."
"어르신처럼 소리하시는 분들을 뭐라고 칭합니까?"
"회다지소리꾼이지요. 횟소리라고도 하고. 여기서는 왕벌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렇게 상복을 입고 일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어제 생각해보니 권헌조 어르신 상인데 어르신 욕보이면 안되겠다 싶어서."
"그런데 어떻게 지역 언론사 하나 보이지 않을까요?"
"원래 못난 나무가 마을을 지킨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잘난 것들은 전부 서울로 가고 못난 것들만 남아 고향을 지킵니다.
저는 마...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검색을 해도 권 옹의 부음을 전한 언론사는 없다.
목요일 도착해서부터 발인하고 봉분을 만드는 동안, 나는 세속적인 사람이라 그런 것인지
그 어떤 언론사도 보도하지도, 방문하지도 않은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은 혼자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전화기를 몇 번 잡았다가 놓았다.
그런 나의 질문에 '못난 나무가 마을을 지킨다'는 말씀은 내 부질없는 상념에 마침표를 찍었다.











모두 산을 내려갔다.
혼자 남았다. 비로소 어르신과 독대한다.
큰절을 올렸다.
마을을 지키는 또 다른 못난 나무들이 만든 봉분은 완벽한 곡선이었다.











내려서니 아무도 없다.
모두 선돌마을로 돌아갔을 것이다.
송석헌에서 제를 모실 것이다.











천천히 걸었다.
눈은 이제 그칠 모양이다.
어쩌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많이 무겁다. 다시 몇 시간의 운전을 해야한다.
그러나 꼭 오늘 돌아가고 싶다.











어쩌면 오후에는 해가 나올 것 같았다.
얄궂다. 조금 전까지 그리도 눈바람 불어대더니.
오늘 이 길이 나와 송석헌의 마지막 길일까.
역시 멀고 험한 길이다.











마당으로 들어섰지만 잠시 쉬고 있는 상주들에게, 권동재 선생에게 인사드리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사를 잠시 멈춘 송석헌 밖을 한번 더 찍었다.
봄이 되어야 벽채에 흙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겨우내 이 얼씨년스러운 풍경은 계속될 것이다.
시동을 걸었다.
신발을 털었다.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봉화를 벗어날 때 다시 구제역 방역 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러면 차창유리는 이 날씨에 다시 빙판이 될 것이고 나는 워셔액을 분사할 것이다.
앞이 보여야 운전을 한다.











12월 18일 정오 무렵 구례.
아주 길었지만 깊이 잠들지 못한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뜨고 머리에서 들리는 소리는 선명했다.

'어르신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당장 생각나는 몇 사람에게 오후에는 전화를 해야겠다.
2011년 가을에 이곳에서 다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일을 벌여야겠다.
겨우 몸을 일으켜 2주일 만에 집안 청소를 하고 라면을 끓였다.
오후 2시에 읍내 경찰서 로터리에서 시멘트자전거도로반대 문화제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다시 카메라를 챙겼다.


* 12월 26일 KBS1 TV 20:00 KBS스페셜 '아버지의 집'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역시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이번에 방송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KBS창고로 들어갈 것입니다.
   듣기로 편집 완료된 프로그램은 어르신의 생전 인터뷰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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