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道 / 아버지의 집 - 경북 봉화 송석헌 이야기

마을이장 2010.12.08 20:41 조회 수 : 13253 추천:156





이 글의 사진은 2010년 7월 8일과 9일. 그리고 9월 16일과 17일 두 차례,
경북 봉화군의 고택 '송석헌'을 촬영한 것이다. 글을 만든 것은 촬영한 이후 돌아와서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곧바로 만들었다.
KBS스페셜의 스태프staff로 참여한 작업이었기에 독자적으로 발표할 수 없었다.
이제 방송일자가 정해졌기에 아래로 지난 여름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내려둔다.
다큐멘터리 타이틀이 '아버지의 집'이다.
분량이 많아 나누는 문제를 고민했으나 그냥 한방에 가는 것이 맞다는 판단이다.
189장이다. 로딩과 스크롤의 압박이 짜증스러우실 수도 있다. 송구스럽다.





"아, 일정이 그렇게는 좀 힘들 것 같은데요.
토, 일 중에 밥벌이 사이트도 하나 오픈시켜야 하구요."
"그래요... 다음 주 초반에 공사를 시작한다는데... 도저히 안되겠어요?"
"아무래도 힘들겠는데요. 음... 30분 후에 제가 전화드릴께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한 대 피고 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집으로 들어갔다.
월인정원에게 방금 받은 전화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구했다.
월인정원의 답변은 yes or no가 아닌 '냉면'이라는 단어였다.
며칠 전에 우연히 풍기의 서부냉면과 정아분식 생강도너츠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정아분식 도너츠 이야기를 들은 사무장네는 주문을 시도했지만 프랜차이즈로 변신하면서
택배로 주문은 안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일정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학예사들도 공무원이니 토, 일요일은 출근하지 않을 것이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나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왜 사이트가 아직 오픈되지 않았냐고.
갑작스러운 장거리 문상을 다녀왔다고 하자. 하루에 다녀올 수 없는 북부경북 봉화를 다녀왔다고 하자.
이미 이렇게 된 일을 어쩌겠냐고, 화요일이나 수요일까지 오픈시키겠다고 하자.
상황 자체가 두 가지 일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는 일정이다. 갑작스러운 문상과 같은 상황이기도 하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걸었다.

"아, 접니다. 내일 해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밥 주고 잠도 재워 주실꺼죠?"











2010년 7월 8일 목요일. 구례장날이다.
300km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 골동품 차량의 냉각기를 진단하기 위해 카센터를 방문하고
도서관, 우체국, 장도 보고 이른 아점도 먹고 CF메모리도 빌리기 위해 군청도 다녀오고
사무실도 잠시 가서 몇 가지 물건을 챙겨와야 했었고 네비게이션도 빌려야 했다.
네비게이션에 입력할 정보도 검색해야 했다. 다섯 개의 주요한 지명을 메모했다.
풍기의 서부냉면과 정아분식, 영주의 중앙분식 쫄면을 이번에는 해결하고, 봉화의 목적지,
돌아오는 길에 여유가 된다는 전제에서 봉정사 영산암을 입력했다.
그리고 길을 나선 것이 거의 정오 무렵이었다. 한창 더운 시간에 그 망할놈에 팔팔고속도로를
지나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멍청한 판단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팔팔을 벗어나서 중부고속도로로 올라서니 운전이 한결 수월해졌다.
거의 모든 휴게소에서 멈추었다. 담배와 골동 차량의 휴식을 위해 출발 전부터 그리 생각했다.
먼 길이다. 휴게소를 건너 뛰어도 4시간은 걸렸을 길이다.

서부냉면. 2006년 12월 이후로 처음이다. 4년만에 찾아왔다.
월인정원 曰, '우리 평생에 몇 번이나 오겠냐규?'
하긴 이런 주기라면 내 평생에 5~6번 이상 찾아 오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일 때문에 이 먼 거리를 이동했는데 바로 냉면집으로 오는 건 도착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하다는 생각은 더 이상 국물을 마실 수 없을 즈음에서야 생각났다.
오후 4시 29분에 냉면 곱빼기가 나왔다. 4시 45분에 그릇을 비웠다.
연이어 걸어서 5분 거리의 정아분식에서 도너츠 2팩까지 사들고 풍기읍을 벗어났다.
이제 봉화로 가야한다. 도착하면 저녁시간이 될 것인데 배 부른 티를 내어서는 안된다.








2010. 7. 8 - 7. 9 송석헌 첫번째 방문




네비게이션에 단순히 고택의 이름만을 입력했는데 찾을 수 없다.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결과다. 봉화읍내 파출소 앞에 차를 세웠다.
파출소 문을 스스로 여는 일은 내 평생에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인데, 전국의 모든 파출소가 그런가?
여자경찰만 세 사람이 앉아 있다.

"석평리 송석헌이란 고택 가려면 어떻게 갑니까?"
"어디요?"
"송석헌요. 오래된 한옥인데."

모른다. 럴수가 럴수가... 다시, 그러면 석평리는 어디로 갑니까?
석평리에 대한 위치 해석이 복잡하다. 이리가도 되고 저리가도 된단다.
이것은 결국 처음부터 모르거나 오리무중이다. 뭔 마을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알아 듣지 못하겠다.
전라도에 사는 경상도 남자는 경상도 억양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 은행나무 있는 집인가?" 라는 소리에 희망을 걸고 파출소를 나섰다.
'그 은행나무'가 있는 집이 맞았다. 멀리서 오른편으로 구례 출발 전에 이미지 검색한
그 집의 형상이 보였다.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잠시 장거리 이동의 종점을 축하하기 위한
담배와 주변 탐색을 했다. 오후 6시 25분에 첫 번째 셔터를 눌렀다.


송석헌松石軒. 경북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320.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9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권정선이 소유, 관리한다. 1700년 무렵 사복사정으로 추증된
권이번의 아들 권명신(權命申)에게 지어준 가옥으로 선돌마을 입구에 산을 등지고 서 있다.
지반의 경사가 심한 곳에 지어진 집이어서 경사를 이용하여 정침채를 세웠다. 경사 때문에 앞쪽 기단을
높이 조성했고, 정침 오른쪽으로 사랑을 두었다. 축대가 높아서 마당에서 볼 때는 건물이 매우 크게
보이지만 주고(柱高)는 낮은데 가옥을 지을 때 권이번이 벼슬을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가옥
규제를 따라 낮게 설계한 것이다.
일반 상류 주택에서는 드물게 오른쪽 사랑과 연결하여 계단을 달아 영풍루(迎風樓)와 연결시켰다.
사랑 우측으로는 선암재(仙巖齋)가 서 있으며 그 뒤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정침 오른쪽으로는
외손(外孫)들이 출입하며 기거하던 못채를 만들었고, 뒤쪽으로 한 단 높게 방앗간채를 배치했다.
전면의 대문채는 솟을대문으로 꾸몄다. / 출전 - 뇌이버 백과사전











석평리라고 하면 봉화에서는 생소한 모양이다. 선돌마을이 익숙한 지명인 모양이다.
파출소에서 여경들이 말했던 외국어도 '선돌마을' 이었던 모양이다. 여튼 도착했으니 되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일단 상황에 대한 파악이었다. 두 가진데,
일단 오브젝트에 관한 것, 송석헌의 스틸컷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에게 요청된 미션이다.
도착했다고 무턱대고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간을 봐야 한다.
느낌을 잡고 날씨 조건도 감안하고 해가 뜨고 지는 방향도 살펴야 한다.
다음으로 필요한 파악은 나 보다 먼저 와서 며칠째 촬영 중인 방송팀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악보를 봐야 뭔 연주를 할 것 아닌가.

촬영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흘째 촬영 중인데 마른 장마의 전형적인 하늘 그대로 어정쩡한 흐린 하늘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맑은 해를 본 적이 없었다고. 나 역시 도착하고 바로 촬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현장을 보는 것이 도착시간을 정한 이유였다. 주변 경관은 특별할 것은 없었다.
집 앞으로 높은 지형지물이 보이지 않으니 높은 시점의 촬영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기예보는 다음 날도 흐린 것으로 나와 있다. 이래저래 촬영 상황은 좋지 않다.
그렇다면 다음에 좋은 조건에서 촬영하면 되지 않은가?
문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루 전 늦은 밤에 전화 받고 다음 날 바로 달려 온 것 아니겠나.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다. 이를테면 지리산닷컴 사무실이 있는 전남 구례군 오미동의
운조루와 동급이다. 보수공사를 한다. 2010년 6월 25일부터라고 되어 있지만 7월 12일부터
공사를 시행할 예정이다. 운조루 옆에 살아서 짐작하지만 이런 보수공사를 하고 나면
원형 보존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그리고 공사 기간은 계획보다 항상 늘어난다.
미장, 목공, 석공, 와공, 드잡이가 모두 동원된다. 전면 보수공사라고 봐야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연락을 받은 시간에서 7월 11일까지가 현재의 송석헌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KBS스페셜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확하게는 담당PD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고, 그리고 30분 후 '내일 가겠다'는
전화를 하면서 여쭈었다.

"아니, KBS 진짜 노조에서 파업 중인데 봉화는 왜 가셨어요?"
"우리도 파업 중에 연락받고 급하게 내려온 겁니다. 원형 촬영이 이번 주 말고는 불가능입니다."

<예찬禮讚 - 어느 오래된 집에 대한 추억>이라는 프로그램이 기획되어 있었다.
물론 이런 정보도 도착해서 기획안을 보면서 알았다. 동영상+스틸사진+생음악으로 구성되는,
담당 연출과 작가가 이전에도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었던 방식의 프로그램이었다.
또 투덜거렸다.

"아니, 기획안을 어제 짠 것도 아니고 미리 연락을 주시지..."
"우리도 내려와서 급하게 촬영을 하는 거라니까. 원래는 가을에 촬영할 생각이었는데..."











일단 한번씩 투덜거려 주는 것이 좋다.
얼마나 갑작스럽고 열악한 조건에서 작업을 하는지 한껏 티를 내어 놓아야 사진의
질이 후지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왜냐면... 난 소중하니까.
무엇보다 나는 사진작가가 아니다. 디카족이다. 좀 많이 찍는.











집 안으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해지는 8시까지 카메라를 마당에 설정해 둔 상태라고 했다.
왜 그런거 있지 않나? 여러 시간 촬영해서 꽃이 피는 과정을 몇 초만에 보여준다거나 하는
그런 화면들 말이다.고택이 어두워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작업 중인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 일단 기웃거렸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셔터를 간혹 눌렀다.
나 역시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진입하지 않고 간을 보는 것이다.
찍고 뷰파인더 보고 설정을 이리저리 조정해보고 하는 헛짓을 반복했다.











누가 봐도 흔히 보아오던 스타일의 한옥은 아니다.
묘한 스타일과 독자적인 미학과 아우라가 있다.
포괄적으로 하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바라보자면 왼편 담장을 돌아 집 뒤로 이어지는 언덕길로 올라갔다.
출발하기 전에 검색해서 본 뷰포인터들이 이 지점이었던 모양이다.
조금씩 이동하면서 집의 모양을 음미했다. 처음 온 장소에서 마구잡이로 셔텨를 누르는
일은 조심스럽다. 그것이 단순한 여행이라면 돌아가서 포스팅을 하면 그만이지만
방송을 통해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집의 전형성이 녹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로 이 집을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집으로서는 작은 규모가 아니다. 더구나 이곳은 경북 봉화아닌가.
척박한 곳이다. 과거에는 접근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특별하게 자랑할 명승지가
희박하고 농경사회에서 절대농지가 절대부족한 지역이다. 살기 힘들었을 것이란 소리다.
북부 경북에서 가장 많은 볼꺼리는 서원이다. 북부 경북 자체가 퇴계 이황의 나와바리였고
그의 학맥이 주류인 지역이다.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의 입장이 강한 지역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정치적으로 재야쪽이었다. 원칙과 원론적인 입장이 강했고 따라서
현실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였다. 여당이 아니었다. 현실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진 지역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대구경북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일차적인
이미지는 '제일 보수적인 동네'라는 것이다.











산으로 이어진 좁은 길의 포스가 심상치 않다.
정갈하다, 단아하다, 뭐 이런 단어가 적절해 보였다. 올라가 봐야지.











정확하진 않지만 거의 정남향의 산소다. 역시 정갈하다.
동선이 명확한 저 발걸음의 흔적은 무엇인가?











7시 34분.
어둑하다. 자연상태 조명으로 더 이상 사진을 찍기 힘든 시간이 다가왔다.
가능과 불가능 사이의 이 시간 빛을 좋아한다. 물론 사진을 만들기는 참 힘들다.
이른바 트와일라잇.











일단 봉화읍내로 철수할 시간이다. 사진의 상태보다는 어두웠기때문이다.
내일은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바람이 불건 거시기하건 사진으로 결판을 봐야한다.
좋다. 이런 상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태.











봉화읍내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밥을 해결하러 나갔다.
2006년 겨울. 부석사에서 동해바다 울진으로 넘어가기 위해 봉화군의
춘양면에서 차를 잠시 멈추었다. 아마도 농협에서 돈을 빼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담배를 한 대 피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심한 산골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날이었다면 내가 이 길 위에 있을 가능성이 제로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봉화. 험하기로 유명한 북부 경북에서도 가장 심한 산악지형이다.
구례와 다르지 않아 저녁 8시 넘어 식당에서 밥 먹는 일이 쉽지 않았다.
역시 늦게까지 문을 여는 집은 고깃집이다.











늦은 10시 25분. 숙소로 돌아왔다.
읍내 다리의 키치적 풍미의 화려한 조명을 보면서 시골몸빼를 생각했다.
오래간만의 여관방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간판이 여관이건, 장이건,
모텔이건, 호텔이건 어쩔 수 없이 들어가면 잠을 청하기 힘들었다.
방송일을 하는 사람들이 머문 전국의 여관은 도대체 몇 개, 몇 날이나 될까.
작업에 나를 불러 준, 은퇴를 앞 둔  PD님이 구례를 찾았을 때, 은퇴작으로 '객사客舍'라는
다큐멘터리는 어떠하신지 의견을 말씀드린 적이 있다. 의미는 정확하지 않지만
'여관' 이라고 하긴 그렇지 않은가. 이를테면 해남의 유선장, 쌍계사 입구의 청운장같은
여관을 다룬다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여관들의 거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에.
아버님이 생전에 경주 천마총 발굴작업 취재를 위해 경주에 1년 정도 머물렀을 때 몇 번
경주를 찾았다. 경주시내의 오래 된 여관들이 좋았다. 자고 일어나면 밥상이 방으로 배달되었다.











새벽 5시 33분. 촬영팀보다 먼저 송석헌에 도착했다.
어제 오후와 별반 다르지 않은 빛 상태였지만 아침은 아침의 분위기가 있다.
대문은 잠겨 있다. 주변을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하루가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송석헌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택의 문을 여는 인기척이 들렸다.











2010년 7월 9일 금요일 아침 5시 39분.
문이 열렸다. 갓을 쓴 어르신이 문을 열었다.
급하고 어색하고 중구난방의 이유를 말씀드리고 안으로 들기를 청했다.











해의 기운으로 봐서 집은 남쪽으로 치우친 동남향이었다.
아침 해가 오르기 전에 송석헌 마당에서 집의 전모와 대면했다.
묘했다. 그리고 바로 노인을 따라야했다.











갓을 쓴 노인이 마당을 가로지른다.
느껴지는 속도는 느린데 실제 이동은 빠르다.
그것은 느리지만 반복된 행동이 보여주는 '익숙함'이란 속도일 것이다.











노인은 비틀거렸지만 확고하게 걸음을 옮겼다.











카메라의 모드와 몇 가지를 조정해야 했는데 도저히, '어르신 잠시만' 이라는
말이 나올 수 없었다. 노인은 그냥 노인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뒤 따르며 급하게 카메라를 만졌다.











바람을 찍는 것도 아닌데 연사모드로 설정했다. 이른아침 고택에서 셔터소리는 유난했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담장에서 잠시 숨을 고르셨다.
나는 카메라를 조금 더 어둡게 설정했다. 어두워서 사진이 힘들지만 나는 이번 사진이
묵직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연사로 두고 찍다보면 한 장은 걸릴 것이다.











마치 하나의 연결동작인 듯, 노인은 다시 빠른 속도로 어제 그 정갈한 길을 오르셨다.
경사가 쉽지 않아 내 호흡이 거칠었다. 카메라에 코를 쳐박고 거의 뛰는 걸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파인더는 호흡으로 흐려졌지만 그냥 붉은 포커스 점만 노리고 셔터를 눌렀다.











옆으로 달려 노인을 앞질렀다. 실례고 뭐고 겨를은 없었다.











언덕길을 거의 다 올라와서 다시 노인은 숨을 고르셨다.











지팡이를 꽉 쥔 손을 찍고 싶어서 단 일 초의 멈춤이 간절했지만 역시 요청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저녁 이 산을 오르는 노인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쥔
저 손을 찍어야 한다고 머리는 판단했지만 나의 호흡은 너무 거칠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회를 놓쳤다.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산소가 있는 집 뒤의 산.
하루 전, 노인이 오른 언덕길이 참 정갈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아침에 주관적인 해석으로 명확한 이유를 알았다.
그 길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한 길이었다. 그 길에는 잡념도 공상도 없었다.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둘러보신다.











흔적은











오로지











한 사람의 반복된 동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다시 인사를 드리고











올라섰던 길을 내려서신다.
중간에 한 번 쉬시지 않았다.











담벼락에 도착해서
잠시











아주 잠시 숨을 고르셨다.
노인의 어깨에서 '오늘도' 라는 안도의 한숨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려선다.
이 포커스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노인과 집은,











하나였다.











오히려 아주 느린 걸음으로,
그것은 중요한 일과를 성취한 사람의.











마루를 올라 방으로 드셨다.
5시 55분.











불과 16분 동안의 일이었다.
200번 정도의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를 던져놓고,
헐떡이는 내 호흡을 진정시켜야 했다.
왜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듯 한 느낌을 받았을까.











아침 8시 전에 집에 대한 촬영을 끝내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해가 많이 올라 온 다음을 이 날은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흐린,
차라리 어두운.
더 짙은 안개였다면 좋을 것 같았다.











한옥이 이 정도면 큰 편이다.
산에 기댄 지형적인 구조 그대로 이층 또는 단층을 높이 띄운 듯 한 구조는
집의 연륜과 함께 개인적으로는 그로데스크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높이가 아니었다.











사람은 살고 있으되 관리는 되지 않았다.
관리란 돌봄인데 돌봄을 의식하는 것은 이미 사람이 살지 않음을 뜻한다.











집을 관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살림이다.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든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림의 규모가 집의 사이즈를 결정한다.
송석헌의 아침. 나는 살림의 흔적은 보았지만 진행형의 살림집이란 느낌은 받지 못했다.
살림집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다. 아이들이 있다.
송석헌엔 노인 한 분만이 존재하고 있다.
집도 사람도 서로를 그리워한다.
집도 사람도 추억으로 현재를 연명하고 있었다.











전성기의 높이는 힘 있어 보이지만
쇠락기의 높이는 불안정해 보인다.
그 불안정성은 관찰자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송석헌에서 나는 불안했다.
그 불안, 그 불안정이 송석헌 사진을 찍게 만든 힘이었다.
송석헌에서 나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다.
집이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때로 악행이 선행보다 유혹적이듯.
송석헌은 나를 힘들게 만들었고 계속 작업하게 만들었다.











나는 겉돌고 있었다.











겉도는 나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나는 그 집에 속할 수 없다는, 집의 의사표현이었다.











그 의사를 존중하고











나는 계속 겉돌았다.











이 집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것은 난감하고 주제 넘은 생각이었다.
집은 사람을 갈구하고 있었다.











집과 사람의 공존을 생각했다.
문제는 머물 사람이었다. 그 장면이 주제를 벗어났다.
사랑.
이 집이 필요로 하는 것은 풋풋한 사랑이었다.











이 집을 바라보는 중심 미학의 하나는 '사이'였다.
나에겐 그랬다.











다층구조는 수 많은 사이를 만들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많은 생각이 있었다.
건축가는 작업을 하면서 가장 적극적으로 그 사이사이를 즐겼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만 알고 있는 사이를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다시 정면으로 돌아왔다.











왜 나를 불렀을까?
나와 송석헌의 어떤 요소가 합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을까.
주문에 의한 사진찍기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나를 통해서 송석헌의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것일까.











촬영팀이 도착했다.
아침꽃을 촬영하러 집 위로 올라갔다.
결국 올라서야 할 마루였다.











디딤발 자체가 높은 마루다.
왜.
권위.
도도함.
곳곳함.
일직一直함.

올라서서











집주인의 눈높이를 본다.
내려서서 집주인을 올려다 본다.
하루 전 오후 같은 동선으로 집을 돌아서 올라갔다.











무대.
불과 2시간 전에 이 무대 위에 한 사람의 배우가 지나갔다.
무대, 배우. 현실성이 없다. 나의 오늘 피곤함은 하루 전의 장거리 운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 몸의 80% 기능만 발휘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 속에 들어 온 느낌이다.











집의 서편에서 살림을 느꼈다.











선돌마을. 마을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럴만한 여유가 생길지는 알 수 없다.
아침 촬영을 마친 촬영팀과 함께 다시 봉화읍으로 나가서 아침을 먹었다.











9시 55분.
봉화읍에서 아침을 먹고 촬영팀과 함께 다시 송석헌으로 돌아왔다.
노인은 붓글씨를 쓰시기로 했다. 간혹 쓰시긴 하시지만 최근엔 건강 문제로 드문 일이다.
요청을 드린 일이다. 새벽에도 느꼈지만 뭔가를 수락하시면 그냥 바로 움직이신다.
전형적인 서예도구를 진설하고 어쩌구의 여유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200자 원고지.
격식이 없었다. 그리고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당신의 글씨는 별로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200자 원고지 위의 정갈한 붓글씨는 처음 보았다.
그것은 정갈한 충격이었다. 부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나의 글과 노인의 글은 다른 세상이었다.











권헌조權憲祖 옹翁. 83세.
송석헌을 지키고 살고 있는 권씨 가문의 후손이다. 안동 봉화 일대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통하며 아직도 유교적인 삶을 산다.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여기 오래된 가치를 붙잡고 있는 선비가 있다.
아침 저녁으로 의관을 갖추고 집 뒤에 있는 부모 묘지를 찾아 예를 갖추고,
외출하고 돌아와도 다시 묘소를 찾는다. 선대가 번듯한 벼슬을 한 적도 없고 본인 또한
공부가 부족해 자신을 한사코 한학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봉화 안동 일대의 한학자들이
제자를 자청하며 정기적으로 찾아와 한학을 공부한다.
그는 홀로 산다. 자식들은 다 서울에 사는데 그는 기어이 이 집에서 생을 마감할 작정이다.
이유는 단 하나, 부모님이 살던 집을 놔두고 어떻게 떠나냐는 것.
그가 품고 사는 가치는 여전히 과거에 있다. 그래서 과거는 과거일 뿐인가.
모든 오래된 기억에는 기억되어야만 될 무엇인가가 있다.
기억은 그렇게 완성돼 마침내 하나의 가치가 된다.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뒷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관정제하고 집 뒤에 있는 산으로 오르는 권헌조 옹.
산에는 부모 무덤과 조상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서 절을 올리고 예를 갖춘다.
하루에 두 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예를 멈춘 적이 없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이제 다시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드리러 또 오른다.
밖에 나갈 때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며 갓을 쓰지 않지만 산에 오를 때만은
갓을 올려 쓴다. 권헌조 옹은 그게 사람의 도리라고 믿는다.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촬영은 힘들었다. 좁고 어두웠다. 무엇보다 촬영팀이 동시녹음을 하고 있었던 탓에
나는 오디오맨의 신호를 기다려야 했다. 또는 내가 알아서 ENG가 자리를 이동하는
틈에 속전속결로 촬영을 해야했다. 촬영과 촬영 사이에 카메라를 '집어 넣고' 연사로 찍었다.
침묵이 흘렀고 노인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일을 했다. 짧은 틈에 호흡을 멈추고 촬영을
하려니 맥박수가 증가하고 얼굴은 터질 것 같았다.











집 건사
하루에 한 번, 집안을 둘러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권옹의 일과다.
홀로 살다보니 권옹이 쓰는 공간은 겨우 사랑채 방 한칸과 부엌 뿐.
그러니 그 큰 집 곳곳에 먼지만이 쌓여있다. 그 먼지 쌓인 집안을 가만가만 둘러보는 게
오전 일이다. 무너진 곳이 생겨나면 사람을 불러 고친다. 어떻든 집이니, 집은 사람이 사는
집으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믿음. 그렇게 사람은 집을 지키고, 그 집은 사람을 품는다.
그렇게 300년을 흘러왔다. 집 건사가 곧 삶이다.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나는 점점 조심성이 없어졌다. 정확하게는 보다 대담해졌다. 문턱을 넘어섰고
이것이 나에겐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란 것을 잘 알기에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필사적'으로 찍었다. 악귀처럼 달려들어 노인의 동작 하나하나를 잡아 내기 위해
악다구니로 덤벼들었다.











전화
아들은 서울에 산다. 아들 나이 이미 환갑을 넘었다. 아들은 몸이 좋지 않다.
그래서 자주 내려오지 못한다. 매일 밤 울리는 전화. 아들은 아버지를 걱정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걱정한다. 늘 아들의 건강이 걱정이다. 권 옹이 조상이 남긴 문헌
몇 개를 내 놓으며 말한다. "제 글씨는 형편없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글씨가 제일
안되는 게 나라요. 아들 글씨가 그래도 내보다 낫습니다." 글 잘 쓰고 문장 좋다는
아들에게 이 집은 무슨 의미일까.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노인의 얼굴에서 집의 모습을 잡고 싶었다.
사용 여부는 차후의 문제였고 나는 더 깊숙하게 노인을 향해 진입하고 싶었다.
노인의 방에서는 곰삭은 먼지 냄새가 났다.











제자의 걸레
그의 집에는 정기적으로 한문 공부를 하러오는 제자들이 있다. 제자들의 나이는 이미
5~60대. 그들은 올 때마다 비닐봉지에 걸레를 싸가지고 온다. 스승의 방을 청소하고 나면
그 걸레를 다시 비닐봉지에 넣는다. 걸레를 두고 가봐야 스승이 빨아야 하니, 아예 가지고
와서 닦고 그걸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다. 가벼운 맞절과 함께 시작되는 스승과 제자의
한문공부. 공부가 끝나면 제자는 다시 걸레봉지부터 들고 일어선다.
행여 스승이 낚아챌까 미리 챙기는 것이다.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200자 원고지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무료한 일상일 것 같지만 권옹의 일상은 나름대로
상당히 바쁘다. 오라는 데가 많기 때문. 어디 오래된 집을 개축하다 상량문 하나가
나와도 그를 부르고 누가 죽어 비석을 세워야 할 때도 그를 부른다.
오래된 문자를 해독하고 쓸 줄 아는 이가 없는 시대. 그는 빨간 줄이 그어진 200자 원고지
위에 또박또박 한문으로 문장을 쓴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한시 백일장에 심사위원도 그의 몫이다.
한시 백일장이라? 권옹의 문화권 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옛 방식의 문장과 문자를 쓰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비행기가 지나갔다.
밖은 소란했다. 이미 공사를 위한 자재를 담 밖으로 내려 놓는 모양이다.











젊은이
송석헌은 앞에서 볼 때 마치 2층 집처럼 보인다. 조선 양반가옥으로는 매우
특이한 구조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일탈과 파격의 맛이 있는 집이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가끔 건축하는 젊은이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송석헌에서 '건축'을 찾지만,
그들에게 권 옹이 말하는 것은 '집'이다. 그들은 송석헌의 구조를 해체시켜 보지만,
권옹은 송석헌에 뭉뚱그려진 이야기의 총체를 보여준다. 선친이 고쳐 박아놓은
나무 기둥 하나, 그 나무가 어디 산에서 왔고 어느 목수를 불러 개축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다시 조선 가옥이 현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질되어 왔는지를 분석한다.
젊은이들은 집의 '겉'을 보고, 권옹은 집의 '안'에 살고 있다.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노인의 옷은 낡았다. 아주 낡았다.
노인과 노인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오래되었다.
나는 그 오래됨에서 기품을 느끼기 보다 곤궁함을 보았다.











중앙정부 지정 중요민속자료. 그것은 훈장일까.
국가는 집을 보호한다고 한다. 몇 억, 몇십 억의 예산을 고택 수리에 투여한다.
그 집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떠나면 집은 없다.











왜 이혼을 많이 하는 것일까요?

"서로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은?

"실천하기 위해 듣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듣기 위한 것이니 부질 없는 소립니다."











말씀은 간명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은 갈라설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말씀에 막힘이 없었다.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계시단 느낌을 받았다.











오래 쓸 수 없다고 하신다.
원고지 위에 집중하고 있다보면 어지럼증이 도진다고 하신다.











노인의 손은 피부와 속살로 분리된 두 개의 객체로 보였다.
속살이 희박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차라리 피부와 뼈로 구성된 손으로 보였다.
그 손이 잡고 있는 붓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지탱하고 있다.
집과 노인에게서 내가 받은 느낌의 뼈다귀는 그것이다.











"안동 권, 복야공파 삼십칠댑니다. 시작하시기 전에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노인의 글쓰기가 끝이 난 후에야 큰절을 올렸다.

"허허 그런가. 나는 삼십사세네."

잠시 숨을 돌렸다. 무거운 햇볕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부경북, 더운 지역이다.











육신肉身.
영혼의 현신現身이라고 한다.
세상에 보여주는 나의 겉이다.

깨지고 낡은 것은 불편하다.
깨지고 낡은 몸은 불편하다.

세대를 화제에 두고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태중胎中의 할아버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허허허."











세대世代.
시골에 살면서 느끼는 점은 세대차이로 인한 갈등이 지난 200년 이전에는
그리 극심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세상과 사물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권 翁은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계신 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단면이기도 하다.











'당연하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것의 보편적 총합일 뿐이다.
사실 우리라는 범주는 지리적, 인문적, 문화적, 경제적, 정서적 일치감이 높은
사람들의 레이아웃인데 그 범주 밖을 벗어난 사물과 현상, 생각에 대해서 우리는
'이상하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와 이상함'은 충돌한다.











노인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육신의 호흡은 거칠었지만 정신의 호흡에서 번뇌는 없어 보였다.
노인은 스스로 당연한 삶을 이어왔고,
우리는 그 당연함을 이야기로 삼자고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노인의 모든 것은 붙박이였다.











햇볕으로 나섰다.











이제 곧 이 집은 일단 원형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사는 집을, 그것도 300년을 이어서 살고 있는 집을 수리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의 수리와 지금의 수리는 의미와 결과가 다를 것이다.











나는 이미 제한선 없이 카메라를 집어 넣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또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턱없는 욕심을 내고 있었다.











채용신이 그린 간재艮齎 전우田愚의 초상화를 생각했다.
전신사조傳神寫照.











방으로 드셨다.
최근에는 이렇게 누워 계신 시간이 대부분이다.











금년 남은 시간 동안 계속 될 공사로 인한 소음 속에서
노인은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











10시 29분.
문안인사 올리고 방을 나섰다.

원고지 서예 촬영이 끝나고 방송팀은 짐을 꾸렸다.
일단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남았다.











안채 마루
안채는 텅 비어있다. 먼저 간 아내의 살림살이는 그대로 남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권 옹은 그 안채 마르에 앉아 오전 해바라기를 한다. 집에는 그만의 기억이 살고 있는게 아니다.
그의 아내의 삶과 그 어머니의 어머니,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다.
아내가 박아놓은 나무 못 하나, 그 위로 아들이 박아놓은 나무토막 하나가 다시 쌓인다.
그렇게 기억은 기억위에 쌓이며 하나의 역사가 된다. 한 집에 담긴 삶의 역사를 그대로 품고 사는 집,
이제 우리에게 그런 집은 별로 없다. 때 되면 이사가고 이사가면 잊어버린다.
그래서 송석헌이 숭고하다.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노인은 잠을 청하셨다.
노인이 주무시자 집도 잠이 들었다.
나는 살금살금 송석헌 속을 유영했다.











적막함 속에서,
늦은 햇볕 속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는 공허했다.











도착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나의 노가다가 헛짓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방송팀의 노가다는 사실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방송과 출판처럼 만들다가 허무는
경우가 많은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60분 프로그램을 며칠 동안의 촬영과 나의 스틸로 커버할 수 있을까?











새벽부터 정오가 되기 전까지 일을 하면서 나는 방송 여부는 생각하지 않았다.
송석헌과 권 옹을 기록해 두었다는 행위 자체로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편도 300km 이동은 가치가 있었다.

생각하지 않았던 햇볕이 나오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부분의 사진은 '밝음'을 배제했다. 이미.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송석헌을 백번 본 것이 아니라, 단 한번 본 하루의 기록에서
나는 나의 촬영 concept을 그리 설정했다. 햇볕 상태의 송석헌 촬영이,
과연 돌아가서 내 스스로의 셀렉팅을 통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을 다시 일별했다.
더 남아 있어도 나열된 아이템 중 가능한 촬영은 없어 보였다.
'ㅁ자 ' 안채에 대한 촬영과 실내 촬영이 미진함을 알았지만
찍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찍지 않은 것이다.
집을 건사할 수 없는 노인에 대한 결례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에게는 모두
잊히지 않은 집 한 채가 있다.
떠나와서 더 그리운 집
거기에는 아직도 기억이 살고 있다.
그래서 모든 오래된 집은
기억의 사원이다.
기억의 사원으로 떠나는 여행
어느 오래된 기억에 대한 예찬.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남는 것은 추억이다.
하나의 집은,
시작되고 지어지고 마무리되고
쓰여지고 사람받고 지속되고 사라지며
마침내 추억을 남긴다.
- 건축가 김기석 / 오정요 작가의 기획안 中











오후 2시 넘어 영주의 삼계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청했다.
북부 경북에 대한 편견 탓인지 옆 테이블의, 명백한 삼십 대 사내들의 대화는
놀랍도록 보수적이었다. 보수라는 표현은 고급스럽고 뭐라고 해야할까.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삼계탕을 먹었다.
가당치도 않은 상상이지만 노인을 모시고 나와 삼계탕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
드려야했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KBS팀이 가을에 다시 촬영을 하게 된다면 나 역시 다시 찾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가능하다면 다시 송석헌을 찾는다는 것이 지금 나의 마음이다.
그때 나는 송석헌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2010. 9. 16 - 9. 17 송석헌 두번째 방문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한 달 정도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두 달이 넘었다.
잠자리가 구례에서 봉화로 공간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성벽을 두르고 있다.
예상했던, 익숙한 모습이다.











시간이 흘렀고 원래는 한 차례 촬영일 것이라 생각했지만(물론 나 혼자 생각에)
수리 중인 송석헌의 모습을 기록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전남 구례에서 경북 봉화까지는 먼 길이다. 물리적, 마음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역시 전혀 어떤 여유도 생기지 않았다. 결국 여유가 있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강제한다. 고급용어로 '해치우는 것'.

지금까지 해체작업을 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예상 공기는 2010년이 가기 전에 끝이 나는 것이지만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지난 7월 촬영에서 이미 '이 공사는 1년은 걸립니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전문가적 견해로 그런 것이 아니라 시골 일이 그렇다.
무엇을 상상하건 항상 그것 보다는 늦다.











전화상으로 확인한 네 가지 촬영 미션이 있다.
역시 우선 순위는 공사 중인 집을 촬영하는 것이다.
번와飜瓦(기와 교체) 작업을 할 때 기존의 낡은 기와를 저렇게 파손하지 않고
최대한 살리는 것은 정말 힘든 것인지. 활용할 곳이 많은 것이 기와다.
담장 작업에서 그릇으로까지.

오후 4시경이었다. 선돌마을은 해 지는 시간이 이르다.
2박을 예정하고 왔지만 가능하면 1박으로 작업을 완료하고 싶었다.
그렇게 끝이 난다면 여름휴가라고 생각하고 부석사나 봉정사 방면에서
하루 정도 쉬고 싶었다.











들어섰다.
이용 가능한 목재를 제외하고는 전면보수다.
집은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옥 벽체의 씨줄과 날줄은 대나무와 새끼로 엮은 산자橵子인데 흙을 받아내고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사무실 옆 운조루 보수공사에서 이 산자를 각목과 나사못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문화재 보수 허가를 가진 업체를 전혀 믿지 않게 된 계기였다.
사진 찍어서 문화재청에 알렸고 그들은 재작업을 해야했다.
천박한 세상은 브로커를 양산한다. 브로커는 원래 '중개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의미가 변형되어 '일을 따 먹는 놈'들을 지칭한다.
헛소리라고 해도,
촬영을 하는 동안 이 나름으로 관통하는 미학이 있었다.
집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11월만 되어도 벽 작업을 하지 못할 것이다. 기온이 내려가면 흙을 붙이기 어렵다.
송석헌의 보수 공사가 약속된 일정을 지킬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다.
일만 제대로 한다면 그 자체는 예산으로 진행하는 일이니 별 문제는 없지만
집 밖으로 나가 계신 어르신의 불편이 길어질 것이다.
아래로 송석헌의 '아름다운 뼈다귀'를 내려둔다.






















































































































































































한 시간 정도 촬영을 했다.
일단 첫번째 미션은 완료 된 것 같다.
이제 봉화읍으로 이동할 생각이다.








9월 16일 6시 무렵. 봉화읍 해성병원




'혜성병원'으로 검색해서 네비게이션에 나타나지 않았다.
해성병원이었다. 군립병원이었다. 병원은 낡고 정갈했다.
3층 노인요양원에 권헌조 어르신이 계셨다.
병실로 들어서자 담배냄새가 났다.

"ㅎ 여기서도 피우세요."
"답답해."











병실 문을 열면 맞은편 벽은 에어컨으로 막혀있다.
내가 들어서도 답답하다. 무료하신지 객客을 반기신다.











연세도 계시고 물론 건강이 좋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문제가 있어 입원을 하신 것은 아니다.
집수리 기간 동안 잠시 송석헌을 떠나 계신 것이다.
그 소음과 먼지를 짐작할 수 있다.











촬영팀으로부터 어르신이 병원으로 들어가셨다고 들었을 때 나는 차라리 안도했다.
송석헌에서의 일상이, 워낙 고령에 구체적인 수발을 드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었던터라
생각만해도 막상 막막한 대목이 있었다.











입원을 결정하기 전에는 나에게 어르신의 동향에 대한 점검 임무가 요청된 상태였다.
예정대로라면 촬영팀은 북인도의 어디 즈음에선가 촬영을 하고 있을 즈음이라
경북 봉화의 상황을 체크할 사람을 필요로 했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병을 오시는 분들이 계신지. 자주 있다고 하신다.
불편한 곳은 어디신지. 빨리 집으로 가시고 싶단다.
이내 누우신다. 이야기를 나누면 쉽게 피곤해지시고 어지럽다고 하신다.
하지만 허락한다면 대화를 즐기시는 분이다.
노인의 권위를 전혀 앞세우지 않으시는 분이라 나 역시 대화가 즐겁다.











누워 계신 상태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피부는 많이 좋아지신 듯 했다.
당신은 부정하셨지만 뵙기에 건강 상태는 호전되신 듯 했다.
아무리 부인해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셔야 할 연세이시다.











전화가 온다. 택배다.
차근차근 설명하시고 이어서 송석헌에 있는 아드님에게 전화를 하신다.
추석을 앞 두고 두 아드님이 내려와 계신다.








9월 17일 봉화 장場.




공사 중인 송석헌, 병원의 권헌조 어르신 그리고 봉화장을 촬영하는 것이 세번째 미션이다.
아침 8시 못되어 숙소에서 가까운 봉화읍 장으로 갔다. 새로 지은 시장건물과 천막들이
어우러진 장터 풍경이었다. 대목을 앞 둔 장이지만 아침이라 그런 것인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구례장보다 장터 셋팅이 늦었다. 읍내로 들어오는 첫 버스 시간이 구례보다 많이 늦었다.
9시가 넘도록 천막은 계속 준비되고 있었다.
장거리에서는 이벤트도 준비중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장터활성화 프로젝트가 진행중인 장이었다
몇몇 예술가들이 봉화에 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쪽으로 산을 넘어서면 동해다. 울진으로 통한다. 해산물도 풍부해 보였다.
북부경북에서 많아 생산되는 사과가 많이 나왔다.
사과는 요즘으로보자면 장이 아니더라도 읍내에서 아침마다 경매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복숭아도 옛날의 그 나무가 남아 있는지 짙은 향의 작은놈이 간혹 보였다.
장은 풍성했고 사러 나온 사람보다 팔러 나온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아래로 몇 장 봉화장 풍경을 내려둔다.





















































다시 봉화읍 해성병원.
장터 촬영을 끝내고 병원으로 갔다.
지난 밤의 어르신 사진이 너무 어두운 듯 했고 식사하시는 모습을 담고 싶기도 했다.





역시 앉아 계셨고
역시 담배 냄새가 났다.











무겁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유학자.
포장이나 가식이 없는 노인.
자신의 삶이 스스로 당연한 자연인.











찬을 거의 손대지 않으셨다.
모든 것이 짜다고 하셨다.











거의 유일하게 국수를 후루룩 드셨다.
물을 조금 타서 드셨다. 넘기기 편하신게다.
그러나 국수는 거의 영양가 없는 끼니이기도 하다.











추석이 오기 전에 일단 송석헌으로 돌아가실 생각만 하시는 듯 했다.
집이 편하신게다. 행랑채는 바닥공사도 되어 있는 듯 하다고 말씀드렸다.
임시방편으로 행랑채에라도 기거하실 계획이시다.











병원비도 부담스럽다고 하신다.
진지 드신 후 병원을 빠져나왔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언제가될지 기약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노인일 것이다.
주장하지 않는 노인.
좌중을 말言의 양이 아닌 질로 집중시킬 수 있는.











마지막 미션을 위해 다시 송석헌으로 이동했다.











닭과 토끼가 함께 잘 살고 있다.
풀을 뜯어주자 녀석들이 모여들었다.











권동재權東載.
권헌조 옹의 큰 아드님이시다.
카메라에 대해 비교적 비협조적인 이 어르신을 촬영하는 일은
아무래도 나에겐 출발전부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촬영팀이 봉화로 내려오는 날 KBS라는 방패를 앞세우는 방법이 용이할 듯 했다.
특이하게 스틸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다보니 촬영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같은 장면을 두번 겪는 것이다.
다시 인사를 드렸다. 삼십오대이시니 나에겐 할아버지뻘이 된다.
이런 경우 같은 집안임을 내세우는 것이 조금 유리하다.

"할아버님, ㅎ 저하고 산소에 한번만 올라가시지요."











지난 7월 9일, 어르신이 오르셨던 동선을 염두에 두었다.
그때 포커스를 생각하면서 촬영했다. 동일한 상황에 놓인 두 인물의 비교라기 보다
데자뷰에 가까웠다. 생김, 몸짓, 스타일 모두 그러하다.











다르지만 같은 사람의 뒷모습을,
같은 길에서
나는
뒤쫓고 있었다.











담배.
그는 곧 담배였다. 이전 방문에서도 나는 엄청난 양의 담배꽁초를 목격했다.
사발에 담겨진 그 무수한 필터는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담배는 그의 호흡을 힘들게 만들었고
그는 호흡을 위해 담배를 필요로 했다.











권헌조 옹이 병원에 계신 동안 권헌조 옹의 발걸음마다 풀이 올라왔다.
그 흔적은 명확했고 파릇했다.
계시건 계시지않건 권헌조 옹의 흔적은 또렸했다.











권동재 선생의 움직임 역시 익숙했다.
권헌조 옹이 마지막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집을 수리하는 동안은 봉화에 계실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내가 질문을 던졌고 그가 답했다.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말씀이 명확하고 막힘이 없다.
나는 셔터를 누르면서 대화를 지속했다.
상황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들어야했다.











내가 답한 것은 아마도 안동 권, 복야공파라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송석헌이 있는 선돌마을에 복야공파 집이 한 집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안동 권씨는 몇 개 파가 있는지 물었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은 없었다.
15개 파가 있다고 한다. 처음 알았다. 성씨를 언제 받았는지,
고태조(왕건)와의 관계, 단종에 대한 지역의 애착 등에 대한 말씀이 있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들이 병원에서 어르신과 나눈 것인지, 이곳에서 권동재 선생에게
들은 것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혀는 단지 사진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짧은 시간에 미션을 완료하는 이 일에 나의 진정성이 얼마나
투여되는 것인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한다.
역광에 투영된 그의 무게는 새털처럼 가벼웠고 내 마음은 무거웠다.











"그곳에도 고택이 하나 있지?"

내가 살고 있는 구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 운조루라고 큰 고택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참 많이 돌아다녔는데..."
"구례로 한번 오십시요. 모시겠습니다."
"이제 힘들어..."

그의 어깨에 송석헌이 내려앉아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권동재 선생을 다시 청했다.
영주까지 드라이브 한번만 하시지요.











지난번에도 찍었다고 한다.
그래도 한번 더 찍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와 만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의 시선은 허공을 쫓고 있었다.
바라 볼 이유가 없는데
바라 볼 필요가 없는데.
아니라면,
갈급渴急하게 바라보아야 할 대상을 쫓고 있거나.











꽃은 부유하며 점멸했고,











그의 시선은 아무것도 포획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물고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거물을 던진 어부와 같았다.











코스모스와 사과밭이 스쳐지나갔다.
북부경북의 어느 길 위로 가을이 내려서고 있었다.











셔터를 누르면서 나는 그의 생각을 종잡을 수 없었다.
요구는 어울리지 않았고 상황에 충실해야했다.
나 역시 선택 없는 집중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손가락을 보지 않고 달을 보려면 그 방법이 옳을 듯 했다.











인삼밭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묵默음 속을 조금 빠르게 달렸다.















































그 오후로 나는 봉화를 떠났다. 부석사를 바라고 올라갔다.
촬영팀은 추석까지 촬영을 결정하고 봉화에 남았다.
이번 촬영도 역시 힘들었다. 역시 물리적 이유만은 아닌 듯 하다.

돌아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차례의 촬영 사진을 정리하고 보정해서 보내주어야했다.
사진을 만지는 동안 나는 여전히 봉화 송석헌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나는 겉돌고 있었는데 사진 속 송석헌에는 내가 있었다.
단순히 풍경을 찍는 일이 아닌,
내 사진이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드문 경험 때문도 아닌,
이유를 알 수 없는 다른 그 무엇이 나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
어느 여름의 힘겨운 촬영은 나에게 단순한 하나의 일이었을까.
내가 다시 송석헌을 찾게 되는 날이 있을까.
왜 우리는,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 유동종 PD님의 은퇴작이다.
   개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방송국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인정하고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감독님의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런 문제로 나를 갈등하게 만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월급쟁이로서 마지막 작품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유PD님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hommage로...

* 방송일자는,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20:00 KBS 스페셜 '아버지의 집'.
   프로그램에는 지리산닷컴의 위 사진들 중 몇 장이 나갈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나 이명박 정권 이후 'KBS스페셜 편성은 아무도 모른다'는 전설이 있는 모양이니,
   연평도 상황같은 일이 발생하면 연기될 수도 있습니다만,
   현재(2010. 12. 9) 편성표 상으로는 방송을 할 듯 합니다.    

* 금요일 자정 넘어서면서 갑자기 뭔 디지털 거시기 다채널 거시기 등,
  여튼 KBS 홍보 프로그램으로 편성이 급 변경되었네요.
  정말 KBS스페셜 편성은 거시기도 모를 일이군요.
  아마도 수신료 등등해서 자체 구라용인 듯.
  이번 주 방송 안되는 것은 확실합니다.
  얼마나 밀리는지는 저도 모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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