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 Fake Documentary ‘나의 살던 고향은…’

마을이장 2011.09.09 01:24 조회 수 : 7565 추천:48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 가짜 다큐멘터리다. 실제를 가장한 허구.











몇 가지 키워드를 정기적으로 검색한다.
지리산닷컴, 오미리, 운조루,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구례… 같은 것들이다.
지난 8월 25일 오마이뉴스 기사가 걸려들었다. 같은 사람이 작성한 기사는 두 가지였다.
기사 제목이,

<"이 산골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어요“ - 전통가옥과 자연풍광 묶어 보배로 만든 구례 오미마을>
<"행복마을인데, 불행마을로 만들 수 없어" - 이병주 구례 오미행복마을 추진위원장>

웃음이 나왔다. 지리산닷컴의 지리적 좌표에 해당하는 마을에 관한 기사다.
기사 제목으로 보자면 오미마을은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마을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기사가 작성되고 있었을 무렵은 1주일 간격의
마을임시총회가 열리고 있었던 시기일 것이다. 시골마을에서 임시총회란 것은 드문 일이다.
중복이나 말복에 닭 잡고 대소사 이야기하면 된다. 굳이 ‘회의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일은
뭔가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뜻이다. 안건은 간단했다.
‘다 집어치워라!’











아이러니이거나 코미디였다. 마을은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승천할 것 같은 기세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란 짐작을 했다. 특임장관 이재오가 온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다행스럽게 아버님 제사였기에 그 부끄러운 시간에 오미동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었다.
“이재오 오지 마! 뭐 이런 현수막이라도 하나 걸려야는거 아냐? 도대체 지금 엄니들 불려나와서 뭐 하는 거야?”
잠시 길을 떠나는 자의 입은 가벼웠고 마을은 풀을 벤다 어쩐다 분주했다.

<특임장관실 구례 오미행복마을과 자매결연 / 브레이크뉴스 2011.08.05 (금) 오전 7:50>
특임장관실(장관 이재오)이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행복마을(추진위원장 이병주)과 4일 농촌사랑 1사1촌
자매결연을 갖고 봉사활동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오미행복마을 농촌체험관에서 체결된 자매결연식에는 이재오
특임장관을 비롯해 특임장관실 관계자 25명과 오미행복마을 주민 50명 및 유관기관 25명 등 100여명이 함께했다.
결연식에 앞서 이재오 특임장관을 비롯한 특임장관실 관계자들은 마을 주요 도로변을 정비하고 친환경 콩 밭과
벼논 제초작업을 하는 등 농촌사랑운동의 소중함을 체험했다.











이재오가 물건이긴 한 모양이다. 결국 일이 터진 것은 이재오가 다녀가고 2주일 정도 지나서였다.
결과론적으로 지금 오미동에서의 일종의 격변의 불쏘시개 역할은 이재오였다. 역시 특임이라 다르다.
이재오가 다녀 간 이후 내재되어 있던 마을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그 불만의 핵심은 무엇인가?
“누굴 바보로 아나!” 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사람 마음은 오십 보 백 보라, 마음에 없는 짓을 계속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사태의 발단은 ‘예산’이었다. 돈.
위에 언급한 기사의 한 대목을 취해보자.

<지리산 자락,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는 이렇게 예부터 내려온 명당 터다.
오래 된 전통의 한옥이 있고 지리산과 섬진강이 풀어놓은 자연경관도 빼어나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구슬'에 불과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이것들을 꿰어 보배로 만들어 준 게 있다. '행복마을' 사업이다.
행복마을은 6년 전부터 전라남도가 추진해 온 특색사업이다.>











전라도에서 살다보면 간혹 듣는 말이 있는데, ‘박준영(전남도지사)은 F1하고 한옥밖에 모른다.’
전라남도에 팔십 개가 넘는 한옥마을이 조성되었고 연말까지 가면 백 개 정도를 채울 모양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이명박은 청계천, 오세훈은 한강 뭐 그런 식의 오야지 마음이다.
특히 서울을 벗어나면 언론이라는 것이 지방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자하는 열망 이외에는
다른 사명감은 거의 없기 때문에 사또 노릇하기는 서울보다 훨 편하다. 기사를 조금 더 인용해보자.

<골칫거리가 된 우리 농어촌을 누구나 살고 싶은 지역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마을을 가꿔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대처로 나갔던 형제·자매들도 다시 불러들여
함께 살자는 마음도 담고 있다.>

캬! ‘골칫거리가 된 우리 농어촌’ 굉장한 표현이다. 여하튼,











<그 결과 마을이 달라졌다. 3년 전까지 산골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마을이 '살기 좋은 마을'로 바뀌었다.
일자리를 찾아 대처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땅만 내주면 들어와 집을 짓고 살겠다는
외지인들도 줄을 섰다. 한옥을 체험하려는 관광객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또 캬! ‘일자리를 찾아 대처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교복 입던 시절 극장에서 보던 대한늬우스의 감동이 밀려온다.

<주민들의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새로 지은 한옥에 하룻밤 묵을 손님을 받으면서 가욋돈이 생겨난 것이다.
올 여름 한 철에만 가구당 200만〜300만원씩 챙겼다. 주민들 사이도 믿음으로 돈독해졌다. 잦은 모임과 교육을
통해 주민의식도 높아졌다. 마을을 위하는 일이라면 너나없이 발 벗고 나서는 것도 행복마을 추진 이후 달라진 풍속도다.>

완전 캬! ‘가구당 200만〜300만원씩 챙겼다.’ 그런가? 그렇다 하고… 여름 지나면?
그래도 마지막 문장은 역시 압권이다. 너무 이상적인 마을 아닌가!
2011년 8월 28일 일요일. 오미마을에서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가능하게 한 주역들을 모두 사퇴시키기 위한
총회를 노인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5시간 정도 진행하고 있었다. 격렬했던 것이다.










얼굴 보고 이야기할 때 나는,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말하는 거짓말과 말하지 못하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지리산닷컴에서 만나는 마을이야기가 가진 함정이다. 두 번째 거짓말 유형이다.
나는 마을의 문제점을 말하는 것에 인색하다.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오미동이나 상사마을을 아주 이상적인 마을로 오해하는 경우를 만난다.
당황스럽지는 않지만 난감하긴 하다. 누구나에게 그런 마을은 없다. 물론 내가 TV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는 낯선 땅의 속살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때로 그냥 미지로 남겨 두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기도 하다.
2010년 상사마을 사무장이 입성하기 전에,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나의 이야기는 사실, 시골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모습에 관한 경고문 같은 것이었다.
2007년에 쓴 글에서 나는 오미동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마을이 있다. 조선 제일의 명당자리라는 금환락지(金環落地) 마을인 그곳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里이고 마을 사람들은 오미동이라 부른다.“











전라남도의 ‘행복마을사업’의 외형적인 본질은 ‘한옥마을’이다. 유추하면 간단한 논리다.

농촌은 힘들다 → 농사는 시각용으로 유지하고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 →
한옥은 전통이고 도시민이 좋아할 것이다 → 한옥을 집단적으로 조성하면 →
마을 경관이 그럴 듯하고 → 민박을 받을 수 있다 → 그에 합당한 마을체험프로그램을 개발하면 →
농촌을 살릴 수 있을 거야 → WOW! ‘골칫거리가 된 우리 농어촌’ 문제 해결!

내용적인 본질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존 마을의 주민들 입장은?
무상 3천만 원과 장기융자 3천만 원을 지원해 준단다. 땅이야 있는 것이고 이번 기회에 번듯한 한옥이나
하나 지어볼까. 그래도 평당 400만 원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건축비용이 부담스럽지만 도시의 자식들과
합체하면 가능할 것이다. 어차피 내 죽고 나면 지들꺼 아닌가.
금전 지원의 조건은 ‘민박’이다. 그러나 일단 짓고 민박은 받지 않으면 된다. 공무원들도 그런 현실을 안다.
그런 현실을 아니까 전라남도에서 제시한 건축도면을 보면 도저히 민박형이 아니지 않은가. 그냥 주택이지.











사업의 시작은 컨설팅이다. 지방대학의 관련학과 교수님들은 요긴한 자원이다. 잠 자는 마을과 일 보는 마을인
상사마을과 오미마을이 모두 ‘녹색농촌체험마을’과 ‘행복마을’ 예산을 받은 구례군의 집중화 마을이니 관련한
‘전문가’들을 많이 실견했다. 관청 입장에서는 지방대학의 인력들을 가동하고 돈을 지불해 주는 것이 제 기능의
일부일 것이고 전문컨설팅 업체들을 활용해 주는 것이 지자체 내에서 서로 돕고 사는 방편이다. 시골에서 살면서
자주 들었던 정다운 표현, ‘관내업자’.
몇 번의 컨설팅 설명회를 본 적이 있는데 단언컨대 거의 똑같다. 주민들은 졸리는 눈으로 앉아 있고 떠드는 사람은
몇 회의 의무교육을 끝내고 200페이지 정도의 보고서를 제출하면 된다. 대략 이천만 원 전후의 컨설팅 비용을 지불한다.
서울과 시골의 차이점은, 서울에서는 TV에서 브로커를 보는데 시골에서는 코 앞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시골에서의 살이는 훨씬 원색적이다.
컨설팅에 따라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이 제작되고 돈이 지불되고 고만고만한 촌스러운 디자인의 사이트와
포장용품 기타 체험용품들이 속속 도착한다. 2억과 5억 정도의 예산은 그렇게 소요된다. 지역경제가 돌아가는
한 방편이다.











그리고 매뉴얼에 입각해서 마을에는 한옥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예산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관청에 ‘양식에 입각한’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골치 아픈 일이다.
지정댁도 기존의 엄니 집을 허물고 한옥을 짓기로 했다. 큰아드님이 강하게 주장했다.
경기도에서 치킨 집을 운영하고 있다.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님에게 집 짓는 일을 맡기기는 힘들다.
전화통이 불이 나고 간혹 나도 찾는다. 마을에서 일괄적으로 설계사무소를 정하고 그곳을 통해 도면과
서류를 대행시킨다. 이백만 원이다.
지금부터는 돈 나가는 일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업자를 선정해야 한다. 직영할 것인지 업자에게 맡길 것인지
가늠한다. 제 각각의 상황에 따라 집 짓는 방식은 결정된다. 점점 펄럭귀가 된다.
이 놈 말도 맞고 저 놈 말도 맞는 것 같다. 지나고 보면 어떤 놈의 말도 다 틀렸었지만.
한 업자가 여러 채를 맡는 경우가 많다. 경험과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다. 돈 앞에 장사 없다.
‘싸지만 일 잘한다’는 그 업자에게 일을 맡기기로 한다. 그런데 상량식 끝나고 공사는 진척이 없다.
지정댁은 집을 허물었고 창고에서 꼼짝없이 여름을 나야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측량을 해야 한다. 시골에서 측량을 한다는 것은 이웃과의 전쟁에 돌입한다는 서곡이다.
몰랐던 진실이 밝혀지면 최소한 이웃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평생의 동지에서 여생의 적으로
관계는 변질된다.
지정댁과 운암댁 사이에는 축담이 생겼고 저 38선은 여전히 분쟁의 씨앗이다.
행복마을로 가는 출입구는 그렇게 시작부터 소란스러웠다. 여러 채의 공사를 맡은 업자는 자금 회전이
여의치 않아 공정이 더디다. 여수에도 현장이 있고 담양에도 현장이 있다고 한다. 아니면 진작에 부도가 나서
도망갔다고도 한다. 그리고 시골 할머니들은 그 어떤 황색언론도 확인할 수단이 없다. 화가 머리 끝에 오를 즈음이면
기와를 들고 왔고 사람이 넘어갈 지경이 되면 벽체를 쌓았다. 업자와 건축주의 감정은 극단으로 치닫고 건축주는
업자에게 중도금을 줄 수 없다고 한다. 기와를 들고 온 사람은 건축주에게 자신에게 직접 돈을 달라고 하고
문짝을 들고 온 사람은 역시 자신에게 직접 돈을 달라고 한다. 지정댁은 300km 밖의 아들과의 통화가 늘어나고
‘컨테이너 삼촌’을 찾는 경우가 많아진다.











많은 집의 상량식을 촬영했다. 상량식이 끝나면 돼지머리와 떡이 돌았고 그런 날은 나의 점심 메뉴는 고정이었다.
모두들 축하했고 모두들 걱정했다. 어떤 업자는 절반 이상의 돈을 받고 사라졌고 어떤 사람은 집이 엉뚱하게
지어졌다고 불만이고 누군가는 최소한 얼마는 ‘돌라묵었다(횡령)’는 이야기들이 자자했다. 어떤 이는 집을 짓는
중에 세상을 떠났고 어떤 이는 부러운 눈으로 집을 짓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서른 가구 정도. 이제 마을은 한옥을
지은 사람과 한옥을 짓지 않은 사람으로 나눠지는 분위기다. 껍데기는 중요했다. 이전에는 고만고만해 보였는데
이제는 낡은 집과 새집이 존재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줍니다.’

내가 아는 한 절반 정도의 새집 주인들은 어떤 형식이건 부채가 생겼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모두들 그렇게
한다고 한다. 지정댁은 새로 집을 지으면서 창고를 잃었다. 허드레 공간으로 컨테이너 박스 재료로 지은 창고는
‘무허가’로 적발되어 다시 지을 수 없었다. 오미동에서 신축은 ‘무조건 한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지정댁은
새로 지은 한옥 마루에 쌀 가마니를 쌓아두고 있다.











마을은 단장을 시작한다. 산에서 소나무를 공수해 온다. 소나무 공원을 조성한다고 한다.
운조루 산에서 옮겨 온 것이다.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 형님을 칭송하는 작은 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옮겨 온 소나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제법 죽었다.
마을에는 포클레인과 크레인이 거의 상주하는 듯 했다. 이런 저런 마을의 변화가 있을 때면 촬영을 해달라고 했다.
초기에는 비교적 모두 응했지만 조금 지나서 나는 가능하면 도망가려고 했다. 내 마음 속에서 오미동은 점점
사라져 갔다. 솔직하게는 고통을 느꼈다. 이 마을은 어쩌면 내 스스로 인연의 마을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아닌가.











2007년 10월에 이곳에서 오미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곳의 옛 이름은 토지吐旨인데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오미리는 풍수고 뭐고 간에 일단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해자처럼 파여진 수로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매화로 시작해서 벚꽃, 산수유, 동백꽃, 진달래, 개나리, 복사꽃, 배꽃, 연산홍,
자운영, 유채꽃, 백일홍, 등의 꽃이 마을 전체에서 단 하루도 끊이지 않는 곳이다.
매실과 산수유, 앵두, 살구, 감, 석류 등의 유실수가 집집마다 풍성하고
이른 봄 청 보리로 시작한 푸른 바람은 늦은 봄이면 보리와 밀로 황금빛 바람으로 변하고
가을 아침이면 누런 벼가 짙은 안개 속에서 익어가고 겨울이면 설경이 그림엽서 같은
대竹밭 사이 집들이 흔한 마을이다.>











마을은 빠르게 변해갔다. 삼백 년을 바라보는 마을의 시간과 비교해도 지난 3년간 겪은 변화가 가장
극심할 것이다. 여순과 한국전쟁을 관통하면서 마을이 겪은 이념과 생명을 바꾼 부역의 시간 정도가 비교할 수
있는 격변일 것이다. 돈은 이념의 총구보다 치명적이었다.
야산이었던 곳에 새로운 택지가 생겼다. 열하나인지 열두 개인지의 새로운 집이 생겨났다. 관광버스를 타고
‘선진지 견학’을 온 시골 노인들은 부러워했고 승용차를 타고 온 도시사람들은 ‘이상한 한옥’이라고도 했다.
나는 ‘집이 아니라 법당이다’라고 표현했다. 세 칸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수는 모두 안드로메다로 이민을 간 모양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럴듯한 이 마을은 나에겐 이미 오미동이 아니다. 그것은 맥락 없고 뜬금없는 새마을일 뿐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나아지겠지. 지금은 그냥 세트장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마을은 2년 만에 만들 수 있는
‘과업’이 아니다. 내 마음 속엔 여전히 오미동은 서른 가구다.











마을은 점점 바빠진다. 이제 농사 이외에 다른 뭔가에 집중해야 한다.
농사는 지랄맞다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날 사진을 찍으면서 씁쓸했다. 이념으로 인해 자신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마을이 미사일 만드는 회사와 자매의 연을 맺는다.
그것은 마을의 자존심을 발로 차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마을에는 이미 그런 것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한학은 신식교육을 뛰어 넘지도 못했고 스스로 진화하지도 못했다. 세상은 새로운 기준의 지식이 주도하고
지식은 서열화 되고 시골은 그 서열의 끝이었다. 지식과 지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늙어버렸고
늙음은 젊음에 종속된다. 미사일은 농사보다 힘이 세다.











순전히 ‘수용’하기 위한 용도와 설계의 건물이 지어진다. 물론 예산으로. 소문 난 예산의 대부분은 이렇게
소비해야 정산하기 편하다. 내가 본 ‘멍청한 집 TOP10’에 들어가는 집이다. 시골에서 더 이상 제대로 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생산은 불가능하다. 쓸 만한 인력은 모두 서울로 갔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한옥 건축의
대표적인 문화재 운조루를 품고 있지만 운조루를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한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골의 현실이라고 한다. 기준을, 눈높이를 조정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데없는 ‘은하수’가 붙은 체험관 간판이 붙고,











이른바 마을체험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같은 사업을 진행하는 전라남도의 마을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
‘농촌의 변화’를 주제로 한 강연 한 자락 정도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마을들은 건물 짓는 것으로 ‘행복마을’ 사업을 실질적으로 마감한다.
원래 자발성은 없었던 일이라.











사회적기업社會的企業Social Enterprise.
뭘 팔기 위해서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서 무엇을 팔아야 한다.
오미동은 사회적기업을 만들었다. 5~6 사람의 마을주민들이 고용되었다.
당연히 임금은 공적자금으로 지원된다. 그러나 영원히 지원하지는 않는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업이라지만 매출을 올려야 다음 해 지원을 보장받는다.
무엇을 해서 매출을 올릴까.
민박 수입과 밥을 팔아야 한다. 단체 견학이나 행사를 유치해서 방을 채우고 식당을 채운다.
생각보다 빡세다. 아주머니들은 점점 지쳐간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을의 말복이 사라졌다. 할머니들은 당연히
‘체험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말복 밥상을 차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체험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지쳐 죽겠는데 체험객도 아닌, 마을 일 밥상까지’ 차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중앙식당에서 60인 분의 밥을 시킨다. 새로운 모습이다.
이제 대가 없이 마을 일을 진행하는 것은 힘들다. ‘사회적기업’에서 ‘월급’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한 밥상을 자발적으로 차릴 수 없는 마을은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산사업의 마무리로 공적비 성격의 간판이 하나 더 세워지고 그렇게 대략 또 하나의 ‘행복마을’은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을은 전국의 ‘이런 마을들 경연대회’에 나가서 수상하고 3천만 원의 상금을 타왔다. 대한민국의 다른
농촌마을들은 ‘저 마을을 보라!’ 라는 인증서다.











이제 당분간 이 분들이 함께 품앗이를 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을은 지난 3주일 동안 싸웠다.
“이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싸움인가요?” 라는 것이 나의 질문이었다.
독선과 무관심, 오만과 편견은 단 한 번의 폭발로 마을의 현재를 낱낱이 까발렸고 물러나라는 서명용지와
무효라는 서명용지에 모두 서명한 할머니들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상처에 예민하다.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휘둘렸다고 생각한다.
우습게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막장으로 치닫는다. 면사무소에서의 행정적인 서류 처리는 끝이 났지만
마을 일은 ‘처리’할 성격의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가 오미동에 최초의 여자 이장이 탄생하게 된 허구의 이야기다.











2007년 9월 사진이다. 지리산닷컴 사무실 앞의 대추나무 열매를 따고 있었다.
맨 앞의 백발 할머니는 금년 봄에 돌아가셨다. 누군가에게는 화해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물론 원칙 없는 화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시골 정서로 몰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그 해법은 지나간 3년을 되돌아보는 것에 있을 것이다.  











2007년 5월 23일에 오미동으로 들어왔다. 개인사적으로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남긴 글이 있다.

<사무실 내 자리 인터넷용과 작업용 PC와 mac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다.
대학시절부터 이 마을은 내가 무수히 들락거린 마을이고 이곳에 내려 온 1년 동안
이곳을 백번은 아니더라도 수십번은 지나친 들판이고 대숲이다.
하지만 이렇게 오미리 정 중앙, 헨젤과 그레텔의 집에 앉아 바라보는 오미리 모습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어제 셋팅을 끝내고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형에게 말했다.
"오미리 들판에 내 mac을 셋팅하고 대숲을 바라보는 이 현실은 나에게는 하나의 아이러니다."
세상의 어떤 디자이너가 이런 창을 가질 수 있을까.
말하지 않았지만 형에게 하고 싶었던 나의 다음 말은 이것이었다.
"헨젤, 정말 고마워.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줘서."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길 위에 빵부스러기를 뿌려두지 않았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선산과 본적지가 있지만 기억이 존재하는 마음속의 고향은 없었다.
구례는, 오미동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 ‘나의 살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그곳이 내 마음 속에서 점점 흐릿해지려고 한다.

이런 글 오미동 사람들에게 아프다.
그래도 묻는다.

“행복하십니까”









4d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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