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끝자락 살구꽃이 유난하더니 열매도 많다.











밤사이 비 온 날 아침, 출근해서 주차하려니 차를 더 집어넣을 수 없다.
도시와 다른 주차전쟁이다. 그렇게 한 시간에 2kg 정도는 떨어진다.
따서 먹는 것이 아니란다. 떨어진 놈이 익은 놈이고 가지 붙들고 있는 놈들은 시큼하다.
떨어지는 놈을 바로 맞으면 약간 아프다. 제 딴에 낙하하기 전에 티를 낸다.
사실은 그 아래에서 담배 피다가 살구에 맞는 내 탓이 9할이지만.
열매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씨를 퍼뜨리기 위한 것이 본래 목적이지만
콘크리트 바닥에서는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이 그것을 줍는다.
나무가 주신 것이고 내 안으로 나무를 모시는 것이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은 원래는 마을 엄니들의 회관이었다.
몇 년 동안 회관을 나설 때에 엄니들은 한 주먹씩의 살구를 집어 가셨다.
그냥 몇 입 먹을 정도. 열매의 후반기가 되면 작대기를 넣고 흔들었다.
또 그것을 조금씩 나누어 가셨다. 이 나무는 대략 100kg 훨씬 이상의 열매를 맺는 듯하다.
농장 매실나무로 보자면 3~4그루에 값한다. 등기상으로 보자면 이 나무의 주인은
운조루 엄니가 될 것이고 역사와 정서로 보자면 마을 엄니들 공동 소유가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딱히 정해진 주인은 없다. 살구는 매실보다 더 빨리 물러지고 택배로
어디로 보낼 물건도 되지 못한다. 바로 처리해서 잼이나 효소나 술이나 과육을 취하는 것이다.











월인정원은 잼도 많이 만들었으니 계속 떨어지는 살구를 주변의 친구들과 이리저리 나누다가
살구식초를 담자고 장독을 마련한다. 그리고 일부는 과육 상태로 병조림으로 만들고 있다.
밀가리 축제 때에 재미 삼아 판매를 할 생각인 모양이다.
며칠 전에 무얼까?가 팩토리 앞으로 지나가시던 금내리 엄니와 소리를 나누었다.
왜 논두렁에 녹두를 심지 않는가에 대한 강론이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엄니는
앞주머니에서 녹두 종자를 건내 주시려 했다고 한다. 종자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것은 평생 도시에 살면서 이런저런 신용카드를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과 같은 가치다.
내 것 아닌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로 잼을 만들고 조림을 만들어 판매까지 생각한다.
살구나무는 이를테면 VIP카드인 것이다.











2007년 5월에 이곳 오미동에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 지금의 지정댁 집 앞에는
살구나무가 있었고 6월에 골목을 따라 열매가 굴러 내려왔었다.
평생 도시에서 살았던 나에게 그런 광경은 TV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경이로운 경험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만 7년을 넘어섰다. 그리고 나도 이제 계절이 되면 마을 어디에 어떤 유실수가
있는지를 기억하고 그 나무 밑으로 걸어간다. 금년에는 지정댁 앵두를 따지 않았다.
나는 참으로 풍족한 환경과 조건에서 살고 있다. 당연하다는 생각도 가능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곱씹어보면 고소한 맛이 난다.











월인정원이 주로 사용하고 나는 곁방살이 하고 있는 이 공간에 에어컨을 넣었다.
빵 수업을 하는 곳이니 오븐은 돌아갈 것이고 여름에는 북한인민이나 이라크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실내에서 1시간 버티기 힘들 것이다.
2008년 여름 초입에 하던 고민 같은 것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주저 없이 에어컨을 구하고 여름 동안 수십만 원의 전기세를 지출할 생각을 쉽게 해버린다.
언젠가부터 겨울을 너무 춥게 지내는 방식도 집어치워 버렸다. 시골은 도시가스가 없고
기름 값은 도시가스 비용의 3배 정도 지출이지만 궁상스럽고 구차스럽게 살고 싶지 않아
화석연료에 기꺼이 돈을 지불해 버린다.
나에게 지구 생태와 소비에 관한 심각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2008년 그 여름, 집구석에 박 과장의 중고 벽걸이 에어컨이 걸리면서부터일 것이다.
이를테면 에어컨으로 인해 버티고 버티던 윤리적, 심리적 소비전선이 붕괴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원치 않는 과부에게 몸을 빼앗긴 도리언 그레이의 어느 밤 같은 허탈함이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나는 너무 가진 것이 많다.
진심으로 지금의 내가 소유한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한다.
그래서 나의 미래가 불안스럽다. 모순이라도 어쩔 수 없다.
두 달 이상 돈벌이 일을 하지 않았다.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소소한 글 수입 정도가 있었다. 최근에 지리산닷컴에 긴 글이 자주 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펀드나 지리산닷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짧게는 지난 한 달, 길게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좋았다.
내가 구례로 거처를 옮긴 지난 7년 동안 중에서 일의 가닥이 가장 단순한 시간들이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상황이 생소하여 적응하지 못하다가 곧이어 적응을 했다.
발단은 몇 가지 돈 되는 일을 거절했고 밀려 있던 돈 되는 일들은 기다리다 지쳐서 떠났다.
일들이 내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한 달 정도 걸렸다. 지난 20년 정도의 시간 동안
그런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확신했을 때 기뻤다. 그리고 나의 미래는 불안스러웠다.
그런데 이 상태가 좋다. 편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나를 위한 시간이 가능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던 상황이다. 사진 찍고 글 쓰고 사람 만나고 놀고 먹고 가끔 밭일 하고.
양파가 밭에서 나왔고 정수가 쌀 팔아줬다고 쌀을 던져 놓고 갔고 살구가 발 앞으로 떨어졌다.
여름을 위해 세 벌의 티셔츠를 시켰고 운동화도 새로 샀다. 몇 년 만에 양말과 빤스도 바꿨다.
무엇보다 별 다른 노력 없이 마을회관을 거저 얻었고 잠자는 집은 3년 만에 월세가 3만 원밖에
오르지 않아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내 집은 아니지만 내 집처럼 두 개의 집을 사용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따위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내 팔뚝에 눈에 보이지 않는 완장을 씌웠고 나는 가급이면 손사래를 치는 척 하며 그 완장을
얼른 받아서 서랍 안에 모셔두고 혼자 보고 웃곤 한다.

오지 않은 ‘내일’ 이라는 아편에 기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일이 오늘을 강제하는 삶이 싫었다. 그것은 저축하지 않는 나름의 이유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51년째 살고 있고 그 중 30년 정도는 결정의 대부분은 주체가 나였다.
타인이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항상 날을 세웠다.
내 삶이 나에게 증명하는 것은 ‘남은 내일’보다 이미 ‘지나간 어제’가 많다는 것이고
내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나의 ‘일만구백오십 번 정도의 오늘’은 순간순간 풍족했다는 것이다.
오늘을 두고 내일과 협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내일에 빚진 일은 없다.
그래서 나의 미래는 사실 언제나 불안스러웠다. 습관은 고치기 힘들다.











사무실을 바라본다. 역시 내가 소유한 것은 많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 책 초판 인쇄가 나오면 8년 만에 작업 컴퓨터를 바꿀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apple의 마지막 CRT모니터라는 이유로 15인치를 부여잡고 사진을 보정하고 디자인을 하는 일이
사실 불편하긴 했다. 이제 간혹 키보드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계를 바꾸지 않은 것은
일상의 의식주가 우선인 탓도 있지만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꿔야 한다는 욕구가 희박했던 것이다. 그런 욕심은 없다. 좋은 컴퓨터, 좋은 카메라 같은 것.
오히려 쉽게 기계를 취하고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비윤리적인 소비라는 생각만 든다.
자원과 연료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다.
다시, 에어컨 앞에서 갈등했던 어느 해 여름처럼 나를 위한 소비를 눈앞에 두고 갈등하고 있다.
정말 필요한 소비인가?
내일에게 물어 볼 필요는 없다. 오늘의 나에게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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