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이장 두 번째 책 광곱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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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을 할 수 없었다. 전화기 너머 상대방 또한 나의 상태를 짐작하는 듯
다음 반응까지 같은 침묵으로 기다려주었다.
2012년 7월 29일 일요일 오후, 송석헌 방문과 권헌조 어르신의 연보 작업 부탁을 위해서
권동재 선생님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오전과 오후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2010년 12월 17일 발인하는 그날 이후로 뵙지도 않았고 전화로 안부도 여쭙지 않았다.
봉화에 계신지 서울에 계신지, 송석헌 보수 공사는 끝이 났는지 여전히 공사 중인지,
도대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몇 단계 검색을 거쳐 송석헌 유선전화 번호를 알아내고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받지 않는다면 봉화에 계시지 않은 것이고 계속 통화를 시도하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긴 신호음 끝에 “여보세요.”라는 반응을 만날 수 있었다.
뜻밖에도 여자 분이었다.

“아, 송석헌이죠”
“네.”
“저는 음…… 2년 전에 KBS에서 송석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사진을 찍었던 사람인데요.
권동재 선생님이 혹시 계실까요”
“아……. 금년 3월에 별세하셨습니다.”











머릿속에서 ‘삐’ 하는 파열음이 지나갔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책의 마무리 작업 때문에 최근에는 하루 한 번은 송석헌 관련 사진들을 만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세’라는 낱말은 적어도 나에겐 비현실이었다. 권동재 선생님 관련한 사진을 보거나 만질 때에는
촬영 당시의 실랑이가 생각나서 혼자 빙긋 웃기도 했다. 권동재 선생은 촬영을 원치 않았다.
방송 팀의 앞 선 노력(또는 갈등)이 있었지만 나는 ‘같은 집안 손자’라는 가느다란 혈연을 주장하며
떼쓰듯이 몇 가지 설정을 요구했고 권동재 선생님은 마지못해 응해주셨다.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었겠지만 ‘할아버지!’라며 달라붙는 귀찮은 놈을 강하게 뿌리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없단다.
통화는 권동재 선생의 동생 분과 이어졌고 조만간 방문하겠다는 말씀을 나누고 끝이 났다.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연일 35~36도를 유지하고 있는 태양은 강렬했다.
머리는 뜨거웠고 담배를 문 입술로 텁텁한 열기가 전해졌다. 사무실 앞 돌배나무 주변을 서성거렸다.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 통화 한 번 시도하지 않은 나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나조차 짐작하기 힘들지만 ‘송석헌과 권헌조’라는 주제로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자발적 부채를 가슴에 품은 채 열아홉 달을 흘려보냈다.
권헌조 어르신의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온 그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단지 세 번 만난 북부 경북의 한 노인과 집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바로 ‘기억’이라는 과거형으로
저장하기에는 내 마음의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 그것은 분명히 분노를 품은 아쉬움이었다.
나는 약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권헌조 어르신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은 지켜야 할 마지막 가치 중 하나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가치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다. 따라서 나의 이런 개인적인 감정 또한 주관에 탕을 두고 있다.
평소 “주관이 없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는가” 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나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다’는 말을 혹 듣는다.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세상은 다수의 주관이 객관으로 행세하는 곳이다. 수數의 논리는 경제적 합리성과 곧잘 이어졌고
이것은 효율과 사촌지간이었다. 이렇게 이어진 줄기들이 넝쿨처럼 지난 00년 동안 인간계라는
좁은 세상을 점령했다. 사람들은 제도 교육이 종하고 미디어가 계속 물과 비료를 공급한 ‘나의 생각’이
가급이면 다수의 범주 밖으로 벗어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같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지나가는 행인1 역할을 거부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 영화의 주연이나 조연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란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모두 같다.
이른바 개성과 다양성이 쳐난다는 세상에서 사실은 거의 동일한 생각과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권헌조의 생각’은 곧 소수자의 삶이었다.
그는 세상을 향해 주장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살았을 뿐이다.
그 외의 방법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낡음’은 세상의 어떤 ‘새로움’보다 명징했다.
세상이 주목하는 삶은 대개 엄청나게 성공한 삶과 지극히 비극적인 삶, 두 종류다.
권헌조의 삶은 지극히 조용했기에 세상이 그에게 관심을 둘 이유는 없었다.
부모님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매일 조석곡朝夕哭을 하고 이후로도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걸음이 가능한 순간까지 아침저녁으로 산소를 성묘한 그의 삶은 기행으로 여겨졌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일상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주관이나 객관이라는
용어가 품은 의미보다 ‘사실’이라는 개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강단 유학자도 아니었고 ‘옛 생각’을 지켜야 한다고 설파하고 돌아다닌 전도사도 아니었다.
권헌조는 단지 ‘그런 삶’을 살았을 뿐이다. 이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말씀이 아닌 행동이다. 이제 권헌조와 같은 행동으로 일상을 빼곡하게 매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사라짐은 세상에서 유일했던 절대 소수 가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이별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것에 화가 났을 것이다.
책 작업이 현실화되면 권동재 선생에게 전화를 드릴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물을 가지고 찾아뵙고 싶었다. 물론 권동재 선생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2년 전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문제였다. 권헌조 어르신 또한 자신보다
장남의 건강을 더 염려하셨다. 두 분 모두 계속 담배를 피우시면서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셨다.
그러나 건강이란 것은 호전될 수도 있는 것이고 무엇보다 송석헌 보수 공사 기간 동안 봉화에
머물 것이란 말씀에 갑작스러운 상황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책 작업의 현실화란 다름 아닌 제작비 문제였다. 최초에는 내가 운영하는 사이트 지리산닷컴에서
‘책값 미리 내기’ 라는 형식을 빌린 모금을 생각했었다. 사진 중심의 포토 에세이 책을 제작하는 비용은
만만한 액수가 아니다. 1000명으로부터 2만 원의 책값을 미리 받을 수 있다면 제작과 발송, 조촐한
행사까지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애당초 출판사를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책 문제로 연관된 편집자와 출판사가 몇 있었고 알고 지내는 몇몇 출판사 대표님들도 있었지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가 생각한 방식은 사이트를 통해서 ‘이미 권헌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책 작업에 동참하는 방식이었다.
권헌조와의 이별은 필연적이지만 이런 행위를 통해서 그에 대한 기억을 잠시 붙들어 두는 것이고
마지막 가치의 퇴장 시간을 잠시 지연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기록이라도 남겨두는 것.
2011년에 이 작업을 하지 못했다. 어르신 1주기 전에 작업을 완료하고 싶었지만 세상사 변명의 9할을
차지하는 말대로 ‘바빠서’ 그리되었다. 그것은 참 편리한 변명이다. 정확하게는 작업의 우선순위 안에
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밥벌이가 1순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났으면 어쩌면
내 마음의 부채감이나 의무감은 옅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높아졌다. 결국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다른 책 문제로 통화와 메일을 주고받던 이 책의 편집자에게 내 마음 속의 부채를 내비추었다.
이미 몇 권의 책에 대한 원고 인도 시기를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쉽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이왕 하는 부탁이라 뻔뻔하게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송석헌과 권헌조 이야기’는 부끄럽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의 장례식 부분에 언급된, “이틀 전 서울에서 만난 어느 편집자”였다.
“인문서를 왜 만들어요”라는 것이 초면의 그에게 던진 질문이었으니 이것도 작은 아이러니이긴 하다.
하루 지나지 않아 “진행합시다”라는 간명한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 내 앞에는
‘반비’가 ‘을’로 기재된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새로운 부채가 생겼다.
완전하게 출간이 결정되고 권동재 선생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그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잠시 아득하거나 막막했다. 다시 송석헌행은 필연적이었다.

“어디로 모셨습니까”
“아버님 뒤편으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전화 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문상이다.
2012년 8월 9일 목요일 아침에 다시 그놈의 팔팔고속도로에 다시 차를 올렸다.
언제나처럼 풍기의 서부냉면을 먼저 들러 약간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여름이라 역시 냉면 집엔 손님이 많았다. 이전과 맛이 좀 달랐다.
무채 김치는 맛이 깊지 않았고 국물은 조금 싱거웠다. 면은 평소보다 조금 더 퍼졌다.
점심시간 끝 무렵이다. 나는 채소의 시절과 식당의 바쁜 시간대가 만들어낸
‘오늘의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집사람은 실망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늘의 상황이건 근본적 변화이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생강 도넛 한 팩을 담아서 봉화로 이동했다.











영주 지나서 봉화로 접어들 무렵부터 지천으로 늘어선 사과나무에는 풋사과가 매달려
있었다. 북부 경북의 포괄적 인상은 오래되고 낡은 풍광의 반복인데 사과는 풋풋하다.
그것이 조화롭다는 생각을 했다. 기후가 변하기에 이 지역에서 사과 경작은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한다.
포도 농장으로 변화 중인 사과밭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그렇다.
변화는 필연이고 필연 앞에 때로 사람은 무기력하다.
봉화읍에 당도해서 확인 전화를 드렸다. 막내 아드님이 계셨다. 읍내 푸줏간에서 구워 먹을 안심을 조금 샀다.
과일을 생각했지만 과일이 흔한 지역이라 차라리 고기를 선택했다. 고기는 선홍색이었고 좋아 보였다.
선물 꾸러미도 아닌 검정 비닐에 고기를 담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생전에 권헌조 어르신은 봉화 장을 다녀오면 부모님께 무엇을 얼마에 구입했고 오늘 장은 어떠했는지
소상하게 말씀드렸다고 한다. 봉화읍에서 송석헌이 있는 선돌마을은 그렇게 멀지 않다.
도보로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차로는 불과 5분이 걸리지 않는 그 길을 따라 ‘그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멀어지고 싶었다. 곧 변화한 송석헌과 만나야 하는데, 이제 그 집에는 그 사람이 없는데
그 상황을 대면하는 것이 힘들었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석축은 가지런했다.
외관의 나무는 고재를 그대로 사용해서 상상했던 것보다 나빠지지 않았다. 마당의 잡초는 모두 제거되었다.
서편으로 초가가 한 채 들어섰고 살림 공간도 정비되었다. 무엇보다 안채의 변화가 컸다.
사실은 변화라기보다 정리에 가까울 것이다. 방송에서도 안채는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2년 전 안채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300년 된 쓰레기통과 같은 몰골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당시 특이했던 것은 ㅁ자의 안채 마루 사방을 둘러 권동재 선생의 빈 담배갑이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책을 쌓듯, 그릇을 쌓듯 그렇게 성곽으로 쌓아놓은 담배갑을 보면서
‘왜’라는 의문을 품었었고 나름의 답을 내려보기도 했었다. 안주인이 없는 안채는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번 방문에서 ‘그 모든 과거’는 정리되었다. 마치 ‘이제 살림을 시작하면 된다’는 단아한 시그널로 보였다.
낯설었다. 그 정리 정돈과 약간 어색한 낡음은 이를테면 촬영을 위한 세트장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마당에 권헌조 어르신의 빈소는 여전하기에 우선 빈소로 들어서서 인사를 드렸다.
2년 전 초상을 치루었던 당시의 물건과 그 모습 그대로 어르신은 나를 맞이하셨다.
행랑채에는 파록爬錄을 진설하여 두었고 여전히 이 집이 상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건너채에서 살림을 이어가고 있는 막내 아드님과 마주했다. 인사를 올렸다. 나의 혈연 지도는 여전히
안동 권, 복야공파 37대이니 막내 아드님은 나의 할아버님 뻘이라는 사실도 변치 않았다.
권동재 선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입이 대꾸한 몇 마디는 같았는데
“알고 있습니다.”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이해하겠는가.
상중이라 당분간 송석헌은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보수 공사도 불과 며칠 전에 준공 검사가 끝났다고 했다. 2년이 걸린 것이다.
이제 사람이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일만 남았다.

“계속 봉화에 계실 겁니까”
“그래야지요.”
“원래 도시에서 사시지 않았습니까”
“지켜야 할 것이 있어서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안 산소와 집을 둘러보고 나가는 길에 어르신과 권동재 선생의 산소를 성묘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님 뒤켠 오른편으로 쳐다보면”이라고 설명 해주셨다.
다음을 기약했지만 나는 “이제 안 올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잠시 웃음이 흘렀다.
다시 카메라를 챙겼다. 집 위의 산소부터 둘러볼 일이다. 어르신의 발자국이 만들어낸 그 흔적은
지금 어찌되어 있을까. 가파른 계단을 지나 산소로 드나드는 문은 잠겨 있었다.
고리를 풀고 힘껏 밀쳤다. 힘들게 문을 열었지만 가슴까지 올라온 풀이 앞길을 막았다.
풀을 헤치고 조금 힘들게 앞으로 나갔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긴팔을 준비하지 않았다.
팔뚝으로 날카로운 풀잎과 가시가 스쳤다. 그러나 올라서야 했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길은 열렸다.
그리고 그 가지런하고 정갈한 언덕길이 나타났다. 여전히 누군가 이 길을 손보고 있는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북부 경북의 더위는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산소가 있는 언덕에 도착했다.











7월 말경에 벌초를 한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은 지금 밀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언덕 모서리로 개망초가 키를 다투고 있었고 권헌조 어르신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부재의 증명이 슬프다는 사실 또한 숨길 수 없었다.
이제는 없음을 확인하는 일. 이번 여행의 임무와 역할이기도 하다.
송석헌을 나서서 산소로 방향을 잡았다.











2010년 12월의 그 칼바람과 눈보라의 길은 주변으로 벼와 나무와 풀들로 무성하게 변해서
전혀 다른 길처럼 보였다. 얼핏 길을 찾기 힘들었지만 눈대중으로 상여가 지나갔던 그 길을 더듬어 나갔다.
당시의 사진이 있었기에 길의 표정만 바라보고 올라갔다. 여기쯤에서 상여 행렬의 뒷모습을 찍었었지,
여기 이 논이 그때 노제를 지내고 문상객들을 맞이했던 모닥불을 피웠던 그 논이겠지,
여기에 상여를 벗고 관만 들고 이 언덕을 올랐었지…….











열아홉 달 만에 다시 어르신을 뵙는다.
풀이 자랐고 누군가 꽃바구니를 남겨 두었다.
손녀들일까. 인사를 드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어르신 뒤편으로 파릇한 띠 잔디가 어색한 산소가 보였다.
권동재 선생의 자리일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 뒤를 그렇게 시립侍立하고 있었다.
그를 태우고 영주 길을 달리던 차 속에서 촬영을 하던 순간이 잠시 떠올랐다.
파인더로 그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그의 빈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스스로 예감했을 것이다.
짧게 머물렀다. 그 상황 속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속으로, 한 적 없는 약속이지만 책을 들고 다시 찾아뵙겠다는 혼자 말씀을 드렸다.











풀밭 언덕길을 헤치고 내려와서 음료수로 들고 온 물로 팔과 목덜미의 검불과 땀을 씻어 내었다.
일말의 후련함이 있었다. 두어 시간 후면 하루가 저물 것이다. 밤을 달려 구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봉화읍에서 하루를 머물 것인지 부석사 쪽으로 올라갈 것인지 정하지 못했다.
봉화읍에서 머문다면 천변의 여관들이 유력할 것이다. 그것은 내키지 않았다.
부석사 방면은 휴가 시즌의 막바지라 예약도 하지 않은 숙소를 보장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비게이션을 안동으로 입력했다. 선돌마을 입구에서 30분이 걸리지 않는다. 안동은 나의 본관本貫이다.
몇 번 스치기만 했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안동 시내를 거닐어본 적이 없다. 본관은 조선조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신분제의 잔제로, 흔적으로, 출신에 대한 은유적 우월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 안동에서 하루 머물자.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갑오경장 때 돈과 양반첩을
바꾼 것이 아니라면 안동에서 하룻밤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어차피 지금을 살고 있다. 온전한 나로서 세상을 살아내는 것.
권헌조 어르신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그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에 대해, ‘세상에 필요한 책 또는 기록’의 출간을 결정해준 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11월 24일에 책은 내 손에 들어왔다.
토요일이라 읍내로 나가서 택배사에서 박스를 찾았다.
나의 첫 책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도 단행본으로서 볼륨이
그렇게 얇지는 않은 편이었는데 이 책은 더 두껍다.
사진집 성격을 바탕으로 하는 에세이라 내지도 100g이 아닌 120g이다.
또한 책의 사이즈도 일반 단행본 보다 크다.
표지도 하드커버를 채택했기에 양장일 수밖에 없고 전체적으로 책이 무겁다.
누운 자세에서 양팔을 들고 책을 본다면 인대에 손상이 갈 수도 있다.











표지를 넘기면 업계에서 일명 세네카라고 부르는 책등이 이렇게 같이 열린다.
이 장면에서 제작비가 제법 올라가게 된다. -,.- 물론 내가 요구한 것은 아니다.
필자로서 나는 소스만 제공하고 책의 모양새에 대해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나의 직업이 디자이너인 관계로 이런 지점에서 시시콜콜 관여하면 정말 밥맛이 되는 것이다.
PDF 파일을 보내왔을 때 첫 느낌은 ‘디자이너가 제법 고생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작업은 편집자와 디자이너 입장에서 재미있을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앞의 에필로그에서도 밝혔지만 나의 개인적인 마음의 부채를 떨쳐내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
예상보다 호사스러운 책의 모양새가 부담스러웠지만 한 사람의 필자로서 한 권 정도는
가지고 싶었던 형식이라 표정 관리를 했다.

“이거 가격을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만들어요?”











책 가격이… -,.- 25,000원이다.
지금 지리산닷컴에서 판매하고 있는 햅쌀 5kg보다 더 비싸다.
이 책이 과연 햅쌀보다 더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원인제공자로서 송구스럽다.
몇 차례 교정 인쇄를 통해 내지를 결정했고 그래서 며칠 제작이 지연되었다.
여러 가지 종이를 두고 고민한 것은 책 가격 때문이었다. 거의 3만 원에 육박할 뻔했다.
그러나 나는 무겁고 크고 여백 많고 사진 많고 글이 적지만 비쌀 수밖에 없는
제작방식을 채택한 이 책을 뻔뻔하게 팔아야한다.

“초판 몇 부? 이천?”
“샘, 제작 단가 때문에 그것보다 더 찍을 수밖에 없어요.”
“이런 젠장.”











음…
쌀과 김치를 팔고 있는 이 시국에,
그 직전에 감과 고구마를 팔았던 전력에,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지출이 많은 12월에,
그것도 더 잘 팔리지 않는 포토에세이를,
「맨땅에 펀드 2013」을 판매하기 직전에……

스스로 최면을 걸 수밖에.

“쌀과 김치는 품절이오니 연말 선물은 이장의 두 번째 책 『아버지의 집』으로!”


『아버지의 집』-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권산 글·사진
민음 출판그룹 인문·교양 임프린트「반비」
25,000원

차 례
프롤로그 /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 9
첫 번째 방문 / 노인과 집은 하나였다 - 오래된 집, 오래된 습관과의 만남 - 15
두 번째 방문 / 아름다운 뼈 - 집 수리와 몸 수리 - 165
세 번째 방문 / 못난 나무가 마을을 지킨다 - 권헌조 옹 가시는 길에 - 221
에필로그 / 낡음과 새로움 - 315
권헌조 연보 -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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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서를 왜 만들어요”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편집자는 대답을 했었다.
“음……. 뭐랄까요. 출판계에 아직은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명 같은 것? 하하하, 죄송합니다.”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좀 오그라드는 경향이 있어 책에서 감사를 표하지 못했다.

여름부터 수고하신 편집자 K, 디자이너 H 님의 노고에 머리 숙입니다.
저라면 이 인사말을 제일 좋아할 것 같은데, ‘책 잘 만들었어요!’
그 이전에 이 책은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집」오정요 작가님의 기획안에
제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초 발화점이지요.
간만에 전화 드리니 여전히 몽고라고 주장하셔서 제가 국제전화를 하고 있다는
각성을 주신 '낡은PD‘님은 직접 몽고로 와서 책을 전해 달라 하시니 김장 끝나고
고민해 보겠습니다. 여전히 정말 강적이시구요.

무엇보다
공사 이전의 송석헌과
권헌조 어르신,
권동재 선생님에게
이 책은 헌정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뱀발>
살펴보니 아무래도 김장 미션이 끝나고 배송까지 완료하고
12월 8일(토) ~ 9일(일), 송석헌을 방문하는 조촐한 모임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원래는 책 들고 어르신 성묘를 혼자 할 생각이었는데 혹시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봉화에서 같이 만나서 걸음을 함께 했으면 합니다. 1박 2일이지요.
평일로 일정을 잡았으면 했는데 너무 가능성을 차단하는 듯 해서 주말로.
송석헌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안동 봉정사 영산암에서 헤어지는 정도.
마침 12월 13일이 어르신의 기일이지요. 그 날은 피해야겠고.
같이 성묘를 겸한 짧은 겨울 여행 원하시는 분들은 메일로 의사를 주세요.
4dr@naver.com

 

 

 


 

 

 

jirisan@jirisan.com

 

 

 

 

공지 지리산닷컴 사진사용에 관해 마을이장 2013.05.24 20424
238 생각 / 몇 가지 변명 또는 갱년기 [23] file 마을이장 2015.06.16 1837
237 생각 / 두 개의 한 그루 나무 [53] file 마을이장 2015.03.30 4232
236 마을 / 간만에 오미동 [45] file 마을이장 2015.03.25 3135
235 생각 / 귀농귀촌? [38] file 마을이장 2015.02.16 7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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