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연곡분교 5월 어느 날

마을이장 2012.05.24 01:42 조회 수 : 7333

 

 

 





2012년 5월 23일 연곡분교.
5월은 행사가 많은 시기다. 구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3월 중순부터 바빠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다. 4월은 꽃 시즌의 끝 무렵이라 집집마다 손님도 많고 행사도 많다.
가장 오래된 행사인 곡우제(남악제라고 부른다)가 열리고 군민체육대회가 있고 면 단위 체육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구례에서 방구 좀 뀐다는 젊은 사람들은 이 시기에 ‘봉투가 솔찮게 나간다는’ 실감을 한다.
그리고 5월이다. ‘가정의 달’이라는 수식어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봉투가 나간다. 나는?
환장할 것 같은 5월이었다. 신록이 절정인 며칠이 지나도록 변변한 사진 한 번 찍지 못했다.
기록해야 할 이런저런 일들을 쫓아다니는 것만으로 벅차다. 그 기록 중 중요한 미션 하나가 바로 연곡분교다.
이곳을 보고 있는 분들은 알 수 있는 정신없는 나날들 속에서 어린이날과 스승의 날을 담아야 하는 일종의
과제를 망각했다. 운동회 풍경 몇 컷 담은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물론 토지본교에서의 운동회였던 터라
그렇게 열심히 기록하지는 않았다. 분교에서 여섯 아이들만으로 무슨 운동회가 가능하겠는가.











5월 13일에 SBS 촬영팀이 내려온다는 것을 들었다. 아이들이 스승의 날 선물을 사기 위해 읍내로
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15일 스승의 날이 되어서야 반짝 생각이
났고 분교 김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들의 깜짝 이벤트가 있었다고 했다. 버스는 떠났다.
18일 마을에서의 행사와 오리농장에서 부탁한 작업 때문에 계속 분교를 찾지 못했다.
18일 오후에 분교 아이들은 학교에서 야영을 했다. SBS 촬영팀은 작업을 했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오후에 갑작스럽게 의료팀과 분교를 찾아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진료방문을 했지만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2011년에도 연곡분교 작업을 중단한 시점이 5월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5월이
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분교 이야기의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수요일 아침, 그래서 나는 무조건 분교로 올라가야 했다.











분교에 도착하면 나는 보통 교무실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밖으로 나와 이 자리에 앉는다.
교실로 들어가기 전에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나무를 바라본다.
이 자리에서 꽃비를 본 것이 불과 며칠 전 인듯한데 신록을 지나 녹음이 완연하다.
나는 ‘모교’에 대한 시각적 기억이 흐릿하다. 기억에 남는 ‘스승’에 대한 이미지도 희박하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청사포 바다’로 확연했으나 10년 전과는 달리 나는 말년에 부산으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몇 년간 내 기억 속 풍경과 사람들 이미지의 구 할은 구례로 특정되어 있고 이곳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이곳은 나의 고향이 아니다.
그러나 경상도 억양의 나는 이곳 전라도 땅 구례가 나의 고향이라는 착각을 한다.
연곡분교 이 의자에 앉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나는 연곡분교가 나의 모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에 이 의자에 앉아서 이 나무를 바라 본 것 같은,
존재할 수 없는 기억이 자리하려고 한다. 다가올 나의 새로운 과거일까.











일 층 일·사 학년 교실이 조용하다. 어디로 갔지? 이 층으로 올라갔다. 육 학년 교실도 조용하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이동한다. 도서실이다. 아이들과 선생님 두 분 모두 도서실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무 선생님이신 김 선생님이 혼자서 커다란 책상을 들고 낑낑거리고 계셨다.
도서실의 큰 테이블을 교무실로 옮기고 교무실의 오래 된 소파를 도서실로 옮기는 작은 이사였다.
썩어도 준친데 그래도 남자인지라 내가 힘을 보태는 것이 좋을 듯했다.
잠시 땀을 좀 흘리고 다시 아이들에게 올라갔다.
컴퓨터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한 명이 없네. 결석을 했나.











아이들 모두 다른 때보다 집중력이 있다. 그것도 좀 이상한 일이다.
김미행 선생님이 아이들 자리로 가서 기록한 메모장을 내려다본다.

김 선생님 / 아인슈타인을 만나보고 싶어요?
혁준 / 만나고 싶어요.
유림 / 그럼 죽어야 돼.
김 선생님 / 그래서 책을 통해서 그 사람의 생각을 만나는 거예요.
유림 / 다 사 주세요.
김 선생님 / 좋은 책을 고르라고 했죠. 만화책만 고르면 무조건 구입할 수가 없잖아요.

아이들은 도서 목록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원하는 책의 제목과 출판사, 가격을 메모하고 있었다.
「디아블로3」한정판을 구입하기 위해서 매장 앞에서 밤을 보낼 일이 없는 연곡분교 아이들은 원하는 책을
몇 권 정도는 구입해 줄 수 있다는 선생님 말씀에 모니터에 눈망울을 매달아 두고 있었다.
그것도 가급이면 만화책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야 일 학년 찬이가 보였다.
카메라 파인더 밖, 맨 앞 선생님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뭔가를 기록하고 있다.
오전 열 시가 넘었다.

유림 / 바깥놀이 나가요!
김 선생님 / 아, 시간이 지났네. 자 모두 다 했죠? 바깥놀이 나갑시다. 찬아, 건강걷기 하고 와서 계속 하자.
찬 / 아직 다 안했어요.
김 선생님 / 그래도 지금은 건강걷기 해야 돼요.
찬 / 지금 할꺼예요. 얼른 사 주세요.
김 선생님 /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찬 / 지금 찾기 어려워서 그러잖아요. -,.- …
김 선생님 / … 울지 말고. 책을 못 사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중에 손영미 선생님이랑 일 학년 교실에서 다시 찾으면 되는데. 자자 일어나자.

찬이는 잠시 갈등하다가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혼자 책을 놓친 것이 아닌지 못내 불안한 표정이다. 계단을 내려 올 때 찬이 손을 잡고 내려왔다.
물론 걱정하지 마라는 소리를 하기 위해서였지만.











밖으로 나오자 손영미 선생님이 찬서를 본교에 데려다 주고 금방 돌아오셨다.
아이들이 찾던 카메라를 이미 어깨에 메고 계셨다.

나 / 찬서는요?
김 선생님 / 찬서는 과학경진대회 때문에 한 달간 일주일에 한 번은 본교에서
다른 아이들이랑 수업을 해야 해서요.

남산마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늘 따라 아이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유림이는 계곡으로 내려가자고 했지만 그런 정도로 시간이 많지는 않다.
앞서 걸으며 김 선생님과 며칠 전에 있었던 서울 동부병원의 진료 방문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일정이 맞지 않았지만 하은이 손에 대한 걱정 때문에 조금 무리하게 병원버스가 분교로 향하게 만들었다.
오후 5시 30분까지 다시 오미동으로 돌아가야 할 버스였기에 분교에서는 30분 이상의 시간 여유가 없었다.
거의 오후 4시 경에 분교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과 여자 선생님 두 분, 그리고 SBS 촬영팀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제일 즐거워하는 것은 몸으로 노는 일이다. 인구밀도가 낮다보니 팀으로 나누어 공을 찰 수 있는
기회가 희박하니 그 순간이 좋았을 것인데…
가을에 다시 한 번 진료를 온다면 검진만 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들이랑 아이들이 축구라도 한 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김 선생님과 나누었지만 그것은 가을의 일이다. 어쩌면 마지막 가을.











나는, 여전히 이야기의 중심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자백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아이들에게 접근해얄지 거리를 둬얄지 모르겠다고.
김 선생님은, 방송국 카메라와 내 카메라가 불편하다는 고백을 했다. 그것은 아이들도
같을 것이란 말씀도 하셨다. 그래서 아이들이 대견하다고. 참을 줄 아니까.
모르고 있으면서 알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익숙해질 것이라고 말씀 드렸다.
부실했던 5월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나누었다. 김 선생님과 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입장을 가지지 않기로 했던 2011년은 그래서 힘들었고 입장을 가지기로 한 2012년은 그래서 힘들다.
햇살은 약간 뜨거웠고 바람이 불었다.
방학이 올 것이고 여름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획, 일종의 재능기부 형식의 방학 중 자원봉사 교사 모집 기획,
여름방학 중에 분교 마당을 소규모 야영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자원봉사 교사들 릴레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이야기했다. 귀농귀촌 컨퍼런스를 개최할까? 취학 아동을 둔 가정을 대상으로
여름방학 시즌에 분교에서 개최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청의 예산을 어느 정도는 끌어들여야 한다.
분교 유지가 아닌 농촌인구 유입이라는 기획안으로 외피를 꾸며야 할 것이다.
분교 유지가 주제로 부각되면 관에서는 어차피 싫어할 것이다.
전교조에서 연곡분교 문제를 중심으로 한 위원회를 꾸리는 계획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나의 모든 이야기를 그 속에서 논의하자고. 그리하겠다고 답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도 표현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성과라고. 구례 내에서의 분교로의 전학 또는 귀농귀촌 가정의 자녀들을
유치하는 것.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 빈집과 예산이 필요하다.
분교에 오면 항상 생각이 많다.
학교가 사라지면 마을이 사라질 것인데.
분교가 사라지면 본교가 사라질 것이란 예고편인데.
어른들의 대화와 생각은 무겁고 심각하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일 학년 은희와 찬이가 들꽃을 꺾어서 손 선생님에게 건네고 있었다.
찬이는 이미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이 식물의 이름이 무엇일까요?
손 선생님이 물었는데 저는 당연히 모르지요.
식물박사님들 도움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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