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옴니버스 - 그녀에게

마을이장 2013.04.26 22:47 조회 수 : 13679

 

 

 





옥상에 올랐다. 불과 3m. 아침, 마을을 본다.
오미동 들판, 내 창 앞의 살구나무가 중심에 있고 왼편으로 운조루, 오른편으로 창고.
4월 26일 금요일. 신록은 절정을 조금 지났다. 또 놓쳤다. 산으로 올라간다면 절정의
신록을 담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르지 않을 것이다.
감나무 잎을 쫓아갈 수도 있지만 역시 절정은 조금 지났다.
물론 그 절정의 때란 제 각각의 취향이 좌우하기도 한다.
봄꽃들. 들과 길 주변으로 지천이다. 가보지 않아도 마을 뒤로 어떤 꽃이 피어 있는지 알고 있다.
별 이변이 없는 한 나는 일상의 소소한 이동 이외에는 마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장작을 두어 개 자르고 그냥 그렇게 옥상에 올랐을 뿐이다.
이 봄의 많은 장면들을 놓쳤다.











운조루 지붕 너머 왕시루 능선은 뿌옇다.
나는 안다. 안채 마당에서 솟아 난 저 연두가 백목련이라는 것을.
백목련이 피면 사진을 찍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운조루로 책 빌리러 간 며칠 전에도
나는 카메라를 들고 가지 않았다.
외사랑 앞의 큰 동백이 빛나고 있다. 나무 아래로 모가지가 떨어진 홑겹의 선홍색이
낭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저 집으로 달려가면 일주일 분량의 사진을 챙길 수 있겠지만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이제 마을은, 풍경은 사람과 같다. 매일 만나는 마을 사람들.











H형이 집을 떠난 것이 지난 월요일 아침이다. 나는 현관 안에서 지켜보았다.
차는 대기 중이었고 딸은 아이를 안은 채 아비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땅이 꺼지는 한숨소리가 들렸고 어떤 말이 오가는지도 들렸다. 들리지 않았지만.
차는 떠났고 딸은 돌아서서 한숨을 짧게 뱉었다. 손수건을 눈으로 가지고 갔지만
길지 않게 울었다. 아이를 안고 있었기에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이 보였다. 버스를 탈 것인지 택시를 기다릴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백 번이라도 차를 태워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있었다.
내가 다가가면, 이미 알고 있는 나를 발설하는 것이고 그녀는 많이 불편할 것이다.
설사 아이를 안고 터벅터벅 19번국도 쪽으로 걸어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그냥 두자.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면서 천근으로 내리 누르는 슬픔과 품 안의 아이를 견주더라도
나는 그냥 있자. 누구나 살아가면서 정말 묵직한 슬픔 몇 개는 삭여야 하는 것이고,
오늘이 그녀의 바로 그날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았던 자신 몫의 권리와 의무를 구분하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구례는 벗어나고픈 마을이었을 것이고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마을일 것이고
결국, 구례에서 위로받게 될 것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받는다. 짧지 않은 통화였고 끊고 보니 새벽 3시 30분.
잠이 깨어 버렸다. 머릿속이 두런거린다.











수요일 오후 4시 30분 부산.
치킨과 맥주를 파는 집은 느닷없는 시간의 손님을 맞이하고 여운 있는 눈으로 돌아선다.
먹지 않을 닭과 맥주를 시켰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쉰하나이니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여고생이었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의 기억은 명료했고 나의 기억은 흐릿했다.
문장은 이어졌지만 맥락이 없었고 행간은 헝클어졌다.











어쩌면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묻지 않았다. 남자들은 그렇다.
파출부, 식당 설거지, 단란주점 심야 설거지까지 들었을 때 담배를 피워야 했다.











“왜 그렇게 고전적이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 너에게 K는.”
“예.”
“헤어질 수 있겠어? 내가 볼 땐 너는 헤어질 수 없다. 그러니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지.”
“…”
“며칠 떠나 있을 수 있나?”
“어… 디… 로?”
“구례에 며칠 와 있지? 그냥 집을 잠시 떠나 봐. 내 생각은 그래.”
“안되는데…”
“왜?”
“제가 집에 있어야죠.”











기어코 그녀가 계산을 했다.
그리고 남은 닭을 포장했다. 딸의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여고생이었던 시절과 대학생이었던 시절의 그녀를 잠시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김치를 참 시원하게 담았었다.
그래. 가을에 구례로 한 번 와라.











수요일 오후와 목요일 오전.
부산. 법원 앞 법무사 사무실만 잔뜩 모여 있는 커다란 빌딩.
그곳에서 그녀를 두 번 보았다.











그러나 내 느낌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었을 뿐이다. 지하주차장.
주차장을 찾아 건물을 두 바퀴 돌고나서야 지하로 내려서는 입구를 발견했다.
여백은 없었다. 차들은 쉼 없이 주차타워를 오르내렸다.
부부로 보였다. 또는 가족이거나.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주차타워 아가리까지 그녀와 그는
뛰어 다녔다. 들어선 차를 세우고 주차증을 건내고 차를 넘겨받아 임시로 구석으로,
책장에 책을 쌓듯 그렇게 쌓고 타워로 차를 올려 보내고 타워에서 내려 온 차를 후진해서
차주에게 인도하고 돈 받고 인사하고 다시 달려가고 고함으로 대화하고…











마른기침을 하는 여자 법무사의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몸과 얼굴 균형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상담을 받았다. 내가.
10여 분 미팅을 하고 다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내 차가 타워에서 내려 올 때까지 다시 이틀 동안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분이 없을 것이다. 그래 보였다. 그녀의 피는 핏빛 분말가루일 것이다.
그렇게 쉼 없이 그녀는 지하주차장을 뛰어 다녔다.
이천 원을 주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은 이제 막 들어서는 차를 향하고 있었다.

“막 올라 오는 감나무 잎 보신 적 있어요?”

부산을 벗어났다. 혼자였기에 차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섬진강이 보이고 볼륨을 올렸다.











대평댁은 ‘나이가 많아서’ 노인 일자리를 더 이상 받지 못한다. 노인에서 정년했다.
요즘은 운조루 앞에서 하루 종일 무엇인가를 팔고 있다.
팔리지 않는 날은 나를 보고도 사라고 하신다.
5월부터는 월급을 드릴 것이다. 그녀는 모른다.
평생 구례에서 살았고 그녀 집 마당에는 지금 살구 잎과 감나무 잎이 돋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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