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이틀 전에 김미행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김장이라…
아직 대량 김장 후유증이 있는데 아이들 김장이니 올라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2차 학교설명회 이후 나의 발걸음이 좀 뜸했던 것은 펀드의 마무리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2주일 이상 자리를(?) 비우고 나면 분교의 상황이 많이 낯설어진다.
궁금하기도 하고 비워진 시기의 이야기들이 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꾸 달력으로 눈이 가는 요즘이다.







주방에는 내가 모르는 아주머니들과 내가 아는 어머니 몇 분이 배추를 씻어내고
양념을 만들고 청소를 하시는 중이었다. 6학년들이 도마 앞에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다현이와 유림이는 ‘얼핏’ 봐서는 자발적이고 의욕 있게 무를 썰고 있었다.
얼핏이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마음이 변하는 사춘기 여학생들의 일순간 웃음에 대해서
시종일관 같은 평가를 해 줄 수 없는 관찰자의 마음이기도 하고 다현이는 워낙에 책임감이
강하고 포커페이스 형의 아이인 탓도 있고, 유림이의 칼질이 자발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약간 의외이기도 했던 탓이다.
문제는 청일점 혁준이. 뭐 문제랄 것 까지는 없지만 여하튼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혁준이와 몸으로 부대끼면 운동장을 내달릴 수 있는 녀석이 한 명 정도 더 있다면 혁준이가
빛이 날 것인데. 한 마디로 처신이 쉽지 않은 포지션이다.











2층으로 교실을 옮긴 1, 4학년들은 모두 독서 시간이다.
사실 수업은 진작에 끝이 난 것이고 일종의 학교에서의 ‘돌봄’시간이다.
수업 끝났다고 선생님들이 바로 퇴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언니들 끝날 때까지
이러구 학교를 집 삼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법 책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식당과 교실에서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안녕함을 확인했다.
2학기 초반의 어색함과 들뜬 분위기가 아닌 뭔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는 느낌이다.











다음 날. 아침부터 분교로 올라갔다. 겨울비가 추적거렸다. 하루 종일.
경북 봉화와 동해안을 더듬고 돌아 온 이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래저래 한 해 몸살이 서서히 밀려올 시기가 된 것이다.
몸이 이런 경우는 대부분 일상의 긴장감을 놓쳐 버린 경우다.
아직 날들이 남아 있는데 좀 이르다. 여하튼 오늘은 내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니 사진이나 좀 찍고 아이들이 만든 김장으로 점심이나 먹고 내려갈 생각이다.











정하지 않아도 모든 일의 현장에서는 선수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혁준이 어머니는 이런 세상의 순리로 보자면 오늘 같은 경우에는 운명적으로
김장을 총괄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남학생들은 저기 가서 배추 담아서 이리루 들고 와라!”











1학년 지강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강이 어머니가 한국으로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학교 가까운 곳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보일러도 아닌 나무 때는 아궁이를 가진 집에 그렇게 자리를 한 것이다.
쉽지 않은 일상일 것인데 뚝딱 결정을 내리고 한 가족의 환경이 이렇듯 변화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연곡분교에서는 흔한 일이다.











머리카락 보인다.
주방장의 날카로운 눈매는 양념을 버무리기 전까지 끊임없이 작동한다.











찬이도 제 몫의 일을 하느라 나름 분주하다.
결국 이 난리법석의 본질은 아이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고
어른들은 덤으로 역할을 얻어서 ‘살아가는 일이 그러하다’는 피할 수 없는
순리를 겪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체험이건, 학습이건 뭐라고 불리건 간에.











자, 이제 아홉 명의 김장의 달인들이 레이스를 시작하기 직전이다.
많아 보이지만(내 눈에는 극소량으로 보이지만 -,.-) 수가 많으니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 손가는 일 없이 처리해 주면 좋겠는데…











배추는 아이들이 텃밭에서 키운 것이다.
분교에서의 김장이 단순한 체험이 아닌 하나의 완결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이들의 손으로 심은 모종이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경험하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이 배추의 이력을 아는 것이다. 물이라도 한 번 준 작물에 애정이 더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나면 왜 이리 가려운 곳이 많이 생기는 것일까.
지강아, 그 위에만 자꾸 양념을 바르는 것이 아니고 배추 잎을 들어서… -,.-
아직 우리말이 익숙하지 않지. 지강이에게 김치는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다.
지강이 어머니 역시 중국에 있을 당시에 먹어 본 김치는 맛없는 무엇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와서 보니 중국에서와 달리 배추에 들어가는 양념이 너무 많고
그 맛도 확연히 달라 요즘은 거의 김치만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지강이는 여전히 거의 완전한 육식동물의 취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자, 애들아 치대지만 말고 맛을 봐야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줘 보세요.”











첫 피해자는 그 말씀을 하신 김미행 선생님이 될 수밖에 없고.











아이들은 집중적으로 선생님들에게 ‘내가 만든’ 김치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검증을 요구하니 김장 작업대는 잠시 집중력을 잃고 소란스러워졌다.
이런 때에는 카메라로 계속 상황을 방어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나 역시 피해갈 수는 없고.











그래도 싫다는 소리 하지 않고 집중력 있게 김장이 계속된 것을 보니
아이들도 이 일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의 속도를 보면 언제 끝이 날까 싶은
상황이었지만 모든 일은 아이건 어른이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다섯 어머니들이 참석했기에 양념 그릇을 비워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쌓여 가는 김치가 배추보다 많아지면서 아이들의 옷도 양념으로 물들어 간다.
절임 상태였지만 배추는 얼어 있었다. 이 날은 본교도 본교대로 김장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니 날 잡고 배추 뽑은 흔적이 역력한 것이다.
며칠 지나면 김치통에 김칫물이 흥건할 것이란 예상이다. 물론 이는 관전자의
냉혹한 평가일 것이고 당사자들은 이런 날의 김치는 무조건 맛이 있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작업대에 선지 한 시간 정도 만에 김장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포장을 시작해야 한다. 이 김장은 분교에서 반찬으로 소비하기 보다는
인근 마을의 혼자 사시는 노인들에게 나누어드리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다.
꺼내서 드시기 편하게 한 포기씩 나누어서 위생비닐에 담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김장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정상적인 김치’가 완성된 것이 틀림없다.











비는 계속 내렸다. 이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두 선생님의 차에 나누어 타고 인근 마을로 김치 배달을 나갈 것이다.
소주병. 물론 누가 학교에서 저것을 흡입했을 리는 만무한 것이고.
소주는 수육을 삶을 때 투입된 것이다. 예정에 없었지만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오늘도 수육을 삶을 수밖에 없었다. -,.-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배달 미션을 떠난 후에 마무리 청소다.
이런 장면에서 끝까지 일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이른바 일꾼들이다.
통비닐은 시골에서 아주 요긴한 물건이고 잘 보관해서 내년에도 사용할 일이다.
내년에는 이 식당을 자체 가동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돌아왔다.
이 집 저 집 방문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은 마을회관 문을 열어보니 모두 그곳에 계셨던 것이다.
비가 내렸고 아이들로서는 간단치 않은 일을 끝내었다.
난로는 따뜻하고 배도 고프다. 그러나 1, 4학년들이 늦게 내려와서 좀 기다려야 했다.
먼저 먹으라고 했지만 함께 먹는 것이 습관이 된 탓인지 그냥 묵묵하게 기다렸다.
기다림도 배식도 이 모든 풍경도 왠지 익숙해 보인다.
내 집. 내 학교라기보다는 내 집.











밥을 나눈다.
이 밥상은 아이들이 차린 것이 아니라 연곡분교의 세 주인공들,
아이들, 선생님들, 학부형들이 함께 차린 밥상이다.
음료수를 컵에 나누었고 건배를 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그릇이 비워지도록
맛있게 밥을 먹었다. 2학기 초의 서먹함은 사라졌고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호한다는 느낌을 준다. 아이들의 졸업장에는 ‘토지초등학교’가 새겨지겠지만
부인할 수 없이 ‘연곡분교 아이들’이라는 동질감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학교 문제에 관한한 녀석들은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었다.
아이들은 좀 더 단단해졌다.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갔고 어른들은 봉지 커피 한 잔 나누고 헤어졌다.
방학 날짜만 확인했다. 28일. 늦다. 학교가 추울 것인데.
그러나 나로서는 차라리 한두 번 더 올라올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전입해 온 어머니들에게 물었다. 겨울을 피아골에서 보낼 것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 겨울이 될 것인데 힘들 것이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는 친구가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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