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배추모종 앞에서 생각하다

마을이장 2013.09.03 22:44 조회 수 : 12567









사실 나태했다. 지난여름. 그랬다.
물론 나태함에 대한 마음의 불편함은 없다. 그러나 무료하다.
다른 해에 비해 일의 가지 수가 많지는 않다. 밥벌이 일에 적극적이지 않아서 그렇다.
물론 몇 년간 밥벌이 일을 하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는 묘수에 대해 고민 중인 것도 사실이다.
월요일부터 좀 움직이고 있다. 아이의 훈련병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유에 기대어 나도 분주히 움직여 보려고 시도 중이다.











요즘 군대는 부대 마다 온라인 카페가 개설되어 있어 하루 한 번 정도의 소식이 올라온다.
중대장의 문자 서비스도 있다. 훈련병들이 오늘 뭐 먹을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어느 부모와 다름없이 아침저녁으로 아이가 속해 있는 부대 카페에 코를 쳐 박고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며칠 살펴보니 하루 종일 그곳에서 댓글 달고 간섭하고 참여하는 부모도 여럿이다.
우체통에 글을 남기면 취침 전에 훈련병에게 출력해서 전달한다고 해서 나 역시 하루 한 번의
짧은 편지를 작성한다. 나는 그냥 나의 일상을 전하기로 했다.

어제는 배추 모종을 한 판 샀다. 105개 들어간 것.
오늘 오후에 밭을 두드리고 모종을 넣어야는데 금년에는 아빠도 너무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사실 하기 싫구나. 그러나 김장을 하려면 결국 몸을 움직여야겠지. 그래서 너를 생각한다.
네가 훈련을 받고 있으니 나도 하루 한 두 시간의 밭일을 할 것이다. 스스로 그리 정했다.











간혹 자체 동력을 상실했을 때 외부적인 강제 요인에 기댈 때가 있다.
지난여름 나의 나른함은 지나고 보니 아이의 입대를 전후한 마음의 흐트러짐이었고
여전히 그 여진 속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조금씩 회복될 것 같다.
나를 재촉하기 위해 화요일 오후에 배추를 심었다.
땅콩과 고추 사이 다섯 평 정도의 묵혀 둔 땅을 좀 다독거리고 물길만 잡아서 넓은 두덕을
만들었다. 잠시 동안의 노동에 해가 나오지 않은 흐린 날이었지만 땀이 흐른다.











붕소를 조금 뿌리고 순영이 형에게 얻어 온 퇴비를 넣었다.
땅은 묵혀 두었기에 고슬고슬했다. 땅에 호미 집어넣기도 일 년은 된 것 같다.
금년은 펀드에서 직영하는 배추밭은 없을 것이다. 물론 문수골에 작년과 같이
배추를 수천 포기 옮겼지만 펀드 용도는 아니다.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사전에 물어보니 대략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백 개 남짓한 배추모종을 집어 넣는 일은
작년의 규모에 비하면 두 시간 정도의 적당한 몸놀림이었다.
살아보니, 확정된 나의 마당이 있다면 서른 평 정도의 텃밭이 나에겐 정답인 듯하다.
그 정도면 일 년 중 여덟 달은 마트에서 채소 살 일은 없을 것이다.











마당 텃밭의 고추 몇 나무는 고춧가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때그때 따서 먹는 일인데
이 역시 모두 소비하기 힘들다. 금년 고추 가격이 싸다. 지인의 부탁으로 아침에는
구례장으로 향했다. 고추 스무 근을 사다 주어야했는데 근에 육천오백 원에서 최상은
구천 원 정도까지다. 작년에 비하면 거의 삼분의 이 수준이다. 이곳은 비가 많지 않아
비교적 고추농사에 좋았던 날씨였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지 않았는데 고추장의 모습은
언제나 장하고 애틋하다. 엄니들이 제 손으로 키우고 말린 고추를 들고 나와 서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근에 십만 원이라도 주고 싶지만 나 역시 싸고 좋은 놈을 구한다.
싸고 좋은 놈. 그런 물건은 없다.











상사마을 집2로 들어가는 대문은 담쟁이로 은폐 중이다. 마을 전체가 이 넝쿨이 흔하다.
며칠 전에는 택배 아저씨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이 산다.
단지 여름이면 식물의 그 왕성함과 완강함을 그대로 둘 뿐이다. 게으름에 태도를 더한 것이다.
대문이 예뻐 배추를 심고 나서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새벽이면 이불을 끌어당기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더 이상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
이런 꽃들이 여름의 마지막 수순이다. 배추를 심는다는 것은 여름이 끝이 났다는 것이고
어쩌면 서둘러 한 해의 마감을 향해 마음을 한 번 더 다잡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상하게 배추를 옮기면 남은 일수를 헤아리게 된다. 배추는 김장이라 그런 모양이다.
처서 지나고 들판이 조금 누렇다. 순영이 형은 월요일에 첫 추수를 한다고 나가더라.











아이에게 쓴 편지 중에 별이 이야기가 있다.

별이가 전주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사나운 놈이니 진정제를 놓고 초음파와 몇 가지 주사제를 주었다.
피검사와 초음파로는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계속 밥을 먹지 않고 있다.
어제(월요일) 오후에는 마당으로 나와서 움직이더라. 조금 낳아진 모양이다.
원인은 진드기 때문인 듯하다.

개. 나는 사람 아닌 생명에 정을 주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한 탓인지 오래 전부터
진정으로 무심한 편이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까지 키운 개들 때문일 것이다.
별이는 풍산개다. 사납고 똑똑하다. 이미 여섯 살이다.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고 나는 그 날 이후가 더 걱정이다. 대체할 수 없는 개다.
며칠 식음 전폐하고 누워 있던 별이가 배추를 심는 동안 데크에 나와 있었다.











무얼까?가 한냉사(일종의 모기장)를 주었지만 귀찮아서 설치하지 않았다.
지난 7년 동안처럼 사람이 앉아서 벌레를 잡아야 할 것이다. 뭐 백 포기 정도이니.
배추는 90일 농사다. 90일 동안 아이의 훈련병 생활이 끝이 날 것이고 조금 더 진행될 것이다.
어쩌면 여덟 번째 배추의 용도는 그 시간을 견주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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