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안과 밖

마을이장 2013.08.24 00:38 조회 수 : 13159

 

 

 





비가 왔다.
정확하진 않지만 구례에 제대로 된 비가 내린 것은 한 달이 넘었을 것이다.
처서處暑다. 여름은 이제 뒷모습을 보일 것이다. 비가 내리는 처서.
그것은 어쩌면 여름의 퇴장을 위한 적절한 그림일 것이다.
족히 한 달 가까이 무위도식하는 일상을 보내었다.
목적한 일은 있었으나 초입에서부터 나는 의자 접듯 의지를 접었다.
주로는 상사의 집에 웅크리고 있었고 간혹 오미동 작업장 그리고 차 안에서,
오로지 에어컨에 기댄 한 달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해가 갈수록 습도를 견디기 힘들다.
휴가라고 선언한 적은 없지만 휴가를 보내고 있을 것이란 적당한 오해 속에서
비교적 부담 없는 시간이 흘렀다. 달랑 두 편의 글을 「맨땅에 펀드」게시판에 올린 것이
내가 남긴 여름 흔적의 전부였고 최근에야 편집자에게 가을에 책을 내는 일은
힘들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것은 어쩌면 행위의 허망함에 대한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목적 없는 휴식은 충전이 아닌 방전을 유발하는 것 같다. 지난밤에는 나에게 쉰다는
종목에서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쉰다는 것이 즐겁지 않다.











어쩌면 나는 나를 둘러 싼 제반의 상황과 조건들이 잠시 재미없어진 것이다.
복잡다단할 것 까진 없지만 잠시 꼬여 버린 내 안의 매듭은 내 몸의 겉이 느끼는 더위와
습도에 모든 핑계를 둘 수 있었다. 그것이 여름의 역할이고 나의 안과 밖은 화해하지 못했다.
가끔 노동에의 의지나 크리에이티브가 유한할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것은 물론 내가 나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칠 것이란 불안감일 것이다.
밖 또는 겉은 노년기로 접어들고 안 또는 속은 그 사실을 부정한다.
그 경계선에 다른 느낌의 외로움이 존재한다. ‘지금’ 내 본성의 거처를 고민하는 것이다.
오후에는 오미동 카페에 앉아 비를 보거나 한담을 나누거나 산으로 올라가는 구름을 보고 있었다.
카멜의 shout나 존 로드의 Pictured Within 같은 노래가 듣고 싶었다.











시골에 살면서 많은 노인들을 보았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성숙해진다는 말은 포유류의 노화를 미화하거나 위로하기 위한 장치다.
노련해질 수는 있지만 성숙해지지는 않는다. 각자의 본성은 강화될 뿐이다.
굳은살과 각질은 속을 은폐하기 위해 두껍고 거칠어질 뿐이다. 그것도 일종의 장식이다.
아무리 부인해도 판단의 개수와 경험이 제공한 편견은 점점 층과 단단함을 강화하기에
아무래도 ‘내가 옳은’ 것이다.
정신과적 소견으로 어떻게 판단하건, 말은 적을수록 좋다는 취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꾸 말을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인터뷰나 내 말을 듣고자 하는 모임에서의
‘말’은 텍스트와 같은 증거로 남게 된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옳다’.
노후를 위해 다른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 시절을 관통하고 있다.
연대年代는 마디를 가진 것이고 지금이 그 마디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 마디를 그냥 흘려보낼 것인지 변신할 것인지. 나를 그냥 놔둘 것인지 닦달할 것인지.
어차피 그리 될 일인지 그리 해야 할 일인지.
어떤 경우이건 그에 따른 나의 변명은 준비될 것이다.











TV를 보면 스마트폰 광고가 자주 나온다.
다른 모든 회사는 속도와 사이즈를 자랑하는데 한 회사는 삶을 이야기한다.
많은 회사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를 말하고,
한 회사만 ‘왜 만들었는지’를 말한다. 물론 많이 팔아보겠다는 목적은 모두 같다.
브랜드 파워가 ‘그런 광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략의 문제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차이는 처음부터였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의 차이였다.
결과를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결과에 주눅들 필요도 없다.
역시… 말년末年과 꼭 타협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뱀발>
이런 글 나가면 꼭 ‘뭔 일 있냐’ 라는 질문이 있는데, 아무 일도 없다.
분위기 한 번 잡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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