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 꽃, 2016 - 노래를 내려놓다

마을이장 2016.03.27 21:18 조회 수 : 1667

 

 

노점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천막이 월요일로 약속을 넘겼고 쌀쌀한 바람이 며칠 이어져 꽃들은 마지막 변태를 앞두고

일제히 창을 꼬나들고 입구를 노려보고 있지만 진격 나팔소리는 3일 동안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변비도 한계는 있는 법. 월요일 오후에는 십리벚꽃길의 화전은 시작될 것이다.

우리도 변죽만 울리며 상황에 대한 정신승리적 분석으로 며칠을 보냈다.

일요일은 화개로 가지 않기로 했다. 광양 매화와 산동 산수유의 마지막 날이다.

19번 국도는 번잡하거나 정지화면일 것이기에 오지 않을 천막을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미루어 두었던 미션을 오늘 처리하기로 했다.

지난 늦은 가을부터 왕학봉 어르신의 부탁이 있었다. 영정사진.

꽃 피는 봄이 오면 찍자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나는 주로 화개에 있었다.

두어 번 무얼까?를 통해서 나를 찾으신 모양이다.

그 사진 찍는 친구 오미동을 떠났냐고.

 

 

 

 

 


 

오미동. 이 질기거나 연약한 인연.

나에게 오미동은 영화 <트루먼 쇼>의 배경과 같은 마을이다.

그 시간, 그 계절이 오면 영화는 어김없이 같은 모습으로 무한 반복된다.

출연배우들도 그 시간, 그 계절이면 언제나 같은 사람들이다.

물론 이 세상을 떠난 몇몇 분들이 계시지만

새 인물이 이 화면 속에 등장하지 않으니 생경함은 없다.

보이지 않음은 낯설지 않다. 처음 보이는 것이 낯설 뿐이다.

일요일. 역시 오미동은 바람이 불었고 봄꽃을 쫓아 온 도시 사람들의 승용차와 관광버스가

약간 어지럽고 마을 엄니들은 운조루 앞 좌판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도 지정댁, 청내댁, 대구댁, 금강댁, 근동댁, 갑동댁, 운암댁이 위치 변경 없는

교실의 학생들처럼 자리를 잡았다. 그 앞으로,

헬로키티 어르신은 언제나 같은 자세로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그대로

‘지나가는 노인1’ 역할을 데자뷔의 전형으로 연기하신다.

어쩌면 다 듣지 못한 저 자리에서의 대화도 지난 10년 동안 같았을 것이다.

오미동 특유의 봄 북서풍 탓이겠지만 오래간 만에 카메라 파인더 속으로 보이는

이 모습에 코끝이 약간 시큰했다.

 

 

 

 

 


 

‘왕샌’의 마지막 촬영 장소로 택한 어르신 댁으로 오르는 길에 대평댁 마당으로 들어섰다.

하루 전에 무얼까?가 전한 대평댁의 토끼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전부터 마당에서 토끼를 키우는데 새끼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어느 큰 집 마당 풀을 맬 때 대평댁 특유의 나긋한 말씀을 듣고 쓰러졌다는.

 

도 없는 토끼라 새끼를 낫틀 안 혀.”

 

발언의 진위를 파악해야 했다.

마스크를 쓴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다가 반색을 하신다.

 

“엄니, 좆도 없는 토깽이 키운담서요?”

“염병하고… 아 어솨!”

 

수사 결과 ‘도 없는 토끼’가 정확한 워딩이었다.

새끼를 낳았으나 모두 죽였다. 옆에 있던 ‘덩덕개’가 소리를 보탰다.

 

“엄니 토끼는 새끼 노믄 입구를 개려줘얍니다. 암 그럼 다 죽여요.”

 

그리고 토끼장으로 손을 넣어서 암놈을 살펴보고 ‘젖 있음’을 확인했다.

결국 대평댁의 토끼장은 다무락 쪽으로 좀 더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처방을 내렸지만

대평댁이 ‘낯선 자의 훈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밤죽을 끓이니 들어오라고 성화였지만 왕샌의 마지막 컷을 찍고 오겠다고 말씀 드렸다.

 

 

 

 

 


 

말린 밤과 동부 콩, 지난 가을의 땅콩이 남았다면 넣어도 무방하다.

물에 넣고 끓이다가 설탕이나 사카린을 넣는다. 모두 말린 재료들이라 오래 끓인다.

달근하다. 겨울 감기약처럼 그렇게 만들어 두고 숟가락으로 훌훌 씹고 마신다.

‘퍼 주는데’ 이골이 난 대평댁은 역시 소복하게 담고 옆에 ‘당연히 두 그릇은’ 먹을 것에

대비한 양푼이를 대기시켜 두고 있었다.

 

“엄니도 드세요.”

“자네들 잡솨. 왕샌은 안 온가?”

“내우하는 모양이죠.”

 

그리고 실로 오래간만에 대평댁 마루에 앉아 지난 가을에 만든 덧창을 찬했고

대평댁은 지난 7년 동안 해 오던 반복된 대사를 쳤다.

 

“엄니 얼굴이 살이 찌신 것이요, 부은 것이요?”

“부었어.”

“심장약은 드시오?”

“하.”

“약은 서울에서 붙여 옵니까?”

“어제 내가 택시 불러가꼬 읍내서 타왔어.”

“얼마만에 나가세요?”

“두 달.”

“그러믄 다음에는 제 차로 나갑시다.”

“아, 자네는 화개로 갔담서 어찌케 한당가.”

“아, 마을 떠난 게 아니라니까!”

 

두 그릇째 퍼 담는 손을 말리고 일어섰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대평댁의 두유’ 몇 개가 비닐 봉다리에 담겨져 있었다.

화개 노점 끝나고 나면 대평댁과 지정댁 모시고 마당에서 고기라도 한 번 구워야겠다.

지난 2년 간 너무 소홀했다. 9년 전 어느 봄 날 지리산닷컴의 컨테이너를 처음 착륙했던

운암댁 밭 자리 좌우로 우 지정, 좌 대평과 흰소리로 낄낄거렸던 그 시간들이

어쩌면 화양연화의 시절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임무를 완수하고 나의 마당으로 돌아왔다.

살구꽃이 피어 있었다. 사람이 없어도 나무는 제 할 일을 한다.

작년보다 수세가 약하다. 열매도 그러하겠다.

그러나 언제나 나무가 하는 일은 사람보다 장하다.

고딩인가 중딩 시절에 장례희망을 ‘오부리 악사’로 적어서 제출했다가 담탱에게

뒤지게 얻어터진 ‘덩덕개’는 살구나무 아래에서 하모니카를 불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그와 나는 이번에 소시지를 팔아서 기필코 돈을 벌어 보자는 알뜰한 맹세를 했는데

오늘도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눈길을 던지고 있다.

 

 

 

 

 


 

어쩌면 양복을 입으실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양복을 입고 내 마당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 어르신을 뵙고 살짝 당황했다. 잘 어울리셨다. 워낙에 표정이 좋으신 분이다.

개인적으로 영정사진 찍어 달라는 노인들의 수줍은 부탁을 들을 때 마음이 제일 뿌듯하다.

마을에서 영 몹쓸 놈으로 살지는 않았다는 인증서를 받는 기분이다.

몇 번 일상복의 일하는 모습으로 영정사진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자식들에 의해

‘소용없는 사진’으로 판결 받았다. 심지어 유언으로 ‘꼭 그 사진으로’ 라는 말씀을

남긴 경우도 내가 찍은 사진의 얼굴에 양복을 합성하기도 했다.

연예인은 아니더라도 나는 노인들의 영정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웃는 모습이기를 희망한다.

마을 전체에 꽃이 만발한 날이라 두 세군데 지점에서 꽃을 배경으로 상반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용하진 않을 사진인데 이왕 이런 날이니 댁에서 한 번…”

 

이른바 B컷이다. 내가 품기 위한 사진이다. 평생 사시던 초라한 집을 배경으로 몇 컷,

집 앞의 살구나무 아래에서 장년의 기운으로 전신 컷을 찍었다.

지금 내 앞에,

한 평생의 시간이 순간으로 서 있다.

 

 

 

 

 

이제 한영애의 노래를 멈추고 아래 유튜브 영상을 플레이하자.

그리고 감상하자. 같이 늙어가는 지리산닷컴 주민들도 곗돈을 부어서

영상 속의 카페 같은 것을 한 번 만들어 보자. 봄날은 또 오고 우리는 외롭지 않은가.

 

 

 

jirisan@jiri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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