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진은 농부 원유헌 님이 제공한 것이다.

 

시골은 원래 바람이 소식을 전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누가 이사 왔고

누가 떠났다는 말들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내가 살고 있는 전라도 땅 구례 하고도 용방면에 신문기자 또는 사진기자 하던 사람이

‘사표를 내고’ 또는 ‘직장에서 잘리고’ 내려와서 산다는 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날아다녔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런 경우 신문기자와 사진기자, 사직기자와 해직기자를 분간하는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지 ‘기자’ 라는 직업이 중요하다.

별 이변이 없는 한 그의 성 씨와 이름 뒤에는 어차피 ‘***기자’ 라는 호칭이 붙어 다닐 것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막무가내의 규정과 다르지 않다.

여하튼 “기자하던 사람이 시골로 내려와서 농사짓는다.”라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린 것은

2012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궁금증이나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외지 것 한 명 또 늘었구나. 인연 닿으면 얼굴 볼 날 있을 것이다.

* 원 기자가 귀촌한 시기는 2011년이다.

 

 

 

 

 

구례군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K형’이 있다.

그의 임무와 역할은 ‘군정기록담당’인데 쉽게 말해서 ‘군청찍사’, 즉 사진 찍는 사람이다.

군청찍사는 ‘마을찍사’인 나와 가깝게 지내는 구례 사람이다. K형은 가끔 뚜쟁이 노릇을 자청한다.

외지 것인 나에게 지역의 이런 저런 사람들을 소개하곤 했다. 겨울이었을 것이다.

K형은 나에게 구례군청 공보계 회식에 참석하라는 오더를 때렸다.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용방면으로 귀촌한 한국일보 기자 출신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읍내 식당에 우리 부부가 당도했을 때 이미 음식은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과 인사하고 ‘조금 늦는다’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밥과 술은 시작되었다.

잠시 후 어떤 이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촌 서방 한 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구나. 나는 계속 밥을 먹었다. 그런데 K형이 일어서서 그 촌 서방을 맞이했다.

순간 살짝 당황했다. 물론 직업에 따른 외모에 관한 법적인 규정 같은 존재하지 않지만,

최소한 ‘시골 사람이다’, ‘도시 사람이다’는 정도의 인상기 또는 전형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 온지 나는 당시 이미 6년을 경과하고 있었던 터라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면 대략 구례 사람이다, 인근 소도시에 산다,

서울·경기 지역에서 옮겨 왔다는 정도의 판단을 한다.

그런데 이 ‘원 기자’ 라는 사람은 완전히 나의 빅 데이터 밖에 존재하는 경우의 수였다.

그의 첫 인상은 3대째 구례군 용방면에 터 잡고 살고 있는 농부였다.

평소 자연경관을 보면 마음 속 감동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월인정원(내 마누라의 닉네임)이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감상문을 발표했다.

 

“어머, 완전 노안이세요!”

 

흠칫 했지만 그는 이내 달관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그는 마흔 여섯이었고 월인정원은 마흔 다섯이었다.

 

 

 

 

 

원유헌. 1967년생이다.

나보다 네 해 아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말을 편하게 못한다.

편하게 말 놓을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이외의 이유가 작동하는 듯하다.

 

나 / 원래 시골 태생입니까?

원 / 아뇨. 서울에서 살았는데요.

나 / 부모님 고향이 시골이라거나…

원 / 아뇨, 부모님도 경기도 출신이시고 일찍 서울로 올라가서 사셨죠.

나 / 그럼 평생 서울에서 사셨어요?

원 / 예.

 

그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의 외모로부터 기어코 시골출신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려던 나의 시도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 / 대학은…

원 / 외댑니다.

나 / 전공이?

원 / 영어과요.

 

다시 나의 표정이 뜨아했던 모양이다.

 

원 / 대충 제 전공 이야기하면 그런 표정 지어요.

나 / -,.- 군대는요?

원 / 한남동 헌병대서 밥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수순은 그가 과연 서울에서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시골 살면서 몇 번 경험했는데 서울에서 ‘뭐 했다’고 뻥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그의 손은 수십 년 고생한 시커먼 솥뚜껑 이미지였다.

곰발바닥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침을 삼켰다.

그 투박한 손은 셔터를 누르기 보다는 80년대 언론사 사진기자들이 들고 다니던

<니콘 FM2>로 사람을 내려칠 것 같은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실제 기계식 카메라의 명품 <니콘 FM2>로 전경들의 방패와 대적하던 기자들도 있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원 기자도 <니콘 D3>로 전경을 팬 적이 있다고 했다.

 역시 그의 카메라 사용법은 그랬던 것이다.

 

나 / 첫 직장이 한국일보였습니까?

원 / 세계일보가 첫 직장입니다. 1993년에 원서를 냈습니다.

나 / 원래 사진 찍으셨어요?

원 / 아뇨. 필름 끼울 줄도 몰랐습니다.

나 / 그런데 왜 사진기자로… 세계일보 사주가 친척입니까? 문 씨 아닌데…

원 / 그때 학점 안 보고 서류 전형 없는 직장이 사진기자였습니다. 필기시험만 봤죠. 경쟁률도 낮았습니다.

나 / 그럼 사진에 대한 것은 뭘로 평가합니까? 실기시험 같은 거라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원 / 실기가 있었죠. 주변에서 필름 컷 수만 채워라, 가깝고 크게 찍어라고 시켜서 그렇게 찍었습니다.

나 / 그게 언론고시 패스 비법입니까?

원 / 예.

나 / …

 

그러나… 나의 집요하고 탁월한 취조기술 끝에 원유헌의 아버님께서 사진관을 하셨다는

사실을 자백하게 만들었다. 을지로 명보극장 앞의 사진관에서 기사로 시작해서 20년 운영을 하셨다.

이후 중화동으로 옮기셨다. 중화동 시절부터 집안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한다.

대략 직업의 맥락이나 계기가 있기 마련인데 아버님이 사진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풀어 놓지 않았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나 / 그럼 한국일보로는 언제 옮기셨어요?

원 / 세계일보에 일 년 반 근무했습니다.

1995년에 한국일보의 제의가 있었지요.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였죠.

 

2011년 8월까지 만 16년을 근무했다.

주로 사회부와 기획기사 쪽에서 일했다. 청와대만 안 갔다.

그것이 개인 의지로 부서발령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러했단다.

 

나 / 기자 생활하면서 힘든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원 / 자꾸 가운데 이야기를 하는 일이 불편했습니다.

나 / 가운데 이야기?

원 / 중용, 중도… 뭐 그런 식으로 말하지만 그런 소리들은 그림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설정이지만 신문기사에서 남들 사이의 중간 이야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죠.

당시 언론사라는 곳의 논조는 그랬습니다. 맥 빠지는 일이죠.

나 / 음… 결국은 불쾌한 표현이겠지만…

대부분의 직업이라는 것에서 90년대 중반 이후로 사명감이나 직업의식 같은 것이 있었나요?

그냥 직장 아닙니까? 월급 타는 곳.

원 / 최종 결과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정은 기자들의 생각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온갖 것을 끌어다가 나는 기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우기기도 하고 자기 생각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데스크에 대들기도 하고 그랬는데…

2000년 초에 당시 잘 나가던 신문사에서 경력직을 모집했습니다.

월급은 대략 두 배 수준으로다가. 그런데 뒤에 그곳에 근무했던 사람에게 들었는데

아무도 지원서를 낸 사람이 없었습니다. 월급과 명함만으로 직장을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죠.

 

어쨌든 기자로서의 직업의식이나 자존심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는 말씀이다.

세상에는 이른바 ‘소명의식’이 강조되는 직업이 있다. 기자라는 직업도 그런 영역이다.

전직 기자 한 사람을 앞에 두고 대한민국 언론의 문제점에 관한

만 마디의 말을 쏟아 낼 수는 없었다.

 

나 / 직장은 왜 관뒀습니까?

원 / 자본주의 부적응, 도시 부적응, 조직 부적응. 저는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다니던 직장이 2000년경에 연봉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조선일보가 부동의 탑으로 치고 올라갔을 무렵인데 그때 한국일보는 맨 아래서 2~3등이었다.

당시 사주는 임금을 조선일보 수준의 연봉제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기자들은 퇴사 후 재입사 방식을 거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노조 탈퇴도 조건으로 내세웠다.

언론사 노동조합 1호가 한국일보다. 원 기자도 입사할 당시에 기자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기억이 강렬했다고 한다. 기자들은 거의 100% 노조원이었다.

당시 연봉 개념으로 원 기자의 수입은 3,500만 원 정도였다.

사측의 요구에 따르면 연봉 5,000만 원 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원 기자는 아내 김희정 씨(전직 방송구성작가)와 <10초 토론>을 진행했다.

 

아내 / 1,500만 원 더 생겨서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을까?

남편 / 없다.

아내 / 반대로 깎이는 경우가 아니니 그냥 버티자.

 

원 기자와 김희정 씨의 결정은 그러했지만 다른 조합원들의 결정은 달랐다.

 

원 / 30%는 남을 줄 알았지요.

나 / 이하로 남았습니까?

원 / 결과적으로 3%, 6명이 노조에 남았습니다.

나 / 그런 결정 뒤에는 사람 자체가 어제와 달라지지 않습니까?

원 / 당연히 달라지죠.

나 /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많아졌겠습니다.

원 / 표면적으로 심하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연과 결정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가능하겠지만 그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는 기자라는 직업이, 생산해 내는 결과물이 사람들한테 도움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신문이건 신문지건 지면은 채워야 한다.

 

“일이 터지면 신문 만들기 편합니다.

그러나 신문 만드는 일은 매일 매일 기사를 생산하는 일입니다.

태평성대에서는 기사를 기획하고 어거지도 부립니다.

사건이 발생 한다기 보다는 의도성을 가지고 생산합니다.”

 

전업을 생각했다. 목수가 되고 싶었다.

한옥문화원으로 가서 한옥 목수 일을 배웠다.

노동조합 사무국장이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한옥학교 2년, 생태건축 1년을 배웠다. 그러나 남의 집 짓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인간이 잘 해서 잘 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차라리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피하는 것이 옳습니다.

남의 집 짓고 욕 얻어먹고 하잖아요. 잘 못 지어서 집이 무너질 수도 있고…”

 

그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나 역시 하고 싶은 일 보다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경계하는 ‘방어적 실천’에

삶의 태도와 입장이 기울어 있다. 외모의 벽을 넘어 처음으로 그가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경우 대개 인생 효율은 떨어진다. 효율(效率) -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

 

“남미, 동남아 같은데서 공정비용 절감 이야기 있잖아요.

월급 올려 줄테니 일 더하라는 사장의 제안에,

월급은 그대로 하고 반만 출근하면 안 되냐는 대답 같은 거…

저는 생각이 그쪽에 가까운 거 같아요.”

 

농사로 관심을 전환했다. <귀농운동본부>에서 진행하는 귀농학교도 이수했다.

전국을 많이 돌아다녔다. 개인적으로는 전북 진안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사람이 정착하는 일은 역시 인연이 작동한다.

부인 김희정 씨와 구례군 용방면 사림마을의 모 씨는 시골로의 이전에 관한

대담을 간혹 하던 사이다. 모 씨가 집안 자랑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이장이니까 한 번 만나 봐.”

 

그렇게 인연이 되어 2011년 초반에 구례로 왔다.

나는 시골로 옮겨 온 부부에게 꼭 자식이야기를 묻는다.

자식 때문에 서울로 가기도 하지만 자식 때문에 시골로 옮기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부모들은 시골 행을 원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여의치 않은 경우도 흔하다.

 

나 / 아들이 있죠? 선재였나요? 지금 몇 학년이죠?

원 / 구례고등학교 다닙니다. 2학년이죠.

나 / 대학 간데요?

원 / 글쎄요. 일단 지금은 간다고 하네요.

 

아들 선재.

공동육아 방식으로 유년기를 보냈고 초등학교부터 대안학교를 다녔다.

과천자유학교(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는 12년 학제다.

6년을 마치고 구례로 내려 올 때 선재는 살짝 울었다. 그러나 구례로 옮겨 온 지 5년,

‘나름 만족한다’고 스스로 부모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나 / 주변에서 듣는 소리가 있을텐데…

원 / 간혹 무책임한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죠.

 

대한민국에서 자식 또는 교육 문제는 대치동이나 목동을 워낙 강력한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기준 밖에서 놀다보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 / 뭐라고 해도 결국 아직까지는 부모 결정이잖아요.

원 / 제 생각에 일반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범죄에 가깝습니다.

뻔한데 겪어라? 이건 너무 폭력적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현재 구조도 바르지 않습니다. 만약에 대학을 가야겠다면 남들보다 4~5년 늦는다고

늦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맨날 같은 날 같은 시절에 같은 학교를 다녀야 합니까?

만약 일반 학교를 다녔다면 그에 맞는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목동, 대치동에 다니면 그에 맞는 노력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노력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미안하다’ 인정했죠. 다른 것을 줄 수 있는 곳이 시골이다. 그렇게 결정한 겁니다.

언젠가 선재가 따진다면 근거와 설득력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손님입니다.

 

그는 느리고 낮게 말을 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교육 문제에서 그는 의외로 단호한 입장과 어조로 생각의 영역을 명확히 했다.

인터뷰 중 가장 단호한 어조였다.

 

 

 

 

* 원 기자 집의 지원군이자 절친, 간전댁 엄니.

 

나 / 무섭지 않았나? 거의 전재산 올인해서 내려 온 거 맞죠?

원 / 첨에는 별 계산을 다 해봤죠. 월 삼백은 되어야 하지 않나?

그러다가, 수입에 맞춰 살자로 정리가 되더라고요. 뭐 선재한테 물려 줄 것도 아니고…

 

월 삼백 이라는 그의 말 앞에서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치켜들지는 못했다.

전직 기자 원유헌은 농사를 직업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그러하지만 앞으로도 그러하고 싶다는 것은 일종의 의지에 가깝다.

농부라는 직업은 유지하기 쉬운 직업이 아니다.

과거의 데이터와 예측 데이터 모두에서 농부를, 농사를 전망 있는 직종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 농부인 원유헌의 깃발은 ‘나의 정체성은 농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연간 소득의 50%가 목표였다. 시설농사(하우스나 온실)가 아닌 전통적인 쌀농사와 밭농사로

장담하기 힘든 미션이다. 지금까지 3년 이상은 비교적 양호했다.

대략 연 삼천만 원 정도 중 농사 수입이 55~60% 정도다. 고정비용도 줄고 있다.

처음 3년은 수입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1년에 천만 원만 까먹자’는 것이 이들 부부의 영악한 전략이었다.

참고적으로 그의 농지는 쌀 1,300평, 밭 1,400평.

그 중 1,000평은 감, 매실, 개복숭아, 꾸지뽕, 돌배…

월 6만 원짜리 꾸러미 스무 가구를 운영하다가 2015년 여름부터는 잠시 중단한 상태다.

농작물이 나오면 페이스북을 통해서 알리고 판매도 한다.

나는 귀농귀촌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많은 ‘외지 것들’이

일단 유기농이나 무농약을 지향하는 것을 알기에 심드렁하게 물었다.

 

나 / 원 기자 개인적인 농사 원칙이 있습니까?

원 / 세 가집니다. 무화학농, 비닐멀칭 반대,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앞에 두 가지는 보나마나 뻔한 대답이고 세 번째 원칙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나 /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원 / 감당의 의미도 있고 땅의 소유권에 대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나 / 긍께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땅을 거시기 해불면 곤란하다 뭐 그런?

원 / 예, 대략 그런…

나 / 그러면… 농사라는 것이 면적과 수입이 비례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 기자가 시설농사 짓는 것도 아니고 농사지어서 잘 살기는 힘든 거 아닙니까?

원 / 뭐 그렇죠. 그래도 뭐… 가족이 같이 생활하고 있고… 연비를 높여서 살면 됩니다.

 

연비(燃費) - 자동차가 단위 주행 거리 또는 단위 시간당 소비하는 연료의 양.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도 그러하니.

적게 먹고 적게 싸자는 시골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일반적 전술이다.

합리화이기도 하고 처지가 원칙으로 변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생명체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장점은 옵션이다.

내가 적게 가져서 니가 불편한 일 있냐?

 

나 / 그래도 주변에서 말들이 많지 않나요? 저는 이제 풀 문제로 잔소리하면 짜증이 나는데.

원 / 풀 문제는 주변에서 이제 짜증내기 보다는 포기한 분위기죠.

세상에 없는 고추여, 세상에 없는 감자여 하고 말씀 하시는 것 보면

조금씩 인정도 하시는 거 같습니다.

집 사람은 금년에는 비닐을 사용하자고 하는데 뭐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나 / 그렇게 감당할 수 있는 농지 면적이 몇 평 인거 같습니까?

원 /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삼사백 평 정도죠.

나 / 관행농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원 /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 자식한데 주는 것도 약 하시더라고요. 자식한테 제일 귀한 거 주시잖아요.

유기농이 정답이라거나 유일하게 옳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각각의 농사에 대한 입장일 뿐입니다.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물론 경제가 일 순위고 이 순위는 이웃과의 갈등이다.

 

“특별하게 사람 관계로 불편한 일은 없었다. 원래 다를 거라 생각했다.

봉변을 당한 경우도 없었고 덕을 봐서 살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

 

 

 

 

 

그는 시골로 이사 온 첫 해 겨울에 산불방재 일을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약간 놀랐다. 겨울 농한기 산불방재 일은 신입생들에게 배당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 동네에서 그 일은 신의 직장에 해당한다.

그가 마을로부터 신뢰를 획득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 / 외모적으로 이질감이 없다는 장점도 있지 않았나?

원 / 뭐 처음에 마을 사람들이 기자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다소 의심하긴 했다.

나 / 그래도 사모님이 동안이시니 별 문제는 없겠죠.

원 / 그게 더 문젭니다. 딸이라고…

나 / 아… 부인께서 곤란하시겠습니다.

원 / 아뇨. 그 사람 뭐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이전에 일하던 곳에서 사람들이 ‘남편이 사진기자라 멋있겠다.’는 소리를 하니까

우리 마누라가 그랬데요.

- 응. 팔십오에 육십칠이야.

- 어머나 모델 몸매다.

- 아니. 앞에 숫자가 몸무게야.

대학교 신입생으로 들어가서 여자 애들이 저한테 말 건 게 9월입니다.

 

마을의 미래, 농촌의 미래에 대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을은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농업이라는 분야에 미래는 가능한가’ 라는

따위의 다소 무거운 이야기들이었다.

불행하거나 솔직하게도 그는 나와 다르지 않은 예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어르신들 세상 떠나고 나면 아무래도 농사는 대규모로 재편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열 사람이 짓던 농사를 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방법이 뭐겠습니까.

늦기 전에 어르신들의 철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이장댁은 꼭 2년치 종자를 남깁니다.

만약에 대비하는 것이 평생 몸에 배어 있습니다. 어차피 농사는 재생산입니다.

사람만 사는 일이 아니라 땅도 같이 사는 일입니다.

재생산이란 결국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깁니다.

왜 그 몬산톤가 카길인가 하는 회사에서 만든 라운드업 하고 라운드업 레디 있잖아요.”

 

라운드업(Roundup)과 라운드업 레디(Roundup ready). 희극이거나 비극적인 이야기다.

라운드업은 미국 몬산토社가 개발한 모든 잡초를 죽일 수 있는 제초제 이름이고 라운드업 레디는

그 제초제를 이길 수 있는 유전자변형 콩이다. 그러니까 독약과 해독제를 같이 팔아먹는 것이다.

심지어 라운드업 레디 계열 종자는 그 씨앗에서 나온 씨앗으로 재파종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씨앗이 자살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먹는 콩의 25% 정도는 라운드업 레디 콩이다.

 

“처음 파종할 때 나름 결의에 찬 표정이었습니다.

우리 종자로 파종하는 마지막 농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 속에서 나는 미래를 개척하는 무한대의 능력을 가진 영웅 보다는

어쩔 수 없이 산꼭대기로 큰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노가다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앞서 한 말, ‘인간이 잘 해서 잘 된 일은 별로 없습니다.’의 연장선을 보았다.

 

나 /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원 /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방식이 있을 겁니다.

천 평이건 한 평이건 모금이나 기금 방식으로 자금을 모집해서 땅을 사는 겁니다.

단, 앞으로 최소한 15년은 농사를 짓는다는 계약 하에 땅을 확보해야 합니다.

뭐 여기 산수대로 마지기 당 쌀 한 가마니나 32만 원 정도를 도지로 지불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농사지을 땅을 확보하고 외지 사람들이 땅을 구입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간혹 확인하는 일이지만, 미래가 암울하다는 전망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다가 올 미래를 지연시키려는 노력, 즉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서 저항한다. 그러나 장밋빛 미래를 전망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끊임없이 수행한다. 몬산토와 카길 같은 회사가 꿈꾸는 미래 세상의 농업은 장밋빛일 것이다.

 

나 / 꿈이 있습니까?

원 / 꿈이라… 농부로서 제 꿈은 토지개혁입니다.

나 / 헐! 그 토지개혁의 내용이 뭡니까?

원 / 경자유전입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따라서, 농지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도 정해지는 것이다.

원 기자는 대역죄를 꿈꾸고 있었다. 깊게 사귈 사람이 아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평탄한 삶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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