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물과 불

마을이장 2016.02.23 23:08 조회 수 : 1340

 

 


 

2월 20일부터 화개 작업장을 다시 가동하면서 겨울은 끝이 난 것 같다.

내가 오미동으로 가는 시간은 확 줄어들었다. 다시 분주한 일상이 시작되었고

자다가 일어났더니 모르는 벽지가 사방에 펼쳐진 약간 멍청한 상태가 며칠 나의 정신적 몰골이다.

원래 예정이라면, 월요일 대보름 날 낮 동안 나는 화개 작업장을 청소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손님들을 맞이했다. 성남의 한 가족과 수원의 변호사, 서울과 구례를 오가는 백수 기자.

그리고 예정에 없었던, 며칠 전 신문에서 2심도 무죄 확정된 남파 간첩 한 명. 얼라들 네 명.

나까지 영장류가 도합 열 명인가.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명태 집에서 찜과 탕으로 밥을 먹었다.

남파 간첩은 입맛이 까다로워서 중국집과 고기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식성으로 봐서는 간첩 질 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소주와 명태찜을 다소 많이 흡입한 남파 간첩은 난로 앞에서 잠이 들었고

남은 사람들은 두런두런 별 소용없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변호사와 기자가 뭔가 시작하려는 ‘작당’에 대해서 몇 마디 말을 보태었다.

결국 그 일들은 세상을 바꾸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고 나는 최근 한 달 동안

결국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내용의 60부작 미국 양아치 드라마를 탈고하는 중이었다.

일정하게 그들의 일에 개입해야 하는 입구에서 나의 의견은 점잖은 편이었다.

결국 산통을 깬 것은 변호사였다.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 일이 지속가능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저희는 그냥 갈 때까지 가고

뒤에 다른 누군가가 또 등장을 하겠죠. 이 일이 안정적이면 싸울 수 없다고 봅니다.”

 

그 말은 몇 개 월 전에 내가 그의 페이스북에 댓글로 남긴 말과 일치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난 다음 나는 지속가능성과 안정성에 대해 이야기 했고

그는 나에게 나의 말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싸울 수 있고 싸우려 하고 나는 멈추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각성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다소 차분한 정리 같은 것이었다.

'세상은 변할 수 있을까 없을까' 라는 화두를 언젠가부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따위 화두는 현실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술안주일 뿐이다.

남파 간첩은 오른편으로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잤다. 우편향이네.

항상 또는 자주, 사람 사는 곳 일은 오십 보 백 보라는 생각을 한다.

남이건 북이건 아프리카건 북극이건. 흑형이건 백형이건.

때로 발언 보다 경청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경험을 한다.

대화 중 성남의 김 선생 물음 아닌 물음에 답했다.

 

“녹색당으로 결정하면 내 결정에 대해서 변명할 필요가 없죠. 그게 편합니다.”

 

창밖으로 화개천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나는 다음 달 카드 결재를 걱정하고 있었다.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은 산을 넘지 못했다.

 

 

 

 

 


 

5시가 가까워질 무렵에 구례 상사마을로 올라섰다. 잠을 자는 마을이다.

나는 이제 세 곳에 걸쳐있다. 상사마을, 오미동, 화개. 나의 물리적 공간은 파편으로 흩어져 있고

지리멸렬한 나의 나침반 바늘은 종횡으로 돌고 있다. 지리멸렬이 꼭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단지 단어일 뿐이다. 때로 세상의 모든 단어는 도무지 적합하지 않다.

적합하지 않은데 몇 마디 말을 선택해서 입 밖으로 보내는 일은 늑대의 울음보다

스스로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형용사와 부사 못지않게 지나친 명사형 의미의 나열은 말이 길고 솔직하지 못하다.

여섯 시 좀 넘어서 달집에 불이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마을의 연장자들이 불을 붙였다.

그것은 예우다. 죽은 예우다. 사실 그들의 대부분은 일상으로는 비난받다가

이런 날 한 번 아무런 진정성 없는 예우를 받는다.

그것은 우리의 노년에 대한 예고이자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곧 깨어질 것이다.

죽은 예우가 당긴 불은 곧 대나무가 갈라지고 터지는 비명 소리로 불길로 치솟아 오르고

사람들은 불을 향해 무엇인가를 빈다.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단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달은 보이지 않았기에 뜨지 않은 것과 같았다. 마을사람들은 유난히 빨리 흩어졌다.

몇 조각의 수육을 씹었고 꺼지지 않는 불 앞에 몇몇 마을 동생들만 남아 있었다.

십 년이 지나도 그들은 계속 동생 노릇을 할 것이다.

새로운 주민은 공급될 것이나 새로운 동생들은 공급되지 않을 것이다.

사물패들은 늦도록 마을을 밟았다. 오후 한 시 삼십 분부터 두드렸다고 하니

그들은 진작부터 제 정신으로 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보름이면 항상 지금 마을의 정치지형이 나타난다.

출석자 보다 결석자의 안부가 더 많은 말을 남기기 마련이다.

자정 무렵에 마당에 섰는데 보름달이 밤하늘 중앙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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