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중년 남자는

풍광 좋은 곳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벽난로에 불도 피우고 그렇게 원고를 검토한다.

가디건을 입고 나오지 않았네.

없구나.

 

 

 

 

 

월간 <노력>. 녹취 순서를 재배열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아무래도 연대기 순으로 배치하는 것이 읽기 편하겠다는 판단이다.

몇 번을 읽는 중이다. 역시 나의 말이 개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판단을 확인한다.

뭐랄까, 이것은 ‘재미있게 읽게’ 하는 것이 목적인 글이 아니다. 단백하게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인 글이자 책이 되어야 한다.

 

내용이 스타일을 결정해야 한다.

- Ken Loach -

 

작명의 신선함으로 기획을 밀고 가려 했던 지난 시절이 불편했는데

켄 로치의 말을 본 순간 내가 왜 불편했는지 명확해졌다.

언젠가부터 장식, 디자인의 세련됨, 말장난이 싫어졌다.

당신들로부터 지명, 지지 받겠다는 욕망을 최소화 하거나 거세하면 가능할 것이다.

맨몸인 글.

한 분씩의 이야기가 한 권의 잡지로 엮어 나올 때 나의 말은 최소화 하고,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나올 때 나의 말을 좀 보탤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의 책에서는 구술자에 관한 관략한 정보만 내 손을 거치게 될 것이다.

전체 프로젝트에 관한 제목은 거의 정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월간 <노력老力>01

오미동 어르신들 약전(略傳) 모음 첫 번째 이야기

 

첫 구술자에 대한 소개 글은 대략 완료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최광두. 1939년 10월 1일 생으로 되어 있지만 같은 해 음력 6월 4일 생이다.

오양래. 1942년 3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는 1941년 음력 4월 17일이 태어난 날이다.

물론 두 분은 부부다. 이 기록은 두 어르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직접 구술한 것을 옮긴 것이다.

주로는 최광두 어르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할 것이고 중반 이후 청내댁 오양래 어르신의 이야기가

보태어 지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2016년 12월 22일 오후 2시경부터 5시경까지 우선 최광두 어르신의 말씀을 받아내었고 12월 23일도 같은 과정이었다.

말씀 중 결국 부부의 이야기를 모두 듣는 것이 옳겠다는 판단이 들어 12월 24일은 청내댁이 함께 자리했다.

이후 두어 차례 보충 인터뷰와 촬영이 있었다. 두 분 모두 구례에서 나고 자라 지금까지 살고 계시다.

두 분의 직업은 선택의 여지 없는 농부이자 부모, 그리고 자식이었다.

2017년 1월 말 현재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살고 계시고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주소지 변동은 없을 것이다.

 

가급이면 두 분이 구술하신 ‘말씀 그대로’ 전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문장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읽는 이의 이해와 편의,

말씀 하신 이의 본뜻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편집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나름으로 최소화 했다.

사투리는 소리 나는 그대로 전달할 것이며 이해를 돕기 위해 사투리와 지명, 용어, 사건에 대한 설명이 보태어 질 것이다.

말씀 순서는 정해 놓은 편집 원칙에 따라 가급이면 시간 순 전개로 재배열하였다.

이야기 전개와 내용 보충, 이야기 전환을 위해 간혹 인터뷰어(interviewer)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등장을 최소화하였다. 말씀 대목 대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제목 형식의 단락 구분을 하였다.

또한 자주 등장하는 사투리와 용어는 간략 사전 형식으로 책머리에 달아 두었다. 또한 한 자연부락에서

거의 평생을 사셨기에, 오미동 마을지도를 일종의 ‘스토리맵’ 으로 보실 수 있도록 펼침면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최광두·오양래 어르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전한다.

 

대략 이런 식의 머리말을 준비해 두었다. 이후로는 모두 구술 원고가 전개될 것이다.

 

 

 

 

 

1월 13일. 화개천에 눈발이 흩날렸다. 화개는 눈이 드문 곳이다.

바람도 몹시 심하게 불었기에 <호모루덴스>에 손님은 드물었다.

작업하기 좋고 커피가 적당한 날이다. 다시 녹취 원고를 검토한다.

할아버님 별세하시고 기억을 말씀 하신다.

 

우리 할아버지는 삼일장을 했을 거이여. 왜 그걸 아냐믄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디

그, 저 곡성어르신이라는 분이 계세. 긍께 인자 양복점을 댕기셌어. 근디 우리집에가 그 책이 있었는디

그 책이 없어져버렸는데 제복을 만드는 설계도 책이 있었어.

내가 어려서 보니까 그 책을 노코 그 어른신이 오셔가꼬 아랫방서 그 제복을 전부 베더마.

제복이란 거이 머냐믄, "죄를 지었다" 그래가꼬 너두래기 옷이라. 말하자믄 덜렁덜렁 해가꼬

상주가 입고 댕기는 옷인데 그놈을 입고 피래이라고 쓰고 우리 아버지가 장에 까지 다니시고

읍에 다니시고 그걸 봤는디 꼭 그건 삼베로만 해. 진짜 삼베로. 그때만 해도.

지금은 가짜가 있단디.

 

원고 앞에서 고민은 계속된다. ‘거이여’라 표기할 것인지 ‘꺼이여’라 표기할 것인지.

돌아가셨는디’, ‘있었는디’ 등의 ‘’로 끝나는 말씀은 어떤 대목에서는 ‘’로 말씀하시기도 한다.

이런 경우 일률적으로 하나로 정할 것인지, 원래 말씀 그대로 ‘디’와 ‘데’를 혼용할 것인지.

제복’이란 일까? 아니면  ‘죄복’으로 바로 표기하는일까? 나의 고민은 소리와 글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이런 대목은 중요하다. 세월이 흘러 이 또한 ‘전라도 말’의 자료이거나 근거가 될 수 있기에 그렇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다. 가락으로 경험으로 그 말씀의 ‘맛’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녹취를 반복해서 듣고 내가 풀어 쓴 원고와 대조하다보면 그 동안 내가 문장으로 옮긴

사투리 표현이 ‘나의 귀’라는 관념이 만들어 낸 산물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말이 끝나기 전에 나의 대뇌는 미리 짐작을 해버리고 타이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듣고 다시 고쳐 쓰는 일이 요즘의 일상이다. 이 일에 나로서는 예외적으로

마감을 정하지 않고 있다. 물론 한 권에 한 달이라는 목표는 있지만 말씀에 닿지 못하는 글을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쩌면 '월간' 이라는 말을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1호, 2호, 3호...

 

시방 정희채 선생님이, 한 스무 살이나 묵었는가 스물한 살이나 묵었는가,

그때 나이는 잘 몰라. 근디 어머이한테 호소를 하시더라고. 가시면서 얘기가

“사람이 살다 보믄 국민학교 졸업장도 필요할 때가 있어요.

제가 내일 광두를 손잡고 올 걸로 알고 갑니다이.”

하니께 “안돼” 엄니가 그러시더라고. 그런디 그 이튿날

“광두야 학교 가자” 하고 책보를 챙기가꼬 어머이가 가자고 그래.

 

‘스무 살’로 표기했지만 ‘시무 살’ 이라고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라도 말은 도치법이 난무한다. “안 그래”가 아니라 “그라녀 안”이다.

제가 내일 광두를 손잡고 라는 대목은 결국 말이 되도록 손을 볼 수밖에 없는 경우다.

“내일 광두 손잡고 오실 것으로 믿습니다.”라는 의미를 어르신의 말맛을 살려 어찌 가공을 해야 좋을까.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살다 보믄 국민학교 졸업장도 필요할 때가 있어요”라는

정희채 선생님의 말씀과 “광두야 학교 가자” 라는 어머님 말씀 사이에 존재했던

열대여섯 시간이 아리게 들어선다. 한 여인은 입술이 타 들어가는 갈등을 했을 것이다.

마른 침을 삼키는데 가슴이 시큰거렸을 것이다. 어둑한 아궁이 앞에 앉은 여인의 얼굴은

더욱 더 바싹 타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확인하지 못했으나 죽은 남편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새벽이 되어서 자식의 책보를 챙겼을 것이다.

 

 

 

 

 

청내댁의 말씀은 풀어내기가 조금 더 힘들다. 말씀 중에 호흡이 빨라지고 그녀의 눈은

한달음에 이미 칠십 년 전 그날로 돌아가 있기 때문에 문장은 마침표 없이 이어진다.

 

그때만 해도 나무를 해서 팔았어요. 산에 가서 나무 해 가꼬.

글면 내가 인자 그때가 열댓 살 열서너 살이나 묵으쓰까… 그때 인자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이.

삼동에 눈이 막 와 가꼬 있는데도 청솔깽이를 가서 해 오고 그라나믄 가리를 해 가꼬 와.

옆에 인자 엄마를 가믄 따라 가 인자. 추우믄 기냥 솔깽이만 해가꼬 이고 오고 그라녀믄

가리를 해 가꼬 인자 이케 묶어가꼬 이고 와 가꼬 그놈을 이를테면 다섯 장을 그놈을 모타가고 인자이.

그래가꼬 그놈을 동을 요러케 묶어가지고 장에로 가지가 팔아.

지고 가서 팔안디 우리는 이고 가야 되잖아요. 누가 갈 사람이 없슨께.

그래가꼬 인자 두 개를 만들어. 한 장 대목에 두 개를 만들어 가꼬 한나 저만치 여다

냉처이 있는데 요마치 여다 노코 또 집이 와서 한나 이고 가고 냉철리 있는디서 번대짐이라.

또 한나 저마치 장에 갔다 노코 또 냉천이 와서 그놈 이고 가고 또 쬐깐한 거이 이고

그때는 장갑이 있어 뭐 있어. 손은 벌어져 가꼬 피는 찍찍나지.

 

명백히 ‘아이’인 여자가 산에서 나무를 해서 구례 장날이면 머리에 이고 장으로 팔러 가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경우 조사와 어미가 어긋나고 묘하게도 그 어긋남이 말맛을 이루기도 하는데

글로 옮기면 그냥 ‘틀린 문장’이다. 이런 경우 서울 사는 편집자에게 교정교열을 맡길 수 없다.

냉천리 ‘냉처이’, ‘냉철리’, ‘냉천이’ 발음되고 이 역시 하나로 정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나누어서 옮기는 짐을 ‘번대짐’ 이라고 표현하는 모양이다. 이 역시 구례 사람에게 물어서 확인했다.

어르신에게는 가급이면 되묻지 않는다.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 기색을 느끼면 말씀이 위축된다.

’이 어원일 수도 있겠다. 뻔데기짐이라고도 한다. 이런 식으로 곳곳에 해석을 필요로 하는

표현들이 잠복해 있다. 말씀에 개입할 수 없다는 생각은 이미 말했고, 각주가 아닌 펼침면

방식의 페이지 구성으로 본문은 왼쪽, 해설판은 같은 눈높이의 오른편으로 배치하는 방안이

현재로서는 유력하다. 물론 여백이 남을 것이나 사진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편집을 하면 페이지가 증가할 것이다. 제작비가 올라간다. 그래도 읽기 편한 쪽으로

구성을 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만지다가 책의 꼴을 생각하다가…

무엇보다 최종 검열이 남아 있다. 그렇다.

 

 

 

 

 

작업자들 표현으로 <표4>, 뒷표지는 계속 같은 내용이 인쇄될 것이다.

이 역시 좀 이르지만 작성해 두었다.

 

마을이 있다.

조선 제일의 명당자리라는 금환락지(金環落地) 마을인 그곳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五美里)이고 마을 사람들은 오미동이라 부른다.

이 잡지, 월간 <노력老力>은 그곳에 살고 계신 어르신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구술 그대로 옮겨 놓은 책이다.

 

이 책은 어느 한 사람의 선과 악을 평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느 한 사람의 옳고 그름을 가름하지 않는다.

이 책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한 사람의 구술을 통해 평생 육신이 감당해 온 기억을 온전히 기록하는 일이다.

언어는 기억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효과적인 도구다.

기억은 육신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버팀목, 의지를 이루는 첫 숨[숨ː]이다.

 

현재 속도로 봐서 월간 <노력> 첫 호는 2월 첫 주에 인쇄를 넘길 것 같다.

 

 

 

 

 

 

jirisan@jiri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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