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단풍본색丹楓本色 - 피아골 1

마을이장 2007.11.06 23:26 조회 수 : 7991 추천:434



일반적으로 지리산 산행은 가을이 최고라고들 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지리산의 대표 이미지는 아련하게 이어지는 산능선인데
그 광경을 보기가 쉽지 않다. 가을은 가시거리가 가장 좋다.
둘째, 지리산의 트레이드마크는 애국가에서나 보았던 운해雲海인데
가을은 운해가 자주 발생한다.
셋째, 달력 사진 같은 단풍이다.

10월 31일 수요일이 되어서야 단풍을 주목적으로 한 산행에 나섰다.
지리산에서 단풍이라면 피아골을 최고로 본다. 사람에 따라 뱀사골이 더 장하다는
경우도 있다. 피아골이건 뱀사골이건 이장은 절정의 단풍을 본 적이 없다.
단풍 여행은 이상하게 관광버스 아이템 같다는 선입견이 좀 있었고
무엇보다 대한민국에서 '한 단풍' 한다는 곳의 절정기에 방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일요일 뉴스에 '내장산에 불이 났습니다. 단풍이 절정입니다.'는 해마다 반복되는
앵커의 소리를 들은 이후에는 이미 절정은 지나간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이장은 관광버스를 타야 할 나이가 되었고
비교적 절정의 시기에 관한 정보 입수에 유리한 조건에 스스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2007년 올해는 예상을 깨고 먼 산의 단풍이 확연하다.
역시 하늘이 하는 일을 함부로 예측하거나 발설할 것은 못된다.
남은 문제는 출발 시점과 일정이다.
집의 컴퓨터가 문제였다. 병이 심해서 서울로 보냈다. 뇌도 갈아 끼우고 심장도 거시기하고
여튼 대수술이다.  퇴원하고 집으로 도착하는 시점이 화요일이었다.
2박 3일 종주를 계획했지만 이러면 적절치 않다. 그렇다면 반선마을에서
뱀사골을 타고 넘어 임걸령 지나 피아골 삼거리에서 피아골 계곡을 보고 내려오는 좀 무리한
당일 단풍역주 또는 뱀사골을 올라 연하천으로 우회전해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피아골로
내려오는 '단풍완전정복' 1박 코스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마땅하지 못한 다른 일정들이 있었다.
그래 결정한 것이 성삼재까지 버스로 오르고 노고단을 지나 임걸령으로 이동하다가
피이골 삼거리에서 피아골 대피소를 바라고 내려와 직전마을에서 돌아오는 버스를 타는
대략 11~12km 구간으로 결정했다.
지리산 아래에 살아도 일정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것이 역시 사람살이다.
사발면 두 개 넣고 오징어 한 마리 굽고 쵸코바 두 개 챙겨 넣고 물 각 이 병 챙겨 두고
잠을 청했다. 날씨는 맑다고 했고...









오늘의 산행 코스다.
성삼재휴게소에서 노고단대피소까지 대략 2.3km, 대피소에서 피아골 삼거리까지
대략 2.8km, 피아골대피소까지 대략 2km, 직전마을까지 4km 정도의 이동 구간이다.
오늘의 산행 코스와 다르게 임걸령에서 용수암 방면으로 오르내리는 길이 있고
삼도봉에서 용수암으로 오르내리는 코스가 있다고 한다. 이 중 제일은 삼도봉에서
용수암을 통하는 길인데 요즘은 산행 금지 구역이다.
내년에는 기회가 된다면 저 코스로 산행을 했으면 한다.
2년 전에 오늘의 코스로 초행길을 경험했는데 내리막의 정도가 엄청 심했다.
그때 아주 드물었지만 피아골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큰 배낭의 사람들 얼굴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 길을 절대 올라오지는 않으리' 라고 다짐했다.
여튼 피아골삼거리 해발 1,300m 단위에서 피아골 대피소 850m 까지의 내리막 경사는
상당히 급하다. 단단히 긴장하는 것이 좋다. 단풍에 취해 한 발 잘 못 내밀면
심하게 빨리 내려갈 수도 있다. 굴러서.









구례터미널에서 성삼재행 두번째 버스를 탔다.
첫차는 새벽 4시, 두번째는 6시, 세번째는 8시 20분이다. 간혹 시간이 변경된다.
미리 전화하고 확인하는 것이 좋다. 061-780-2731 이 구례터미널이다.
6시도 어둡다. 4시 버스를 피한 이유이기도 하다. 종주 산행의 긴 거리도 아닌데,
더구나 오늘은 단풍 촬영이 주요한 미션이니 햇볕이 풍부할 때 계곡을 내려오는 것이 좋다.
단풍철이라 그런지 버스 안에는 제법 십수명의 산객들이 타고 있었다.
성삼재에 내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노고단대피소로 걸음을 재촉했다.
무냉기 전망대에서 지난 밤 잠을 청했던 이부자리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안개가 심한 기간인데 이 날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어스름하지만 화엄사 계곡 쪽으로 단풍이 작년 보다는 장한 기미를 느낄 수 있다.









노고단 KBS중계탑 방면으로는 이미 겨울산이다.
1,400m 이상에서는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은 나라지만 지리산은 역시 가장 큰 산이라
이런 시기에는 겨울부터 늦은 여름까지를 느낄 수 있다.
가세, 어여 가세.









노고단 대피소는 지난 여름 끝자락부터 공사중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네. 외장을 목재로 대신하고 층을 높이고 있다.
원래 옆에 있었던 별도의 건물을 철거한 것으로 보아 내부에 일종의 '가족실' 같은
작은 공간을 몇 개 만드는 것 같다. 보다 더 편하게 쉬라는 말이겠지.
글쎄...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그런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두고봐야 알겠다.
물론 아직 확인된 구조가 아니니 미리 시비를 걸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장의 발언 뉘앙스에 뭔가 까칠한 구석이 있는 것은 걱정스러운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산장' 이란 표현과 '대피소'란 표현을 나도 혼용하는데 가능하면 의식적으로 '대피소'라고
표기하려고 한다. 뭔가 긴급해 보이고 임시 방편적이고 그렇게 편안한 공간은 아닐 듯 하지 않은가?
산에서 머물 때에는 그것이 옳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산장' 이라는 말 속에는 은연중에 따뜻하고 편안할 것 같은 선입견이 존재한다.
장터목대피소까지 전기를 끌어 올리는 이야기가 진행된 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뭔가? 전기가 들어오면 '편리'가 가능해진다. 물론 지금도 발전기로 전기를
가동하지만 풍부하지 않기에 최소한이고 무엇보다 산 아래에서부터 연결 될 전깃줄이
산 중을 관통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영역이 확장된다.
간혹 지리산을 찾거나 처음 지리산 종주에 나선 사람들 중 일부는 '대피소'의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지리산의 대피소들은 여러분들의 안방도 아니고 호텔은
더더욱 아니다. 나도 하루 종일 산행 끝에 도착한 '산장'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싶다.
뜨끈한 온돌에서 몸을 풀고 취사실에서 물도 펑펑 사용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친환경 시설과 비용, 그에 비례하는 산의 파괴를 생각해 보라.
노고단대피소가 더 세련되고(그놈에 유럽풍으루다가 사진 찍을 수 있는) 더 편리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될 것이고 더 많은 편리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산에 와서 도시에서의 편리를 구하지 말자.
그래서 대피소다.










출발 전에 확인한 '내일의 날씨'에서 비올 확률은 0%였다.
버너에 불 켜고 사발면 먹을 물 끓이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취사장도 공사중이라 노천에서 식사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라면이 문제가 아니라 느닷없는 비는 단풍 촬영을 하지 말라는 소리다.
조금씩 내리니 일단은 문제가 없는데 계속 온다면 사발면 한 그릇 먹고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내공은 안되니 손바닥을 냄비 두껑으로 활용하고 있는 이장의 무공.
그냥 가리고 있는 듯 하지만 빗물에 주화입마 당할 수도 있는 끓는 물 위로 장풍막을 형성하고
있는 장면이다. 코펠 사까... 뭐하게.









공사 중인 취사장 처마 끝에 쭈그리고 앉아 라면을 먹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이러다 정말 내려가는거 아냐? 뒤숭숭하다. 그 와중에도 취사장 주변
풍경은 각양각색이다. 거의 백 년만에 석유버너로 밥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알콜로 가열해서 그 '뽐뿌질' 하는 버너 있지 않나. 연방 검은 연기가 자욱해진다.
고산에서 그런 버너 불 붙이기는 여간해서는 힘들다. 인도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자와
한국 사람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당도했는데 이 팀은, 그 표기를 뭐라고 해야하나? 여하튼
부스타라고 흔히 부르는 가정집에서 밥상에 올리는 부탄가스 버너를 들고 왔다.
뭐 남들은 나의 양은냄비를 보고 뭐라 그러겠지만...

노고단대피소 안에서 밖의 비를 보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기 20여분.
비는 멈출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능선이 멀리까지 펼쳐진다.
이건 뭐냐? 뭔 예상치 못한 비 끝에 능선의 장관이라니.









대피소 옆으로 나 있는 계단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빨리 오르려 하지만
KBS 중계탑 방면으로 둘러가는 길을 권한다. 늦은 여름이면 토종 원추리 군락지를
볼 수 있고 그곳의 전망이 탁월하다. 하지만 그쪽으로 둘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KBS쪽 전망대에서 문수계곡 쪽으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비는 그치고 구름이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비 온 뒤의 계곡은 막 세수를 끝 낸 여인네 같은
맑은 자태를 나타내었다. 초반전인데 비로 인해 단풍을 찍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셔터를 계속 눌렀다.









천천히 노고단 쪽으로 이동했다. 능선을 조망하는 이 순간을 뒷걸음으로 최대한 즐겼다.
가시거리와 색깔 모두 좋았다. 무엇보다 이 길은 지름길인 계단길로 99%의 사람들이 올라간
관계로 아무도 없다. 우스운 노릇이다. 지리산을 사랑해 달라고 이런 글을 작성하면서
정작 사람 없는 지리산을 즐긴다는 것은 모순이긴 하다.









일전에 올랐던 만복대와 운봉 방면으로도 능선은 펼쳐진다.
시커먼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면 심원계곡과 달궁계곡으로 이어질 것이다.
정령치를 이야기하면서 달궁을 잠시 언급했지만 심원과 달궁을 따로 한 편 다루어야 할 것이다.









가까이 반야봉의 볼륨감 있는 모습이 다가온다.
반야봉은 봉우리가 살짝 쪼개져서 둘로 나뉘는데 옛 사람들은 그 모습을 여성의 엉덩이
모습같다고 묘사했다. 아닌게 아니라 반야봉은 지리산의 어떤 봉우리보다 살집이 풍만하다.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를 조짐이 보이니 일단 시선을 이동하자.
멀리 하얀 구름 연못 위로 솟아 있는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대략 바라보는 위치에서 25km.
날씨는 흐린데 시계는 좋다. 이렇게 천왕봉까지 바로 뚫혀서 보이는 것이 쉽지는 않다.
반야봉 정상부는 겨울산이고 사진의 앞 부분은 단풍이다.









아침 노고단도 녹색은 모두 사라졌다.
11월이면 이곳 정상부에는 눈이 내릴 것이다. 그러면 다음 해 4월 초 까지는 눈밭이 될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노고단 북서사면의 순탄한 숲 속 길을 이동하는 것이다









순탄한 초입 길을 걷다보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걸어 둔 이런 사인물을 자주
볼 수 있다. 94년인가 방사시킨 '천왕'이 같은 경우에는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로
연명해서 42개의 이빨 중 19개가 썩었고 지금은 화엄사 입구의 '종복원센터'에 살고 있다.
자연 방사 실패 케이스다. 반달곰은 1급 멸종위기종이다. 천연기념물인 것은 물론이다.
지리산에 반달곰과 사람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면 한마디로 '그림되는' 신종 이상향의 모습일 것이다.
2002년 이후 방사한 반달곰은 24마리. 앞으로도 계속된다. 아마도 될 때까지 할 모양이다.
그 될때 까지의 기준은? 지리산에 50여 마리의 반달곰이 서식한다면 근친을 피해서
자연교배 상태로 번식 가능한 최저 개체수가 된다. 그때가 그때다.
반달곰 문제 역시 다음에 '심각하게' 다룰 것이다.
여튼 반달곰이 귀엽다고 생각하시면 큰일난다. 최근 종복원센터의 선전물 때문에 파일을
살펴 본 적이 있는데 곰을 아주 무섭게 형상화했다. 사람들이 곰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더더욱 그렇게 제작했다고 한다. 실제 위험하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아니다.
눈 앞에서 장년 반달곰을 보면 위압감이 느껴진다. 곰이라는 캐릭터가 아이들에게
친숙해서 그런 듯 하고, 반달곰은 몸집이 작다는 선입견 때문인 듯 한데 실제 마주보면
그렇지 않다. 산행에서 곰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지리산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곰을 만나다면' 이라는 선전물을 한번은 읽고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산사람들 사이에는 조만간 곰으로 인한 인명 사고가 날 것이란
예상이 거의 확정적이다. 반달곰 정책이나 지리산을 알려서 전국민의 산으로 만드는
일은 모두 같은 기관이 하는 일이다. 물론 지리산권역 다섯 개 군,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이
연관을 맺고 있지만 주요한 정책 입안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다.
지리산으로 많은 사람을 불러 들이는 홍보책과 반달곰을 보호하는 일이 과연 일맥상통할 수 있을까?
등산로를 자꾸 차단시켜 나가고 출입통제 팻말만 늘여 간다고 곰을 보호할 수 있을까?
가장 일차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곰은 왜 키우는 것일까?









노고단 북서사면 숲 길을 30분 정도 지나면 오른편으로 탁 터인 전망이 나타난다.
돼지령의 초입이다. 산의 생김과 이름은 무관하다. 고개 정상에 큰 콧구멍이 두 개 있지는 않다.
멧돼지들이 원추리 뿌리를 파 먹기 위해 자주 출몰해서 붙은 이름이다.
혹시 탁 터인 전망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날씨가 좋지 않은 것이다. -,.-
오른편 아래로 피아골 계곡이 펼쳐진다.









별 힘들이지 않고 2km를 전진했다. 돼지령 구간은 평탄하게 전개된다.
임걸령 입구에서 좀 가파른 두어번의 코스가 등장하지만 오늘은 그곳까지
도달하기 전에 우회전 할 것이다. 지리산 첫 종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시작은 대부분은 구례 방면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바라보고 가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최고봉을 밟고 내려오면 뭐랄까 감흥이 떨어지기도 할 것이고,
산은 오를 때와 내려 올 때 같은 구간이라도 표정이 다르다.
노고단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도 그것이 시각적으로나 순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이다.









피아골 계곡에서 올라오는 구름의 양이 점점 많아진다.
제법 운해 모양을 갖출 태세다. 하늘은 여전히 높은 층까지 흐리다.
지금 이 순간은 운해의 형성과 그 사이로 울긋한 단풍 계곡을 조망하기 최적이지만
여튼 오늘은 햇볕이 나야 한다. 피아골 계곡에서 짐승 소리가 들린다.
고오옴~ 어떤 짐승일까? 정말 궁금하다.









평탄한 오르막이라 돼지평전이라고 하지만 돼지령은 해발 1424m이다.
바라보자면 오른편 능선이 왕시루봉 능선에 해당한다. 역시 지금은 입산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곳 돼지평전에서 물을 충전할 수 있다. 겨울, 이곳에서 습기 없는 눈 바람 속에 쓰러진 저 풀들의
모습이 참 절대적으로 고독해 보였다. 먼 하늘이 조금씩 벗겨질 조짐이 보인다.
구례읍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지금 산의 모습은
도무지 사진이 될 성 싶지 않다고.









곧 내려가야 할 계곡을 바라본다. 구름은 그 경사로를 숨기면서 차 올라올 태세다.









운해雲海 구름바다.
지리산을 찾아 온다면 그 장관이라는 운해를 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몇 번 운해를 만나고 보니 운해도 등급이 있다.
이것은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취향에 따라 기준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또 '일반적으로' 라는 무책임한 잣대를 적용하자면 이렇다.
보기 힘든 운해 장면 순으로 등급을 나누었다고 생각하면 합당할 것이다.

A등급 2005년 상황은 정말 만나기 힘든 경우다. 운해 층이 단층이 아닌 복층으로 형성된다.
9월 중순이었다. 성삼재휴게소 직원들까지 뭔 난리가 난 표정으로 나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드문 광경' 이라고 입증해 주었다. 아마 개인사에서 평생에 다시 보기 힘든 운해일 것이다.
왜 雲海인지 실감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정말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바다였다. 소리가 없는 默音의 바다였다. 그것이 신비로움의 핵심이었다.

B등급 2006년 상황은 반야봉에서 8월에 맞이했다.
전형적인 맑은 하늘이었고 노루목에서 치고 올라가는데 어느 순간 뒤 돌아보니 구름바다였다.
지형과 높이에서 1,700m 에서 만나는 운해는 다른 맛이었다. 아주 단순하게 내가 지금
높이 올라와 있다는 지리적 정보를 확연하게 전달해 주었다.

C등급 이날 산행에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운해의 형태다. 산안개와 구름이 합세해서
계곡에서부터 능선으로 올라오면서 소멸되는 모습이다. 한 여름에 주능선 종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등급은 없다. 취향이 있을 뿐이고 그날의 분위기가 있을 뿐이다.
모두가 감사한 자연의 선물이다. 우리나라 산의 고마움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자신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으로 '베푼다'.









피아골 삼거리가 목전이다.









피아골 삼거리에 도착하면 우선 안내 지도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안내판에서 바로 우회전해서 전혀 다른 산의 세계로 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아골 대피소까지의 한 시간은 급경사 하산길이다.
이제까지는 능선과 운해를 조망할 수 있었던 완벽한 하늘 조건이었다.
잠시 고민을 했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빛이 보이지 않는다.
빛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피아골 길은 그냥 하산하는 의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산행의 목적은 단풍 아닌가. 주제를 바꿀까... 반야봉으로 선회하면 현재 조건에서는
보다 높은 전망에서 운해 사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정에 없이 산행이
빡빡해진다. 반야봉이 목표점이었다면 좀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고 차도 가지고 올라왔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환상적이었다. 오늘 나의 운은 피아골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햇볕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지금' 하늘 상황은 아니었지만 예정한 그대로 피아골로 방향을 잡았다.
안되면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늘 허잔대로 혀야지.'









바로 철계단길이 나타난다. 보이는 그대로의 경사도다.









몇 개의 철계단과 나무계단을 내려서면서 계속 멀리 하늘을 응시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운해가 아닌 햇살이다.









500m 정도 내려왔을까? 나무의자에서 앉아 쉬면서 오징어 다리를 씹고 있었다.
나뭇잎에 햇볕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1,200m 단위까지는 단풍은 없었다.
1,100m 단위 이하에서부터 단풍은 시작되고 있었고 우리는 그 목전에 있었다.









피아골대피소에 당도하기 전에 해는 나와야 한다.









이날 산행의 날씨 전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구간별로 최상의 그림을 연출한 것은 정말 우연일까.
남쪽에서부터 하늘은 열리고 있었다. 그것도 전면적으로 열린다면 지나친 노출로
사진이 하얗게 날아갈 공산이 높은데 적당한 빛으로 열리고 있었다.









숲은 오래 되었다.
곳곳에 쓰러진 나무와 늙어 죽은 나무들, 이미 많이 쌓인 낙엽들,
그 향기들, 바스락 거리는 발 밑의 소리들...









단풍丹楓이 뭔가.
나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시각적 결과물이다.
기온이 내려가고 공기가 건조해지면 나무는 당연히 수분 부족 현상을 겪게 된다.
이를테면 왕성한 광합성 활동을 할 수 있는 에너지의 한 축인 물 부족 현상이다.
초록으로 상징되는 광합성 활동은 급격하게 억제되고 엽록소는 분해된다.
나무잎의 색이 붉게, 노랗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왕성했던 녹색활동을
억제하고 생존을 위해 본색本色을 드러낸다. 색의 변화가 아닌 숨겨두었던 본색.
공급되던 영양분은 차단되고 나무는 스스로 잎을 떨어뜨린다. 낙옆이다.
떨어진 잎은 스스로의 영양소로 재공급된다. 생존전략이다.
사람은 그 과정을 즐긴다.
이를두고 나무의 고통을 즐긴다고 못마땅해 하는 입장도 있는 모양이다.
나무는 원래 그러한데 사람은 제 각각 생각이 다르다.
여튼 골치 아픈 종족이다.









인터넷을 통해 소개하는 용도의 사진이 99%이니 개인적으로
세로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날 숲을 내려오면서 나는
유난히도 세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무들은 마치 침엽수처럼 쭉쭉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모습이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가느다란데도 키가 크다.
피아골은 좌우로 깊게 파인 협곡이다. 햇볕의 양이 짧고 강할 수밖에 없다.
나무들은 더 많은 햇볕을 쪼이기 위해 경쟁하듯 위로 위로 향한다.
그늘은 짙고 그 사이로 햇살은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로스 로리엔Loss Lorien의
숲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하지만 요정의 숲을 거니는 느낌을 오래 지속하기는
힘들었다. 이장은 키가 짧다. 그래서 피아골이다.









'원시림 피아골' 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수종이 다양하지만 침엽수는 거의 보이질 않는다.
자연스러운 자연 선택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인재人災다.
일제시대부터의 도벌과 전쟁의 결과이다. 활엽수의 전성기다.
그래서 피아골의 단풍은 유난할 수밖에 없다.
세석평전의 모습도 전쟁의 결과물이지 자연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Ennyn Durin Aran Moria , Pedo 2jang a minno
Im Narvi hain Echant , Celebrimbor o Eregion Teithant i thiw hin.

요정의 언어지만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모리아의 군주 두린의 문, 이장, 말하고 들어가라.
나 나르비가 만들고 에레기온의 켈레브림보르가 그리다."

이 때 Pedo 2jang a minno 는 영어로 하면 Speak 2jang and Enter. 라는 뜻인데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한 중의적인 문장이다.

"이장이여, 말하고 들어가라."
"이장이라고 말하고 들어가라"









이 숲은 특별하다.
이제까지 걸었던 숲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온함이 있다.
내년에 다시 온다고 해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순간이 시작이자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이 느낌과 절묘한 빛의 조화는 아주 각별한 인연이란
가슴 시린 처연한 통증까지 전해졌다.









피아골대피소에 이르기까지 딱 절반이다.
여전히 해발 1,000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계곡의 정상에서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좀 더 내려가면
단풍의 본색은 더 짙어질 것이고 어쩌면 그 화사함을 대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의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자연스러움'에의 경외심을
삭감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냥 이 자리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계곡을 내려 올 때 어느 누구도
없었고, 따라서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는' 경고도 없었다.
그런데 안내판의 피아골대피소 아이콘 속의 사람은 왜 인질 자세인가?









나에겐 아들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결혼 전 숫컷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내 새끼를 낳고 보니 주변에서 의아해 할 정도로 나는 모성에 육박할 만한
부성의 소유자였다. 그것은 고통에 가까운 애정이었다.









왜 아이를 더 가지지 않느냐는 질문을 간혹 받는다.
나의 대답은 항상 하나였다.

"그런 인연을 또 맺고 싶지 않다."









숲에서.
나는 같은 생각을 했다.
다시는 가을에 이 숲을 서성이지 않겠다.









이런 경험은 일생에 단 한번으로 족하다.









다른 시간,
지리산의 다른 곳에서
다른 인연을 맺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와 장소를 나는 알지 못한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 아닌가.









숲에서의 들뜬 시간 동안 쉼 없이 셔터를 누르고
느끼고 걷고 하면서 다시 500m를 내려왔다.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마음은 지나 온 길 위에 머물고 있어
몸은 마음을 기다려야했다.
물 소리가 들린다.









불로교不老橋.
이제 사람 흔적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용수암 삼거리가 지척이다.
그곳에서 길은 다시 갈라질 것이다.









다리 중간에서 아래 위로 계곡을 바라보았다.
이제 피아골 이야기는 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
무아지경의 선계仙界를 벗어나 사람과 역사 속으로 진입한다.

'단풍본색丹楓本色 - 피아골 2'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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