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운조루와 오미동 이야기-3

마을이장 2007.10.12 18:02 조회 수 : 7774 추천:759






이 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뷰포인트다. 타인능해 뒤주를 지나 안채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다. 뭔가의 사이로 보이는 것들은 대략 아름다운 듯하다.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고 가려진, 앞으로 전개될 모습에 대한 기대감이 더해져서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안채가 시작된다. 여인네들이 머물던 공간 아닌가. 2층은 한옥에서, 특히 가정집에서는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안채로 들어서니 일전의 일이 생각난다.
텃밭에서 일할 때 지나가던 트럭에서 아저씨가 고개를 내밀고 한 말씀 던진다.

"텃밭에서 일하면 고추 떨어질 터인디."

보아하니 고추 쓸 일도 없을 것 같은 연세의 양반이었는데 잠시 텃밭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
요즘이야 남자가 밥하는 것이 예사롭고 당연하고, 또는 필수항목이기도 하지만 내 어머니만 해도
내가 부엌에 머물고 있는 것을 마땅찮아하신다. 여하튼 이 공간은 여인네와 아이들의 공간이었고
그런 공간은 그 집안에서 가장 아늑한 느낌을 준다.









안채 맞은편으로 곳간이 있다. 고방(庫房)이라고 불렀다. 안주인 권력의 상징적인 공간 아닌가.
곳간 열쇠 전달을 통해 한 여인에서 다른 여인으로 집안의 권력은 이양되었다. 요즘으로 보자면
통장과 주식, CD를 넘기는 의미지만 살림의 맛은 역시 시각적인 것이라 PVC카드와 비밀번호만 알면
권력을 이양 받는 시스템은 역시 문학적인 맛은 떨어진다.
물론 현실에서 문학은 역시 '밥 먹여 주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칸칸이 물품이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곡식 곳간, 육 곳간 등등 정말 눈에 보이는 딱 그만큼 풍성했을 것이다.









곳간에서 안주인이 머물던 곳을 바라본다. 사랑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처음엔 안주인이 사용하는 작은 대문이 동북 방향으로 있었다고 한다.
궁궐은 아니니 바깥바람 구경도 못할 일은 없었겠지만 이 작은 안마당에서 꽃을 가꾸고 계절을
실감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붙박이로 사는 토박이들은 사는 동네 밖을 모른다.
배추모종 사러 동지들 데리고 문척 육묘장 가는데 이 엄니들이 문척교(섬진강가의 다리 중 하나)를
처음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차로 5분 거리다. 또 내 밭고랑 만드는 것 도와주신 아주머니들께
냉장고의 시원한 물 한 그릇 대접하면서 “당물샘 물이요” 했더니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차로 3분 거리에 있다.
그래 어쩌면 이곳의 대부분의 여인들은 쌍계사의 벚꽃과 다압마을의 매화 길과 월계마을의 산수유 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서울서 시간과 돈을 내어 여기까지 내려와서 산행하고 구경하고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참 허탈하기도 한 사실이다.
지리산? 이곳 아주머니들이 열이면 열 한사람은 올라가지 않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처음 대하는 아랫사랑의 좌측 뒤쪽이다. 안채와 소통하는 쪽마루다.
이곳으로 밥상과 술상을 들여갔다고 한다. 유숙하는 객이 이곳까지 진출하는 것은 상당한 결례였을 것이다.
안채에 흑심 품은 놈으로 낙인찍혀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안채에서 사랑채를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술 곳간이 있다.
손님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고 대갓집이라 술 장만하는 일도 장난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보자면 오크통 저장고 같은 곳인데 지금은 술독만 남아 있다. 살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나에겐 별 관심 없는 영역이다.









안채 대청마루 정면의 이 물건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니 안주인의 세숫대야라고 한다.









안채는 안주인과 자식들 그리고 며느리가 거처하는 공간이다.
안채는 부엌과 찬 칸, 곳간, 대청마루로 ㅁ 자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닫혀 있는 구조이기도 하고
모든 곳으로 통하는 집안 소통의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거주하고 있는 운조루 사람들의 주요한
살림공간이기도 하다. 촬영하는 중에도 방안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관람객과 집주인 중 누군가는 양보해야 할 공간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안채는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구역 관람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고 사적인 공간을 불쑥불쑥 드나드는 것도
그렇게 좋은 광경은 아니다.









이제 안채를 떠난다.









안채에서 이전 부엌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서면 이른바 금귀몰니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사진의 햇볕 밝은 아궁이 앞쪽에서 돌 거북이 나왔다고 한다. 선사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신라시대
이야기도 아니다. 여하튼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깃감 아닌가. 그러나 부엌의 상태가 너무 허술하다.
사인물은 제외하더라도 부엌을 이전 상태로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나친 연출은 좀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연출은 필요하다. 암스테르담에서 '안네의 집'을 관람했을 때 감탄한 점은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있는 것처럼 연출한 유럽 아이들의 역사 팔아먹는 기술력이었다. 안네의 집은 연간 100만 명 정도
다녀간다. 안타깝다.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기획하고 연출하느냐에 따라 공간은 전혀 다른 맥락과
활력을 가지게 된다. 이 문제는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나?









사진 촬영에서 가장 힘든 점은 곳곳에 보이는 요즘 살림의 흔적이었다.
포커스는 계속 플라스틱과 소화기, 농약봉투, 고무장갑을 피하기 위해 줌인, 아웃을 거듭해야 했다.
그런 요소들은 잠시 근세의 생활史 속으로 진입하려는 감상자에게는 방해꾼이었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서 모든 요소를 200년 전으로 되돌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물론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생활공간과 관람공간을 구분하고 관리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저런 의견을 어떻게 전달하고 어떻게 조율하느냐는 것이다.
이건 또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나?









1776년 집을 착공하자마자 유이주는 사면된다. 정권이 바뀐 것이다. 오위장에 발탁되었고 정삼품이다.
함흥으로 부임한 이듬해 상주 영장을 거쳐 82년(57세) 평안북도 용천부사로 다시 옮겨간다.
계속 외직으로 전직했으니 운조루 짓는 일을 자신이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의 조카인 덕호가 맡아했다.
유이주가 설계한 것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어야했다.
유이주는 구례에 머물면서 운조루를 짓고 관리하는 것을 원했을까, 아니면 벼슬자리를 따라 그가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타관을 떠돌아다니길 원했을까.
179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막상 운조루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좀 길지만 운조루를 이어 온 사람들을 살펴보자.
향토문화진흥원에서 1992년에 만든 책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2대)유덕호 (柳德浩,1757~1815)
오미동에 터를 잡은 유이주의 사촌동생 유이익의 둘째 아들로 종백부인 유이주의 집안일을 돕다가
34세 때인 1790년 유이주의 양자로 입적했다. 호가 수분실이며 죽은 뒤 호조참판의 증직을 받아
추사 김정희가 쓴 묘지명을 남겼다. 토지면 토호 재령이씨 이시화의 딸과 결혼해 3남2녀를 낳았으나
가대는 그의 친동생 광호의 아들 억을 양자로 들여 운조루를 관리케 했다.

(3대)유억(柳億,1796~1852)
유덕호의 친동생(유이익의 9남)으로 유덕호에게는 서자뿐이므로 유이주의 대를 이어 운조루를 맡았다.
30세 때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감영의 중군, 평안도 병마절제사 겸 토포사 등 벼슬을 했다. 그는 늙어서
집에 돌아와 그의 호를 딴 원석집(圓石集)을 남겼으며 화첩, 장서 등을 수집해 오늘날까지 많은 유품이
전해 온다. 그는 당호를 족한정(足閒亭)이라 했다. 견용, 택선, 주선, 방선 등 네 아들을 두었으며 견용이
운조루를 맡았다. 둘째 택선은 1851년 무과에 급제, 현감 및 오위장을 지냈다. 그의 아들 제관은 여산,
금산, 광양군수 등을 지내고 갑오 동학 난 때 관군 편에 서서 전라좌도소모사를 맡았다.

(4대)유견용(柳見龍,1817~1851)
아버지 유억이 죽기 1년 전에 35세의 나이로 죽어 큰 행적을 남기지 못했다.
제양과 제영 등 두 아들을 두었다.









(5대)유제양(柳濟陽,1846~1922)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 이듬해에 할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숙부인 택선의 보살핌을 받으며 독서에 열중해 77살에 죽기까지 1만여 편의 시를 썼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죽던 1851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죽도록 일기를 써서 시언(是言)이란 기록을
남겼다. 큰 아들 영환이 일찍 죽자 손자에게도 일기를 쓰도록 지도해 구한말과 일본식민시절의
사회변화와 풍습을 알 수 있는 자료를 남겼다. 그는 매천 황현, 소천 왕사찬, 해학 이기 등과 폭넓게
교류했으며 농사일기, 동 향학, 면 향약 등 많은 기록을 남겼다. 두 부인에게서 다섯 아들을 두었다.

(6대)유영환(柳永桓,1869~1892)
아버지 이산공의 가업을 돕고 살다가 23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형업이란 아들과 딸 하나를 남겼다.

(7대)유형업(柳螢業,1886~1944)
나이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열세 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
1937년까지 무려 40여 년간의 일기를 남겼다. 기어(紀語)란 이름으로 남긴 이 일기는 그의 할아버지가
시를 많이 쓴 데 견주어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적어 대한제국의 패망과 3·1만세, 지적측량, 신식학교제도
등 근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의 일기를 통해 금환락지를 찾아 몰려온 이사자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다. 두 아들을 두었다.

(8대)유증교
민선 면 의원 부의장을 했다.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이 여순 반란 때 경찰에 의해 죽어
둘째아들 종숙이 운조루를 맡았다.

(9대)유종숙(柳鍾淑,1930~1991)

(10대)유홍수(柳鴻洙,1954~)
고등학교를 나와 아버지를 이어 운조루를 관리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마침 이준익 감독의 새 영화를 찍느라 운조루가 분주했다.
촬영을 끝내고 연못 앞에서 연기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준익 감독과 여배우 수애.
이러니까 뭔 연예가중계도 아닌 것이…….
여하튼 영화는 '님은 먼 곳에' 라는 제목이고 2008년 개봉 예정이란다.
이준익 감독 영화니까 개봉관 못 잡는 상황은 아니겠지…….









대문 밖으로 2백 평 가량의 연못이 있다. 연꽃이 제법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철을 달리하며
연못 밖으로 나 있는, 마을길을 끼고 있는 화단의 꽃나무들이 더 볼 만하다.
물론 이런 저런 꽃이 피는 시기와 날씨를 잘 만나야 그 느낌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운조루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다. 그것은 사유재산에 대한 평가를 이곳 사람들이 원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입소문을 타고, 세월을 타고 넘어 나라에서 그리 정한 것이다. 간혹 운조루 방문기를 올린 블로그
등에서 불만스러운 소감을 접할 때가 있는데 공통적인 불만은 바로 '관리'에 있다.
운조루는 10대 252년을 이어 온 살림집이다. 이것에 딜레마가 있다.
밖에서 볼 때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지만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정집이다. 이론적으로는 소유권은
그 집안이 가지고 관리는 국가에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유럽의 개인  성들이 그런 것처럼, 그렇게
관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상황은 국가는 그런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하고 이왕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집'을 떠날 이유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관련된 기관으로 보자면 구례군이 해당 자치단체로 있을 것이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문화재청이 있을
것이다. 지금 문화재청장의 성씨는 柳씨다.
집은, 특히나 한옥은 사람이 살지 않을 때 빠른 속도로 허물어진다. 사람이 살고 있어 완전한 보존과 복원이
힘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어 이 정도라도 지켜온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이 지점에
서 확고한 편이다. 그러나 운조루는 문화유산이라는 공공재이기도하다.
후손들이 물려받은 가장 큰 자산은 '자부심'이다. 대신 국가는 사람이 자부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자부심에 합당한 보상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안 공간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이런 의견은 실현까지 지난한 과정을 예고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간을 가지고 해결점을 찾되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안 된다.









위에서 언급한 해결책이 쉽지 않은 과정을 예고하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운조루 내에서 생활구역과
관람구역을 나누는 방식이 단기적인 해결책이라고 본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운조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운조루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수입원은 농사다. 경작하는 밭이 12필지 3,004평,
논이 11필지 7,897평, 임야가 18필지 96,292평, 대지가 4필지 1,772평이다. 1992년 조사 현황이다.
임야는 산이니 일일이 관리하기 힘들고 밤이나 과실수를 좀 거두어들이는 수준이다. 주요한 노동은
논과 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거두어 판매하는 것이다.
조계종 사찰들이 절집 방문뿐만 아니라 사찰 소유 땅을 지나간다는 이유로 등산객에게 조차 문화재 관람료
명목의 통행세 받는 것을 생각하면 운조루 관람료는 당연하다. 요는 그 관람료를 받는 시스템을 좀 더
'공적인 모양새'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는 손이나 받는 손이나 주섬주섬 천 원짜리 한 장 건네는
모양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붕까지 구비할 필요는 없어도 일정한 창구를 필요로
하고 상주하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관람 동선과 설명도 당연히 매뉴얼화해야 한다. 설명문류의 사인물도
제작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기념품 등의 제작과 판매도 고려해볼 만하다.
이것을 한 집안에서 사람을 고용해서 진행하기는 힘들다. 운조루의 노동력 4인은 위 논밭 일만으로도
여력이 없다. 이런 정도는 국가 또는 지자체 지원으로 가능하지 않은가?
이런 문제는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나?









운조루 10대 손 유홍수씨가 자신의 들을 걷고 있다.
그는 나에겐 같은 마을에 사는 한 분 형님이고 오미동 삼십여 가구 중 한 세대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운조루라는 만만치 않은 무게를 어깨에 지고 있다.
운조루.
오미동.
유이주가 자리 잡은 이후 두 마을이 생겨 날 정도로 이 땅으로 사람들이 몰려 왔지만, 땅을 정하면
행복은 절로 보장될 것이란 기대는 너무 성급하고 헛된 욕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발복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으로
수십 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자식은 여느 촌락과 한가지로 도시로 떠나갔다.
新금환락지는 자본과 투기, 일확천금을 노리는 땅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이곳은 평범한 시골마을일 뿐이다.
하지만 이름난 절집이나 계곡을 찾는 것도 좋지만 이런 사연을 가진 마을에서 한 시간 정도 산책하고
조용히 들판을 보는 것도 뜻있는 여행일 것이다.









집이 있다.
외지 사람들은 운조루(雲鳥樓)라 부르고 마을 사람들은 아흔 아홉 칸 집이라 부른다.
그 집이 자리하고 있는 마을은 오미동이고 그 집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다.

<기어紀語>의 주인공 유형업(柳螢業)의 손길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2007년 5월 25일
23일 한양서 살던 권이란 자가 오미동으로 옮겨왔다. 쇳덩이로 만든 헛간을 큰 우마차가 끌고 와서
운암 댁 밭고랑에 집이라고 옮겨 놓았는데 그 모습이 기이해서 입 달린 사람들은 한마디씩 거든다.
전답을 돌보는 것도 아니고 허허로운 숫자로 만들어진 신문물로 뭘 만든다는데 디지털이라고 한다.
지리산을 팔아서 먹고 산다고 하는데 괴이하고 수상쩍다. 요즘 사람들은 기계를 맹신하는데
그건 매우 유치한 짓이다. 추석 무렵에 밤 한 되를 건네주었는데 두 칸 집에 곡식은 보이질 않고
기계만 가득하다. 푼돈도 먹을 양식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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