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운조루와 오미동 이야기-1

마을이장 2007.10.08 23:52 조회 수 : 9521 추천:286






집이 있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을 일러
외지 사람들은 운조루(雲鳥樓)라 부르고 마을 사람들은 아흔 아홉칸 집이라 부른다.









마을이 있다.
조선 제일의 명당 자리라는 금환락지(金環落地) 마을인 그곳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里이고 마을 사람들은 오미동이라 부른다.

지리산닷컴 '큰산아래이야기' 그 첫 마당은 구례군 운조루와 오미동 이야기이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는 것 보다 하나로 엮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바른 방법이다.
두 편으로 나누어 다룰 '운조루와 오미동 이야기'는 향토문화진흥원에서 1992년에 만든 책
<금환락지(金環落地)> 라는 책에 많이 기대고 있다. 다른 자료들도 검색하고 취합했지만
그 대부분의 정보가 위 책에 속한 것이었고 보다 더 자세한 자료는 없는 듯 하다.
풍수와 한옥에 관한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곳이 풍수와 한옥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전달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하고
무엇보다 이장의 지성이 그곳까지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인용이 많은 글이 될 것이다.
사진은 지난 1년 동안 틈틈히 찍어 둔 것을 시간과 내용을 무시하고 배치했다.
운조루 대문 안 사진은 이번에 두번으로 나누어 모두 새로 찍은 것이다.









지난 추석 무렵에 오미리 마을정자에 걸린 프랭카드다.
이곳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오미동이라 부른다. 이곳 뿐만 아니라 명절이 되면
거의 모든 시골 마을들은 이런 플랭카드를 마을 입구에 내건다.
운조루 앞에 자리한 마을정자라 운조루를 방문하는 차량들이 간혹 코 앞에 주차하는
일이 있어 좀 볼썽사납게 스프레이로 갈긴 '주차금지'는 손을 좀 보긴 봐얄 것이다.
운조루가 있는 마을로 유명하지만 오미동은 그 자체로 대단히 아름다운 마을이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논쟁 같은 것이지만 오미동과 운조루의 운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오미동이 있어 운조루가 가능했고 운조루가 있어 오미동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닭과 알의 비유보다 화선지와 낙관落款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19번 국도를 따라 구례에서 하동 방면으로 이동하다보면 왼편으로 운조루와 관련한
세 개의 좌회전 진입로를 만날 수 있다. 사진의 진입로는 구례에서 하동 방면으로 가는 도중
가장 먼저 만나는 진입로이다. 최근에는 사진의 왼편입구에 녹차가공공장이 세워졌다.
하동쪽에 올라오는 19번을 이용한다면 토지면 농협 지나 조금만 올라오면
오른편으로 '문수사' 가는 우회전 길이 나온다. 이 길이 가장 곧고 편하긴 하다.
그 길을 지나쳐도 기회는 있다. 200m 정도 전진하면 다시 곡전재(穀田齋) 팻말이 나온다.
그 길로 우회전하면 완만하게 굽어진 태극모양의 좁은 도로를 따라 오미동으로 진입한다.
이 길도 참 인상적이다. 여튼 구례에서 하동으로 내려가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운조루'란 이정표를 보고 휘리릭 차를 왼쪽으로 돌리면...









이런 이정표가 나온다. 200m 정도 간격으로 이런 이정표는 앞 서 소개한
그대로 두번 더 나온다. 지금 보시는 진입로가 길 맛이 가장 좋은 진입로이라
일부러 소개한다. 어느 마을에 대한 정보 보다 그 마을에 속한 한 고택에 대한 정보가
그 마을에 우선할 때 짐짓 그 마을은 별 볼 일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운조루 방문을 마치고 대문을 나서 오미동 들판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 안온함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마을의 안정감에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조루는 '많이 들어봤는데...' 운조루가 자리한
오미리에 대한 이야기까지 알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예사롭지 않은 마을이다' 라고 많은 방문자들이 이야기한다.
그 예사롭지 않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일제시대 때 무라야마(村山智順) 라는 사람이 <조선의 풍수> 란 책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 및 오리미 일대를 1912년께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들었다.
충청남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각처에서 꽤 지체 높은 양반까지 와서 집을 짓기 시작하여
현재(1929년) 이주해 온 집이 일백여호에 달한다.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비기(秘記)에 말하기를 이곳 어디에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의
세 진혈이 있어 이 자리를 찾아 집을 짓고 살면 힘 안들이고 천운이 있어 부귀영달한다고 전해온다.
이 세 자리는 상대上臺, 중대中臺, 하대下臺라고도 하며 하대인 오보교취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 한다.
이곳 제일 오래된 유씨의 집이 오미리에 있다. 그 택지는 유씨(柳氏)의 원조 유부천(柳富川)이란 사람이
지금부터 300년쯤 전에 복거(卜居)한 것이라고 한다. 유부천은 서울까지 밤마다 구름을 타고 왕복할
만한 방술에 통한 자였다. 그가 좋은 집의 초석을 정하고자 할 때 뜻밖의 귀석(龜石)을 출토했다.
비기에 이른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땅이라는 것을 알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게 다 뭔 말인가? 일단 사전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표현을 풀어보자.
금환락지(金環落地) - 선녀가 퇴근하다가 실수로 금가락지를 빠뜨린 곳이다.
금귀몰니(金龜沒泥) - 금거북이 진흙속에 숨어 있는 곳이란 뜻이다.
오보교취(五寶交聚) - 5가지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문외한이지만 일단 무지하게 좋은 땅이란 뜻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선녀, 금거북이, 보물... 이런 오브젝트에 대해 "에잇, 재수없어!"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결국, 운조루와 오미리가 주목받은 이유는 이른바 명당이라는 오랜 믿음이 만들어 낸
끈질긴 풍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괜히 어설피 해석하다가 망신 당할 수 있으니
아래에서 그림과 인용문으로 그 풍수적 해석을 한번 들어보자.









1990년 10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서 펴 낸 <한국민속종합조사 보고서>
제21책에서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이강오씨가 조사해 정리한 <구례 운조루>편이다.
운조루편이지만 포괄적으로 오미동에 대한 이해도 함께 할 수 있다.

<이 터의 조산(祖山)은 노고단이고 형제봉은 주산이다.
노고단은 길상봉, 문수봉이라고도 하여 지리산의 주봉이다.
지리산에는 노고단보다 높은 천왕봉이나 반야봉도 있으나 노고단이 가장 신령스러운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에 남악사(南岳祠)를 지어 지리산 산신을 제사했다.
노고단의 노고(老姑)는 우리 민간신앙과 깊이 관련이 있는 '늙은 할멈'이다.
이 신령스러운 노고단에서 한가닥의 용(龍)이 갑묘(甲卯)로 벗어나 자계(子癸)
방향으로 머리를 돌려 구례군 토지면과 마산면의 경계를 이루는 형제봉이 된다.
그래서 운조루터는 노고단이 조산이고 형제봉이 주산이 된다.
이 형제봉에서 건해(乾亥)방향으로 머리를 돌리다가 다시 축간(丑艮) 방으로 돌려
월령봉을 만들고 천황치를 지나 천행치에서 자계 방향으로 벗겨져 내리면서 건해, 청룡,
축간 백호를 지어 운조루를 감싸고 있다.
운조루는 계입수 계좌(癸入首癸坐)로 자리하고 있으며 득수는 곤득사파(坤得巳破) 형국이다.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는 배산임수의 동네로 앞에는 섬진강변 충적토로 기름진 들이
너비 2킬로미터, 길이 4킬로미터로 펼쳐져 있다. 섬진강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되
들을 안고 흐르니 좋은 물길이다.
동네 동쪽을 흐르는 시냇물도 마을앞 정방(丁方)에서 서로 만나며 서북쪽 저수지물은
동남으로 흐르고 동북쪽 시냇물은 서남쪽으로 들을 감싸고 흐른다.
정방(丁方)에 있는 안산인 오봉산(五峯山)은 세개의 필봉으로 솟아 올랐고
병방(丙方)에 멀리 계족산이 필봉형국으로 솟아 있다.
국을 둘러싼 청룡과 백호는 내청룡이 짧고 외청룡이 길며 내백호가 길되 외백호는 짧다.
내청룡이 짧아 수구가 허하다고 여겼던지 수구 가까이에 조탑(造塔)을 만들어 비보(裨補)했다.
멀리 남쪽으로 보이는 계족산은 주작이고 북쪽의 형제봉은 현무가 되며 동쪽의 왕시루봉이
청룡, 서쪽의 천황봉이 백호가 된다.>

역시 영역 밖의 이야기들이지만 대략 들었던 풍월로 이해할 때 위 그림은 흔히
명당의 조건을 이야기할 때 교과서적으로 등장하는 딱 그 그림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그림의 교본이 바로 오미동이고 그 핵심이 바로 운조루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이 마을이 명당터로 인식되고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옛날에는 이곳을 '구만들(金環坪)' 이라 불렀다. 구만들에 집터를 마련하면 정말 발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일까?
지리산닷컴도 이 마을에 자리하고 있으니 무조건 대박나는 것인가?

풍수지리설은 고려때부터 유행했다고 한다. 풍수지리 뿐만 아니라 비결류가 유행했던 시기다.
조선의 개국은 힘만 있다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물론 이성계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의 방편으로 전략적으로 유포된 마타도어류지만
민간에서는 풍수와 비결류가 통치상의 문제점를 일으킬 정도로 유행했다
왕이 되어보겠다고 부자지간에 칼끝 들이대는 난리와 형제간에 주먹다짐하기는
예사였던 조선왕조, 왜란과 호란까지 겪에 되면서 권력 주변 인사들은 물론이고
민초들 까지도 자신과 가족이 병화를 입지 않는 것이 난세의 소원일 수밖에 없었다.
보험이나 로또가 없었던 시절이라 비결류의 가필본, 오기본 등이 사람들 사이에
흘러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부터 이른바 명당설은 생산되고 유포된다.

인용하는데 별 문제가 없는 오미리 즉 구산들에 대한 오래된 기록은 탁월한 지리정보지인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택리지라는 제목 자체가 살기 좋은 동네 구별을 위한
지침서이다. 택리지 후반부에 이른바 복거론(卜居論)이 있다. '살만한 곳'과 '살지못할 곳'을
실학자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원부 동남에 위치한 성원(星園)은 산수의 경치가 대단히 좋고 최씨가 대를 이어 산다.
그 남쪽은 구례현縣이다. 구례 서쪽 봉동(鳳洞)에는 샘과 들의 경치 좋은 곳이 있다.
그 동쪽에는 화엄사가 연곡의 명승지가 있고 남쪽에 구만촌(九灣村)이 있다.
임실에서 구례에 이르는 강 연안의 상하류에는 이름난 곳과 경치 좋은 곳과 큰 촌락이 많다.
오직 구만만은 시냇물가에 임하여 강산과 토지가 훌륭하며 작은 배와 어염의 이익도 있어
'가장 살만한 곳'이다. 남원과 구례는 다 지리산 서쪽에 자리잡아 강 서쪽 세 읍과 함께
그 전에는 모두 장기(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가 있어 악토라 했으나
근자에 와서 다소 맑고 깨끗해졌다고 한다...>

이를두고 사람들은 "구례땅 구만들이 세상에서 젤루 살기 좋은 곳이다아~" 라고
인용하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중환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다는 이야기는 없이
'살만한 곳' 이라는 아주 단순하고 간략한 이야기다. 택리지에 따르자면 지금의 휴전선
부근 파주땅은 도무지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데 이른바 명당 중의 명당터라는
오미리 보다 오십배 정도 땅값이 비싸다. 파주에 땅 가진 사람들 대박났고 이중환은
공인중개사가 아니기 다행이었다. ㅎ

원래 오미동의 이름은 '오동'이었다. 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의 다섯 동네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랬던 마을 이름이 운조루를 지은 유이주가 정착하면서부터
오미리로 바뀌게 되었다. 다섯가지 아름다움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 다섯가지란 월명산, 방방산, 오봉산, 계족산, 섬진강을 이르는 것이다.
이래저래 운조루가 자리하면서 마을은 이름부터 재편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행정구역 상의 명칭인 오미리里는 내죽(內竹) 하죽(下竹) 오미(五美)의
세 마을을 아우른 이름이다. 큰 산과 큰 강 사이로 비교적 넓은 들을 가진 곳이니
사람이 자리한지는 제법되었다. 최근까지도 심심찮게 고인돌이 출토된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생명 가진 것들이 먹고 살기에 풍족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다가 이 곳으로 사람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에 이른바 길지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면서부터이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보다 먼저 들어와 유행을 주도한 삼수부사 유이주(柳爾胄 1726~1797)의
4대손인 유제량(柳濟陽 1846~1922)은 일기로 <是言시언>을 남겼고 그 손자인 6대손
유형업(柳瑩業 1886~1944)은 역시 일기 <기어紀語>를 남겼다. 국사를 기록한 거창한
글들은 아니지만 글 맛이 좋고 세세하다. 그 중 명당과 관련한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1892. 10. 21<是言시언>
할아버지 묘소를 할머니 묘소가 있는 내계산소로 이정했다. 올해로 41년이 되었는데도
석회로 만든 묘지석을 손가는대로 헐어내고 매우 두껍게 석회로 다진 광중을 삽으로 파냈더니
관속이 수화열(水火熱)로 모발이 참혹하게 태워져 버렸다. 해골이 썩어버렸고 겨우 뼈마디만
남았으나 마치 죽순이 말라져 죽은 것처럼 몹시 검고 가벼웠다. 알기 어려운 것은 산세의 이치요
믿기 어려운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풍수지리설을 맹신하여 명당을
구하려 하지만 매우 유치한 짓이다.


1893. 10. 23<是言시언>
11촌 족숙인 유하룡(柳河龍)이 경상도 대구 입석에서 이사왔으므로 세칸집과 양식을 주었다.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 등 온가족을 이끌고 왔지만 푼전도 먹을 양식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려는지...


1906. 3. 1<是言시언>
서울 근교 이천에 사는 손님 권, 윤, 이씨 등 세사람이 찾아와 유숙하면서 화개동(花開洞)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대답하기 난처했다. 어째서 요즘 사람들은 심사가 괴로우면
차분히 정리하지 않고 스스로 방종하여 이리저리 방황하고 갈 곳을 모르니 딱하다.









1919. 2. 18 <기어紀語>
진주군 삼장면 대하리에 사는 강준영이 왔다. 나이가 60이 다 되었다.
묘자리를 보는 기술이 있고 의사를 겸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말하기를 앞들의 이름을
구만평(九萬坪)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금환평(金環坪)이 맞다고 하며 반드시 큰 명당일 것이라 하였다.
앞들 큰 언덕 아래의 수궁(水弓)의 땅은 지금 흑답(黑畓)인데 그곳을 가리키며
분명 이곳의 산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1921. 5. 8 <기어紀語>
임실 지사면에 사는 강찬희가 방문하여 잠시 금환락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갔다.
대개 타관에서 온 자들은 부호가 아닌 자가 없고, 모두 양택을 얻으려는 자들이다.


1927. 7. 5 <기어紀語>
혼자 북쪽 난간에 기대어 있는데 금환락지의 명당처를 찾는 손님이 찾아왔다.
경남 합천군 상백면 육리에 대대로 살아온 정태규와 같은 군의 대양면 무곡리의 주기인 두벗이
갑자기 와서 '금환락지'가 이 부근에 있는 모양이라고 하늘처럼 믿었다. 그러나 만일에 그곳을
얻지 못한다면 그동안 주선한 노력이 공연히 허비한 것이니 불과 이와같다면 그 후회를 어떠하겠는가.
밤에 운조루(雲鳥樓)에 앉아 함께 애기를 나누었다.









1928. 1. 12 <기어紀語>
환동에서 새로 터전을 마련해 사는 조만식이 방문했다. 순천 강촌에서 살아 왔으며 순창인이다.
5년전 백련동에 와서 거주한 이후 파도리 신전등 위의 서북 모퉁이에 새터를 마련하고 자칭
금환락지라 하였다. 그 가세가 지금은 줄어들었으나 아직은 빈궁하지 않다고한다.
행색과 성격이 자못 용열하여 미신을 지나치게 믿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인생이며 51세로 부친만 살아 있는데 75세이고 자는 德中이며 갑인생이다.
조금 학식이 있다.


1929. 4. 11 <기어紀語>
봉동댁이 경남 사천군 삼천포 선구리로 이사해 갔다. 이 또한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 먹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둘러 보아도 의지할 곳이 없고 도움이 될만한 곳이 없으니
이 가난을 어찌할 것인가. 흩어져가는 모습을 하물며 몇 마디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박승림이 방문해서 금환락지를 얘기하는데 자기가 새로 잡은 터가 조선 4대 명당의 하나로서
동양 삼국이 모두 아는 바라고 했다.


1932. 12. 22 <기어紀語>
두자 정도의 눈이 내렸다. 김경환의 아들 규상이라는 소년이 그의 안식구를 이끌고 먼저 도착했다.
내일 내죽마을의 집터로 들어갈 계획이다. 부의금 2원을 가지고 왔다. 정읍군 고현면 원촌 김경환이
10월 28일 찾아와 내죽 사는 김용선의 대지 두필지와 건물을 200원에 샀었다.









1933. 5. 4 <기어紀語>
오늘 아침은 나의 48회 생일이다. 모여서 조반을 먹었다. 앞 계족산에 불이 났다.
남원 광주이씨의 금양산 부근을 근래에 담배경작지로 조성했다.
김제군 월촌면 장화리에 대대로 살아온 정봉수가 찾아왔다. 그의 할아버지 준섭씨는
갑오년 이전 구례군수로 있을 때 만석군으로 불리워졌다. 용조(容祚)때에 이르러서도
낭패를 보지 않았는데 지금 곤란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 이곳으로 이사올려고
나에게 심하게 주선을 부탁하지만 나는 부드러운 얼굴로 거절했다. 읍내에 동행하여
백남두의 집에서 잤다. 밤에 패가된 이유가 산수간에서 유흥만을 즐긴데 있다고 말했다.


1935. 1. 13 <기어紀語>
13일 고창군 성송면 산수리에 사는 정휴창이 찾아왔다. 큰아들이 민환이라 한다.
밤에 금환락지 형국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근래 개혁 바람이 분 뒤 앞 들 금환락지를 본
탐방객들이 신작로 상하에다 세터를 잡아 지금 촌락을 이뤘으나 패가망신한 자가
비일비재했다. 모두 타관 사람이며 본토인은 한명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인용한 것 보다 훨씬 많은 사례가 일기에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라는 난세에 사람들은 불안을 잠식할 방편을 찾았고 그 해답 중 하나가
바로 오미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10억을 받았습니다." 라는 카피의 광고가
현실에서 이루어질 것 같은 보증서와 같은 것이었고, 로또 여섯자리 번호를 황금돼지
육만마리가 똥통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사람 소리로 "육, 삼, 칠, 사, 구, 땡" 이라고 알려주는
꿈과 같은 확실함이었던 모양이다. 여튼 그렇게 일제시대에 오미동에는 집중적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몰려나갔다. 그 이동이 얼마나 심했냐하면, 1991년 당시 호적부와 제적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세 동네의 호적에는 212가구가 남아 있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간 집이
117가구에 달한다. 그에 따른 결과인지 이 '명당터'엔 지배성씨가 없다. 물론 오미동의 문화유씨나
용두의 김해김씨와 같은 토박이도 있지만 30여개에 이르는 나머지 성씨들은 모두 뿌리가 깊지 않은
산성(散姓)이다. 1991년 토지면 인구조사에서 밝혀진 리별 성씨 현황 중 일부이다.

오미 / 40호수 / 20성씨
문수 / 34호수 / 22성씨
용두 / 57호수 / 19성씨
용정 / 36호수 / 26성씨
...

떠나간 2 세대 앞의 사람들은 혹 강남과 분당, 파주로 옮겨 간 것일까.
우리가 모르는 강남비결류가 존재했었다면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원래 그런 물건은 관심 있는 자의 손에 먼저 닿는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는 은밀해야 가치 있어 보인다.
은밀하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옛날과 지금이 다른 점은, 예전에는 비결의 핵심이 사람의 안돈에 있었고
근자에는 비결의 핵심이 땅값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땅값은 미래의 안돈을 보장하는 수단이니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사람의 안돈을 보장하는 방편 중에서 돈의 비중이 너무 높아졌다는 것이지...









이곳의 옛 이름은 토지(吐旨)인데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오미리는 풍수고 뭐고 간에 일단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해자처럼 파여진 수로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매화로 시작해서 벚꽃, 산수유, 동백꽃, 진달래, 개나리, 복사꽃, 배꽃, 연산홍,
자운영, 유채꽃, 백일홍, 등의 꽃이 마을 전체에서 단 하루도 끊이지 않는 곳이다.
매실과 산수유, 앵두, 살구, 감, 석류 등의 유실수가 집집마다 풍성하고
이른봄 청보리로 시작한 푸른바람은 늦은 봄이면 보리와 밀로 황금빛 바람으로 변하고
가을 아침이면 누런 벼가 짙은 안개 속에서 익어가고 겨울이면 설경이 그림엽서 같은
대竹밭 사이 집들이 흔한 마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시각적 정보는 그런 것이고 인문학적 정보는 차후의 문제다.
이중환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살고 싶게 생긴 마을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구만들은 평소에는 살만하고 난리통에는 뒷산으로 숨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이 이론과는 너무도 달랐다. 낙지(樂地)는 찾는 사람도 많고 물산도
풍부하지만 그 만큼 뺏어려는 세력도 많을 수밖에 없다. 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고통을 안겨 준 땅이기도 하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다보면 이 곳을 지나다가 하룻 밤 머무는 이순신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광양만에서 구례 쪽으로 걸었다.
적들이 해안에 상륙하자 피난민들이 내륙으로 몰려들었다.
거꾸로 내륙의 피난민들은 남쪽 물가를 향해 내려갔다. 양쪽의 피난민들이 길에서 마주쳐
서로 떠나온 곳의 형편을 물었다. 피난처는 아무 곳에도 없어 보였지만,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어디론지 가고 있었다. 어디론지 가고 있다는 것만이 그들의 위안인 듯 싶었다.
쓰러진 자들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길섶에 버려졌다. 나는 그들의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성 없는 마을마다 지방 수령들의 수염은 길게 자라 있었다.
그들은 무기력했고, 무기력한 만큼 격렬하게 비분강개했다.
나는 그들이 가져다 주는 밥을 먹고 그들의 숙사에서 잠을 잤다.
도원수 권률에게는 아무것도 보고할 수 없었다. 보고할 사실이 나에게는 없었고, 세상에도 없었다.
다만 도원수의 안부를 묻고, 내가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다는 내용만을 간략하게 적어서
지방 아전 편에 도원수부로 보냈다.
구례에 도착하던 밤에 혼자서 술을 마셨다. 술이 먼 것들을 가깝게 당겨주었다.
두달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예부터 지금의 19번 국도는 왜구의 침입로로 이용되었다.
왜병들은 이 길을 거쳐 남원, 전주로 북상했다. 왜구들이 이 길을 짖이겨 북상할 때면
관군은 어김없이 도망을 갔다. 금환락지 구만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임란왜란 이후
이곳에 정착한 집안의 자손들이다. 오미리가 자리한 토지면은 백운산과 지리산 사이에
위치한 까닭에 을사조약 이후로 이곳에서는 일본군과 접전하거나 쫓겨가는
의병의 출현이 빈번했다.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은 이곳 사람들에게 특히 깊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지리산과 백운산은 여순사건 당시 반군과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의 주무대였다.
토벌군은 필연적이었고 주둔 또한 눈 앞의 불을 보 듯 뻔한 예정이었다.
1948년부터 7년 동안 이 지역 사람들은 계속 전쟁 속에 보내야 했다.
이곳에서는 잼피가루 또는 좀피가루를 즐겨먹는다.
외지 사람들은 추어탕에 넣어 먹는 강한 향의 향신료를 기억할 것이다.
빨치산 토벌 당시에 오미동 바로 옆 하죽마을에서는 군인들을 맞아 밥을 대접하면서
습관적으로 잼피가루를 국과 김치에 넣었다. 그 맛을 처음 맛 본 군인들은 이장을
끌어 내어 죽도록 때렸다. 독약을 넣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쟁은 당연히 지주들의 처신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더구나 그 전쟁이 이념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밤이면 밤손님(빨치산)들에게 양식을 보낸다. 낮이면 군경들에게 점심을 내 놓아야했다.
이것은 이념적 입장에 따른 것도 아니고 당연히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원하지 않은 박쥐놀음이었다. 보통 박쥐놀음은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런 경우는 말 그대로 울며 겨자먹기다. 이 목숨을 건 줄타기에서 실수하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한다. 결국 자식이 총살당한 어떤 이는 아들의 죽음 덕분으로
궁궐같은 집을 전쟁의 와중에서 보존할 수 있었으나 그 한이 너무 깊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자식의 사망신고를 거부한 사례도 있었다.

총구는 부역과 이념의 선택을 강요했다. 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아예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소개(疏開)와 이주는 일상적이었다.
조선 제일의 명당 자리라는 비결에서 사람의 고통은 계산하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 오미동의 안온함과 풍족함 이면에는 이런 고통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불과 50년 정도 경과했을 뿐이다.
사람은 참으로 망각의 동물이다. 오십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한 세대 앞에 태어났다면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근접한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오미리 들판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만을 느낄 뿐이다.
백일홍 꽃잎이 비바람에 떨어져 운조루 앞 마을길을 붉게 물들인 날,
사진을 찍다가 문득 그 꽃잎에서 피빛 같은 선연함을 보았다.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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