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지리산 화엄사2 - 산책

마을이장 2007.12.09 18:57 조회 수 : 7473 추천:294



긍께로... ('1편에 이어서' 라는 전라도 표준말)







그곳/지리산 화엄사1 의 사진, 이 위치로 돌아가자.
오늘 두 번째 이야기의 출발점은 이곳에서 구층암으로 방향을 잡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1편이 무거웠으니 2편은 좀 가볍게 읽을 수 있어야겠다.

대웅전 지나 구층암까지는 대략 10분 정도 가벼운 산책을 하는 마음으로 오를 수 있다.
화엄사는 여러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구층암은 그 중 본사에서 가장 가까운 부속 암자이다.
흔히들 큰 절집만 구경하고 바로 내려가서 닭을 잡는 경우가 많은데, 2편에서 글 쓰는 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화엄사와 그 주변까지 아우르면 한 시간이 아닌 4~5시간을 필요로 하는
반나절 여행 코스가 된다는 점이다. 가족들이 산책하기 적절한 산책과 준산행이 어울린
코스이고 여름이라면 적당한 땀도 날 정도이며, 겨울이라면 숲 속 길이라 포근한 공기 속에서
상쾌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이다.
화엄사 관람 이후 구층암을 둘러보고 화엄사를 빠져나와 연기암을 다녀오는 코스다.
그럼 구층암으로 먼저 올라가 보자.









지금은 '출입금지' 팻말이 걸려 있는데 원래 화엄사에서 구층암으로 오르는
짧은 산책로는 대竹밭 소로길을 따라 오르는 소담한 길이었다. 2003년까지는
그 길로 올랐던 기억인데 이후로 화엄사 계곡 방면의 더 짧은 길로 이동 경로가
바뀌었다. 이전 길이 더 좋았다. 왜 좋은 길은 그들만 다니는 것이야. -,.-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짧고 가파른 돌계단이 나온다. 이른 아침에 이 길에서
쓸만한 사진을 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생각나네. 양쪽 다리 수술 끝내고 이 길을 오르실 수 있게 되었는데
짧은 거리였지만 역시 아주 힘들어하셨다. 그만큼 만족감도 깊었지만.
우리가 싱싱한 다리로 올라 조망할 수 있는 절경을 부모님들은 결국 보실 수 없는 몸 상태라는
사실은 분명 슬픔이다.
젊은 날은 미래를 위해 온 몸을 던져 노동했고 막상 당신의 그 미래에 도착해서는
젊은 날의 몸이 아니니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라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노랫말은
때로 경박한 쾌락지상주의 선전을 위한 것만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안은 항상 '지금'의 역할을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개인적인 소회지만 구층암 돌계단 앞에서는 항상 어머니가 생각난다.









이번 글은 일부러 정보 차원의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매달리지 않았다.
검색에서 공식적으로 나오는 해당 자료 이상을 취하지 않았다.
구층암과 연기암이 많은 자료를 필요로 하는 절집도 아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글 쓰는 이의 감흥을 중심으로 만들어 갈 생각이다.

구층암은 그래도 많이 정리되었다. 80년대 후반에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무너져 내린 탑을
다시 쌓아 올린 저 모습과 마당의 잡초들이 어울렸었다. 마치 버려진 암자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때는 사진의 삼층탑 쪽에서 절집 마당으로 들어섰기에 그 쇠락한 분위기가 더 강했다.
절집 보다는 요사채 느낌이 강했었다. 구층암에 대한 가장 짙은 기억은 다름 아닌 화장실인데
이전에는 여름이면 토란밭을 지나 화엄사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호젓한 분위기에서
자연친화적 똥을 때리는 맛이 참 좋았다. 화장실 앞 벽이 툭 터여 있었다.
몸을 빠져나간 나의 분신은 내가 일을 끝내고 화장실을 벗어날 즈음에야 아랫녘에서
메아리로 도착을 알렸던 그 심연같은 똥통. 똥토옹옹옹오겡끼데스까아아아~









구층암九層庵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신라말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며 지금은 없지만 이름으로 보아 구층석탑이 있었을 것이다.
적당하다. 무엇이? 그냥 그러하다.
이전에는 화장실이 있던 텃밭 쪽으로의 작은 풍경이 좋았는데 텃밭 자리를
좀 다듬고 난 이후 나는 구층암의 이 안마당이 좋다.
대략 언제나 조용한 편이고 언제나 방문객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사진은 광각렌즈를 사용해서 찍다보니 이러한데 실제는 절집으로는 작은 마당이다.









이 요사채의 기둥이 이 절집을 찾는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다.
마치 괴목테이블의 요란스러운 모습을 보는 듯 한 느낌인데 일반적이진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 기둥의 기묘한 모습은 언밸런스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이 기둥이 이 집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것은 영화에서 음악이
영화보다 더 강한 경우가 같은 것이다. 파격도 격이 있다.
괴목, 분재, 꾸며진 정원 등에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개인적 취향이자
개인적 평가이니 염두에 두실 일은 아니다.









천불보전 앞 정원이다.
이곳에서 항상 카메라 셔터를 많이 눌렀다.
마당과 정원의 기본적인 구역 구분을 위한 돌 몇 개가 장식의 전부이니
당연히 취향일 수밖에 없다. 이 작은 정원에는 많은 종류의 꽃들이 계절을 달리하며
피고 진다. 이 날도 11월이었지만 역시 꽃은 여전하였고 11월 특유의 쇠락한
느낌과 화사한 붉은색과 국화의 은근함은 중앙의 앙상한 가지의 나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미나스 티리스의 '왕의 나무'를
1/3 사이즈로 축소한 듯 하다. 왕은 어디로 갔나? 남자를 만나러 갔나.









본사인 화엄사의 규모와 질서 정연함에 비교하면 연이어 감상하는
구층암의 흐트러진 모습과 소박한 사이즈, 자연미는 화엄사 구경의
마침표 같은 역할을 한다. 편안하고 부담 없는 느낌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편안함의 사이즈와 높이, 가격은 달라진다. 그것의 기준치는 없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그 높이와 넓이와 가격은 달라진다.









절정을 좀 지난 국화였는데 이 날은 좀 시려보였다.
자연과 사람은 교감하는데 교감이란 움직이는 느낌이다.
꽃은 원래 제 모습 그대로 피고 지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을 뿐인데
사람의 마음이 꽃을 두고 이리 저리 갈피를 정하지 못한다.
이 날은 마음이 스산했던 모양이다.









천불보전이니 불상이 천 개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천 개의 토불土佛이 모셔져 있다.
그 동안 몇 차례 시도했지만 사진을 건지지 못했는데 이 날은 빌린 카메라와
렌즈의 밝기를 실감했다. 천千이란 숫자는 전통적으로 지극정성의 상징이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이 그러하고 월인천강지곡의 千江이 그러하다.
많음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양 갈래 길의 미학美學이 생긴다.
그 많은 반복 만큼 기원한다는 의미는 대개 못 가진 자들의 기도 방식이다.
특별한 그 어떤 하나를 올릴 형편이 여의치 않은 것이다.
가진 자들은 단 하나의 오브젝트에 사활을 건다. 특별한 그 하나special one 를
가능하면 많이 확보하려 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무엇과 천 번의 반복 중
어느 것이 더 절실할까.
요즘은 千이 아닌 수백만명의 염원이 담긴 간절한 기도가 매 주 몇 건씩 일어나고 있다.
어머니는 복권을 사지 말라고 하셨다.
수백만명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절실한 염원을 어느 날 '내가 취하는' 것은
하나도 좋을게 없다는 말씀이셨다.









천불보전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구층암에 머무르는 동안 토요일이었지만 아무도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햇살이 낮은 것을 보니 한 시간 후면 서산을 넘어갈 모양이다.









2006년 여름 끝자락의 사진이다.
백일홍이 끝물이었고 역시 사람은 없었다.
사진을 통해서 그 날의 세부적인 상황까지 기억해 낸다.
그날 함께 있었던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한다.
구층암 겨울 사진이 없다. 뭐 이번 겨울에 가능할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 모습은 분명 다르다.
사진은 찍는 사람이 확정하는 사각형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은 나 조차 사진에 더 많은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습관은 반복되고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더 이상 전설도 될 수 없다.
아주 가끔 카메라 없는 여행을 하고 싶기도 하다.









지난 금요일의 바탕화면 '猫'를 찍었던 마루를 두 걸음 지났다.
방문객이 제법 있는 모양이다. 차를 나누며 대화를 나누겠지.
설마 또 '소리'로 '살이'를 지도하는 중은 아니겠지.
구층암 구경은 끝이 났다.
이제 화엄사를 벗어나서 연기암으로 올라야 한다.

화엄사 입구로 나오면 건너편에 찻집이 보인다.
그 찻집을 지나서 연기암으로 가는 길도 있지만 그 길은 승용차도 다니는
비포장길이다. 시간도 30분 이상 더 걸린다.
찻집 앞으로 난 '노고단'으로 향하는 좁은 등산로 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좋다.
일반적인 걸음으로 쉬엄 쉬엄 가면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짧은 등산이라
생각하는 것이 좋다.









대竹숲 길이다.
화엄사에서 연기암까지의 절반은 이런 대숲이 이어진다.
그냥 말 없이 단순하게 좋다. 돌 길과 나무로 장식한 산책길이
편안하게 1km 정도 이어진다.
사진은 2006년 7월 초순이었을 것이다.









겨울의 대숲 길은 이러하다.
역시 단순한 만족감이 충만하다.
코끝 찡한 공기 속을 걷다보면 두툼한 외투를 스치는 대잎 소리를
귀로 몸으로 실감한다. 장난끼 많은 일행이 있다면 대숲에 쌓인
눈사태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평댁이 서울 아들 집에 전화 걸어 달라고 창문을 두드리니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멀리서 보면 앙상한 가지의 무채색 숲이지만
겨울 숲은 들어서면 소복한 눈밭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당황스러웠다.
아이젠도 뭐도 준비하지 않은 무경험자의 한계였다.
1km 정도의 대숲 길이 끝이 나고 서어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바위가 많은 계곡길이라 겨울에는 미끄럽다. 이정표만 주의 깊에 살핀다면
이 짧은 산행에서 길을 잃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주의하는 것이 좋다.
사진의 이 날 가벼운 산행 길은 참 포근한 날씨였다.
외투를 벗고 걷기도 했다.
'말을 할 수 없다'와 '말이 없다'는 완전히 다른 개념인데
눈 쌓인 바위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숲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심지어 나와 일행들 조차 혼연일체가 된 듯한
완전한 조화를 경험했다. 그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산 길이 끝나고 갑작스럽게 임도가 나타나면 연기암에 당도한 것이다.
늦은 가을 새벽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연기암은 체력 부실한 도시 봉급생활자들이
이곳을 방문하면 자주 애용했던 코스다.
빨간 등산복의 아가씨(?)가 향하고 있는 지점으로 올라오게 된다.
그 다음에는 사진을 찍고 있는 지점으로 급경사로를 따라 올라오면 되는 것이다.
입구의 저 집은 기념품과 차를 팔았던 곳인듯 한데 지금은 장사를 하지 않는다.
연기암은 화엄사의 말사가 아니다. 이를테면 다른 나와바리라는 것이지.
아무래도 큰 절집 위에 있다보니 세력은 좀 약하지만 그래도 내부 시설로 보자면
'입시전문' 절집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몇 차례 연기암을 올랐지만 이날 새벽이 가장 멀리까지 전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연기암은 그 자체로 뭔 이야기와 구경거리가 많은 절집은 아니다.
연기암의 가장 큰 매력은 높은 곳에 위치한 대웅전 앞에서 이렇듯 구례읍과 섬진강 쪽을
내려다보는 전망을 즐기는 것에 있다.
해발 500m 정도 될까? 이곳에서도 자료 사진을 보면 산과 강과 마을이 어우러진
운해를 즐길 수 있다. 사진은 11월 말이었고 비교적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7월의 연기암은 멀리까지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소나기 뒤의 빠른 구름쇼를 관람하기 적절한 포커스다.









연기암을 절집 자체로 그다지 매력적으로 평하지 않는 것은
이런 '불사' 때문이다. 건물군 자체가 최근에 신축한 것이라
오래된 절집의 분위기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미감은 좀 난감한 것이다.
지금도 석石물은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걸작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이유는 간단한데... 일천 몇 백년 전에는 석공이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였지만
지금은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은 존재하나 그 기술도 기계적 단련의
느낌이 강하고 무엇보다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할 만한 불교에 대한 사유가 없다.
사유가 없다보니 모양 만들기는 가능해도 감동을 전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조차 생산자의 상황이고... 더 큰 문제는 주문자의 미감이 이 정도라는
한국 불교의 현재적 미감 수준이다.









대웅전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다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관음전이 보인다.
2~3분이면 당도할 거리니 당연히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연기암緣起庵.
화엄사 창건 이야기에 등장한 인도僧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 신라 수도 경주에서 최신 사상을 설법하다가 연기조사는 지리산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화엄사에 앞서 이곳 연기암을 먼저 창건했다 한다. 이후로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의
사찰을 만들어 나갔는데 결국 지리산 자락이 당시 화엄사상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화엄사 1편에서 이야기한 국보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장면에서
동서남북 네마리 사자의 호위 속에 탑을 이고 계신 연기조사의 어머니 이야기를
기억하시기 바란다. 연기암은 그 어머니의 거처로 삼았던 절집이기도 하다.

여튼 이 관음전은 멀리서 보면 제법 그럴 듯 한데 가까이서 보면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다.
정확하게는 주변 경관이 탁월했던 것이지 건물 자체가 특별히 볼 만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저 낡은 듯 한 문살이 나무가 아닌 수지(화약제품)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다음에 가면 확인해 볼 요량이다.









관음전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은 경사가 급하고 수량이 풍부해서
거의 항상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는 절집이 아니니 원하는 만큼 편하게 숲을 즐길 수 있다.
역시 연기암 자체가 시각적 만족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연기암으로 오르는
대숲 길과 연기암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이제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가면 된다.









올라오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다르지만 길의 표정은 다르다.
그래서 왕복길이 아니면 산행에서 나는 자꾸 되돌아 보는 습관이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장면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숲이 끝날 무렵, 몇 시간의 화엄사와 주변 산책 코스는 실질적으로 끝난다.
내려오는 길은 물론 더 빠르다. 그래도 화엄사로부터 시작하여 몇 시간
걸음을 한 것이니 다리가 좀 뻐근할 것이다.









다시 2007년 11월 어느날로 돌아왔다.
주창장에서 차를 빼서 화엄사 도로를 따라 내려왔다.
곧 해는 빠른 속도로 서산을 넘어갈 것이고 길은 귀가하기에
적당한 색감이다. 돌아와서 이 사진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영화 <터미네이터>가 생각났다.
1편이었나 2편이었나에서의 마지막 어두운 도로 장면 때문인 듯 했다.

August 29th 1997 came and went.
Nothing much happened.
Michael Jackson turned forty.
There was no Judgment Day.
People went to work as they always do, laughed, complained, watched TV, made love.









문화재관람료는 쌓이고 있었고...









쌀쌀했던 날씨 탓인지 매운 무우채 비빔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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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자, 오타도 뒤돌아보지 않고 바로 사무실을 나설 생각입니다. 다음 주에 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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