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없다.
시작부터 뭔 바람을 잡는 꼴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긴 글은 자신이 없다.
화엄사를 이야기감으로 잡았다. 화엄사는 큰 절이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국보급, 보물급 유물도 많고 워낙 유명한 절이라 다녀가신 분도 많다.
그런만큼 이 절에 관련된 이야기도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화엄사는 조선에서 '디스 이즈 절'이라 일컬어질 만하다.
글 소재가 너무 유명하면 의외로 글 쓰는 사람의 운신폭은 줄어든다.
자신이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글 쓰는 이의 인문학적, 불교미술사적 지식이 너무 일천하다는 것이다.
화엄사의 진면모는 불교와, 특히 불교미술과 관련된 것인데 그 공부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전에 잠시 한국미술사를 공부해야만 했던 시기가 있어 십 수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불교 사상에 대한 이해가 없이 불교 미술의 그 숱한 사인sign과 코드code를 해독하기는 어렵다.
그래 하는 수 없이 몇 권의 불교 입문서와 불교사전류를 끼고 거의 난생 처음으로 밑줄 쫘악~ 그어가면서,
게다가 메모지를 옆에 두고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공부다운 공부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 대한 습자지 지식만으로 절집 구석구석에 대한 해설이 가능한가?
절집이란 것이 한옥이 떼로 모여 있는 집 아닌가. 한옥의 구조와 그 많은 인테리어 관련 악세사리들을
숙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도자기는 불교로부터 자유로울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 문양과 용처가, 어쩌면 그 발생 자체가 불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래 저래 한국미술사의 80%는 불교미술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쓰는 글 또한 그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전제로 하여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장은 십 수 년 전에 그토록 열심히 갈고 닦았던 지식의 90%가
십 몇 년 만에 만난, 그 동안 성형 수술을 대폭한 애인을 맞닥뜨린 것마냥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다.
그때 그 자료들과 서적들을 다시 좀 찾아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 책들은 몇 번의 이사 때 마다 대충 버렸다. '뭐 다시 볼 일 있겠나.' 하고 말이다.
그래, 책은 이사의 최대 난적인 것이다.









11월 17일 토요일 오후에 혼자 화엄사를 찾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나는 토요일에 화엄사 같은 번잡한 절집을 찾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전국 절집에서 거두어 들이고 있는 이른바 '문화재관람료'라는 명목의 통행세를 내면서
화엄사로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주변에 큰소리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혼자 화엄사를, 게다가 토요일 오후에 문화재관람료를 공손하게 내고
입장한 이유는 화엄사 진입로 단풍이 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피아골과 다른 골짜기만 쫓는다고 정작 가까운 곳의 단풍을 보지 못한 것이다.
'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가 이미 수삼일 지난 후이고 주말을 피한다면 단풍이 끝날 것은 뻔한
노릇이기에 11월 17일 아침에 눈 뜨면서 산수유 열매 찍고 오후에 화엄사를 촬영하기로 작심한 것이다.
지리산닷컴을 시작한 이후, 어느 시기, 어느 장소의 절정 순간을 비축해둬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래, 집과 사무실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화엄사 매표소를 11개월만에 통과한 것이다.
이미 내가 한발 늦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지만 시작했으니 들어서야지.









화엄사를 처음 찾았던 것이 80년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딱 한 줄 문장으로 말하자면 '나는 화엄사가 너무 좋았다'. 첫 인상이 그렇게 박혀서 그런지
부석사를 십 년 동안 염원하다가 2002년에야 처음 가보고 이후에도 찾았지만 어쩌면 내 인생의 절집은
아직까지도 화엄사다. 개인의 취향과 '그때 나의 상황'에서 비롯된 서정의 궁합이 가장 강력하게
결합했던 탓이다.
물론 그 시절에는 걸어서 이 길을 올라갔다. 당연한 것이었고 호젓한 이 길을 걸어 올라가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활엽수림이 주종인 이 길의 주변 숲은 내 기억과 비교하자면 약간 변했다.
가로수를 새로이 심은 점도 다르고 몇몇 설정형 나무들을 조성한 것도 다르다.
결론적으로 그때의 자연미가 더 흡족했던 것이다. 앞으로 이 길을 걸어 올라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나의 예상대로 단풍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나의 이례적인 '토요일', '문화재관람료 지불' 화엄사행은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단풍이 아닌 '화엄사' 자체를 '큰산아래이야기'로 다루기로 작정한 것이다.
뭔가 문화재관람료에 값할 만한 수확을 가지고 돌아가야했다.
언젠가는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 '화엄사'라는 큰 소재지만 사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많은 구간의 산행이 한 달가량 통제된 시기라 다른 대안이 없다.
결국 절집이나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화리조트로 우회전 하는 길을 좀 지나면 화엄사 주차장이 오른편 다리 건너 있다.
주차하고 여기서부터 걸어 올라가는 것이다. 뭐 적당하다. 아주 천천히 10분 정도.
단풍이 짙게 물든 나무 몇 그루가 다가오는 겨울에 대항해서 그 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많은 잎을 떨군 나뭇가지들은 어쩐지 어정쩡하다.
바람이 제법 불었다. 그리고 저 잘 다듬어진 사철나무들도 개인적으로 좋지 않다.
화엄사는 다루고 싶은 아주 큰 이야기감이지만 내키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나의 주관을 어느 정도 배제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할지를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주관이나 입장이 세운다면 그 99%는 비판으로 채워질 것이다.
화엄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불교'라는 영역에 대한 글 쓰는 이의 소신이 워낙 확고해서
여러 사람이 보는 지리산닷컴에서 과연 합당하거나 타협적인 글쓰기가 가능할지 자신할 수 없다.
화엄사를 다루기고 작정하고 내가 잡은 첫 책은 그 흔한 문화유산답사기 또는 불교미술 관련 교양서적이
아니라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도올 김용옥, 통나무1989>였다.
총론과 각론을 두루 정교하게 구사한 불교비판서이다.









개인적으로 최근 작은 결심을 한 것이 있다.
이곳에서 이장 개인의 본연과 동떨어진 글쓰기는 하지 않겠단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인것처럼 나를 꾸며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이장님'으로 인식되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것이다.
바탕화면만 나가고 아침 글이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해도 억지로 글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불편할 일일 것이다. 하여 오늘 다루게 될 '화엄사'는
지리산 자락 절집의 대표주자로서, 무엇보다 처음 다루어지는 절집이란 이유로 많은 쓴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화엄사 1편'에서는 안내자보다는 비판자의 입장에 많이 기댈 것이고
다음 주에 나갈 '화엄사 2편 - 주변 이야기'에서는 여행안내자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지리산닷컴의 지리산자락 소개 이야기가 다른 곳과 차별성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무슨 이유로? 저 차들은 지정 주차장을 지나 절 앞에 주차하고 있는 것인가?
절집 앞에 차를 대지 않으면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방문한 것인가, VIP들이 갑자기 몰려든 것인가?
일반 관광지에서 이런 룰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못마땅한 현상이다.
'작은' 질서를 하나 둘 쯤 어겨도 되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참으로 천박한 의식이 저런 판단의 근본에 깔려 있다.
기형적인 근대화의 유산이다.









화엄사에 대한 첫 인상을 묘사한다면 '다듬어지지 않은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90년의 화엄사도 그러했다. 노고단에서 화엄사 일주문까지 장대비를 맞고 내려와서
처마 아래에서 담배를 피웠었다. 여름비였고 녹음은 짙었고 단청은 색이 바래 나무의 근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참 좋았다.
90년 중반 무렵부터 화엄사는 '손을 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많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공간이고 찾는 사람도 많은 사찰이니 단장하는 것도 예의일 것이다.
문제는 단장 방식이 지금의 편리와 미감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역시 이 날도 불사佛事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단풍은 완전한 끝자락이었지만 주말이라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공사판도 한창이었다. 이래 저래 난장판이었다.
사진 찍기 대락 난감한 조건이다. 바람은 또 왜 이리 불어대는지.
특정한 장소를 방문할 때 이전의 기억에 기대어 서정을 쥐어 짜내는 짓은 참 씁쓸한 일이다.









90년대 중반 무렵부터 화엄사에 포크레인이 상주했을 것이다.
이후로 한 번씩 방문할 때마다 어딘가에서는 어김없이 공사중이었다.
불사佛事를 일으킨다는 말은 공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법회도 불사고 천도遷度도 불사다. 경전 쓰는 일도 불사다.
절 짓고 금불상 조성하고, 동양에서 제일 큰 석불 만드는 일만 불사가 아니다.
나의 무식에 탓이 있겠지만 언젠가부터 '불사를 일으킨다'라는 말이나 글을 만나면
"뭘 또 짓나" 아니면 "뭘 또 부수나" 는 소리로 들린다.
스님들이 방 안에서 얼마나 용맹정진하시는지야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뭔 돈을 투입해서 사이즈 경쟁하는 불사만 남은 듯 하다.
사람이 살기에 불편한 것들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불사는 외부로부터 잘 보이기 위한
것들이다. 계단 모서리 좀 낡으면 어떤가? 오히려 관광객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나?
왜 그 오래된 돌들을 들어내고 요즘 유행하는 화강암으로 바닥을 깐단 말인가.
정말 그런 결정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공사판을 피해 오른편 돌계단을 오르면 왼쪽 옆구리 쪽으로 보제루普濟樓를 끼고
화엄사의 본 마당에 해당하는 전경을 바라보게 된다. 넓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십 수 년 전에는 이 넓은 마당이 빈곤한 자갈과 흙으로 덮여 있어서
오늘처럼 바람 부는 날이면 먼지 바람이 일었다. 황량했었다. 하지만 좋았다.
일단 이 즈음에서 화엄사華嚴寺 연대기 정도는 그래도 나열해 줘야한다.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게 나열할 수 있을까... 절집을 설명함에 있어 이 문제는 언제나 난감하다.

華嚴寺. 이름으로 봐서도 화엄사상의 중심지겠지.
이 절은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자리하고 있다. 노고단에서 내려다보면 서쪽 계곡이다.
한국에서 불교는 조계종이 지배종단인데 화엄사는 당연히 조계종의 교구이고 19번째 본사이다.
나중에 기술하겠지만 조계종은 25개 본사를 거느린 방대한 조직이다.
화엄사 창건에 대한 인정할 만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가지 검색을 해봐도
책을 살펴봐도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緣起라는 인도 승려가 창건한 것으로 나온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시대는 분명치 않지만 연기라는 승려가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의상대사가 등장하면서 화엄사는 큰 손을 보게 된다.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본부로 삼으면서 화엄사는 당시 불교의 중심 사찰로 거듭난다.
의상대사가 누군가? 이 땅에 화엄종을 전파한 처음 그 사람 아닌가.
644년(선덕여왕 13년)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했고 당나라 유학파다.
670년에 귀국해서 왕명에 따라 저 유명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고승이다.
그는 해동海東화엄종의 창시자라는 높은 그레이드를 차지하고 있다.
조계종 입장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시조에 해당한다.
의상대사는 전국을 돌며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여 화엄세상을 구현하려 했다.
그리고 화엄사는 그가 꿈꾸던 화엄세상을 이루는 꼭지점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후에도 화엄사는 중건을 거듭했다.
대략 지리산 자락 이야기에서 거의 등장하는 최다 출연 승려 도선국사道詵國師도
화엄사를 중수했고, 고려시대에도 네 차례 중수했다. 무사히 잘 버티어 왔는데 역시나
임진왜란 때 화엄사는 한 줌 재로 폭삭 내려앉았다. 이때 승려들도 많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1630년(인조 8년)에 화엄사는 다시 일어난다. 7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몇몇 건물을 건립했다.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
화엄사에는 많은 유물들이 있다. 절집 전체를 국보 덩어리로 보면 된다.
리스트를 일별해보자.

-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 국보 제67호인 각황전
-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
- 보물 제1,040호 장육전 석경
-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그 가치와 의미를 찬찬히 음미하면서 이것들을 둘러 보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화엄사는 다른 절집보다 구경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잡아 먹는다.
일단 건물군 자체가 많기도 하지만.
위 사진은 보물 제 132호에서 보물 제 133호를 바라보면서 멀리 국보 제 12호를 찍고
그 뒤로 국보 제 67호를 흐릿하게 바라보는 아주 비싼 조망이다.
한 포커스에 국보 2개, 보물 2개를 담아서 바라볼 수 있는 절집은 거의 없다.









보제루普濟樓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49호다.
지금은 일종의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 눈엔 대웅전보다 보제루 기둥이 훨씬 가치 있어 보이는데
누구는 국보고 누구는 지방 유형문화재다. 따라서 감상할 때 굳이 해당 오브제가 사람들이 국보다, 보물이다,
지방문화재다 라고 정한 계급을 머리 속에 미리 넣고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국보나 보물의 지정 과정이 과연 얼마나 투명한지 내 눈으로 본 바가 없다.
세상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 보제루의 의미다. 올라가다가 보면 2층 누각 건물이다.
인조 때 벽암대사가 복원을 진행할 때 축조되었고 1827년 순조 때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주로 간이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보제루 누마루 아래로 통과해서 올라오는 형식은 이 건물이 일종의 불이문不二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不二,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화엄사상의 핵심이다.
그 화엄세계로 본격적으로 들어왔고... 라는 의미이다.
불이문 옆으로는 보통 종각이 자리한다.









이날 사진은 개별 건물을 렌즈 안으로 충분히 집어 넣는다는 생각으로 촬영했다.
이를테면 정확하게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저 종이 '원래 그 종' 인지 확실하지 않다.
글 쓰는 이가 확보하고 있는 현재 자료로서는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하겠다.
분명한 것은 이 자리에 있었던 범종을 왜군들이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
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구례군 용두리 즈음 섬진강가에서 배는 뒤집어졌고
범종은 당연히 강물에 빠졌다. 현대에 와서 그 종을 발굴하기 위해 용두리 강가 바닥을
조사했다는 기록을 읽었는데 지금 그 자료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겠네...
여튼 우리나라에는 종을 강에 빠뜨린 역사적 경험이 종종 있는 듯 하다.









사람들 피해서 프레임을 잡기 힘든 날이다.
화엄사에서 동선은 보통 보제루에서 두 개의 탑을 보고 좌회전해서 종각을 보고 각황전 쪽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 길목을 잠시 비껴 선 구석에 화엄사에 올 때 마다 내가 셔터를 누르는 이 작은 출입문이 있다.
절집에서 '감로甘露'라 표기된 영역은 출입금지가 대부분이더라.
감로와 같은 열반에 이르는 문이니 속가 사람은 들어서면 안 되는 모양이다.
하여간에 라이센스는 많이 따둘 수록 좋은 것이다.
여튼간에 어느 날인가 이 문 앞에 다시 섰을 때 저 낡은 토기와가 잡초도 제거되고 시멘트를 절반 섞은
요즘 기와로 대체되어, 그러니까 성형한 얼굴로 나를 맞이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각황전覺皇殿.
80년대 중반, 처음 본 순간부터 각황전을 사랑했다.
당시는 쇠락한 절집의 고독이 화엄사를 휩싸안던 시절이었고,
각황전은 강력한 포스를 내뿜는 전설 속의 제다이 백 명을
봉안한 신전과도 같이 낡은 아름다웠다.









object. 던져진 대상이다.
던져진 단순한 대상은 그 앞에서 감정을 느끼고 상상을 할 수 있을 때 온전한 오브제(?)가 된다.
나에게 의미가 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제법 크네'라는 단순한 반응도 많을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이며
국보라고, 감동을 강요한다고 전이되는 오르가즘이 아니다.
나라 밖으로 나가면 훨씬 거대한 불교 유적이 많다. 따라서 나의 감정은 단순히
사이즈로 인해 발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무엇이 있다.









일단은 각황전 측면을 스쳐지나간다.
적멸보궁寂滅寶宮. 많은 부처 중 한 분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통상 적멸보궁이라 한다.
적멸보궁은 잠시 후 설명할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이 합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좋다. 다 좋은 뜻이고 충분히 존중할 만한 곳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왜 안내 간판이
저 지경이냔 것이다. 1600년이란 긴 세월을 산 이 절집의 수많은 문화재이 지닌 절대미학을 지금의
실무책임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이거나 그들이 미감 수준이 딱 저 간판 지경이거나 여튼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저 '적멸보궁' 간판이 생기고 난 이후 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사사자삼층석탑
자리로 이동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 날은 올랐다.
사진을 찍어야했고 문화재관람료까지 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자니 요 계단도 불만스럽다.
오르기 힘든 것도 문제지만, 오르면서 생각할만한 시각 아이템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최단 시간, 최단 거리로 이동하는 문제에만 골몰하여 만들어졌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이란 발상은 서구 합리주의의 결과물인 동시에 인류 역사상 세상을 가장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용미학이다.
화엄사는 화엄사상에 바탕해서 창건된 절이다. 그러나 지금 화엄사란 절간은 이게 완벽한 코드로
관철되지도 작동되지도 않는다.
전체와 부분을 조화롭고 합당하게 사유하기에는 너무 무식한 후대가 돌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2007년에 절집을 돌보고 있는 어정쩡한 합리주의자들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란 것은 안다.









날이 날이니 만큼 국보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전경 모습 나간다.
양식의 독특함은 인정하나 아주 특별하게 어떤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국 각처에 산개한 옛탑을 관람하는 일에 개인적으로 인색한 이유는 무엇보다 저 철재 울타리 때문이다.
저 울타리를 두고 사진을 찍다보면 누구나 같은 포커스의 사진을 찍게된다.
아예 더 넓게 울타리를 쳐두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었을 듯 하다. 어정쩡하다.
저 상태에서 울타리가 나오지 않게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프레임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광각 렌즈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보호를 위한 설치물이 시각적 방해물이
아닌 조건에서 '국보'를 감상할 수 있게 해달란 것이다.
옛날부터 가파른 이곳에 올라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와 지붕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출입금지 구역은 뭔가 옛 멋이 더 살아 있는 듯 하다.









네 마리의 사자들의 호위 속에서 합장하고 있는 서 있는 스님은
화엄사의 창건자로 알려진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한다.
헌정의 의미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의 불교 현실을 보아도 '어머니'는 여전히 화엄사와 조계종에 많은 수입을
보장하고 계시다. '어머니'는 역시 존재 자체로서 베풀고 계신 것이다.









이른바 적멸보궁터에서 나의 최대 관심사는 각황전 지붕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각황전 지붕을 내려다보기 위해서 이곳을 올랐다고 보면 된다.
맨 처음 방문 때는 이곳의 조망을 몰랐다. 거의 아무런 정보 없이 화엄사를 찾았었다.
화엄사란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십 몇 년 전이니 목적지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전통 건축물을 관람하는데 그 규모를 지붕 사이즈로 실감할 수 있는 뷰 포인트는
그리 쉽게 제공되지 않는다. 이 뷰 포인트에 대해서 언급한 여행 관련 가이드북이나
답사류 도서를 본 적도 없다. 그러니 다 알려진 뷰 포인트를 발견했답시고 혼자 좋아서 난리난
것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이 뷰 포인트는 유효하지 않다.
보시다시피 나무가 자라서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도 '시야를 방해하니 나무를 정리해 달라'는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이 자리에서 각황전 지붕을 거의 아무런 장애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그나마 내가 기록으로 남겨 둔 것이 2003년 5월 경 아침에 이곳에서 찍은 아래 사진이다.









2003년 5월 어느날 아침에 찾은 화엄사가 좋았다.
아침이라 좋았고 신록이었다. 당시 카메라는 니콘 쿨픽스 950이라는 똑딱이였다.
사진 퀄리티를 렌즈 카메라와 얼추 비슷하게 만든다고 손을 좀 많이 봤다.
이 사진보다 1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왼편의 나무가지가 보이지 않아 지붕이 더욱 확연했다.
기와 지붕의 저 반복된 가지런함을 항상 찬탄했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은 그렇게 감상할 수 없다는 사실.









화엄사華嚴寺는 각황전覺皇殿이다.
각황전 없는 화엄사는 철학적으로도 무의미하다.
각황전이 있기에 화엄사이고 각황전은 화엄사가 지닌 의미의 51%를 차지한다.
보통 절집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화엄사는 각황전을 중심으로 구성된 절집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화엄경을 푸른 돌편에 새겨 벽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이것을 화엄사 석경이라고 한다.
화엄 사상이 '영구적'으로 남기를 바랐기에 돌에 불경을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각황전은
그 화엄경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지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장육전(지금의 각황전) 중건과 석경을 새긴
시기와 그 주체는 정확하게 전해내려오지 않는다.
의상대사가 왕의 명으로 화엄사를 중건할 때 '장육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건물이 지금의
각황전이라고 보는 것이 대세다. 문제는 석경의 제작 시기다.
의상대사가 동시 진행했는지 통일신라 말기 정강왕이 그의 형 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새긴 것인지
분명치 않다. 의상대사와 정강왕 사이는 200년의 세월이 가로지른다.
뭐 어찌되었건... 당시 장육전 사방벽을 푸른 돌에 화엄경을 새겨서 장식했다고 한다.
장육전 석경이 지금의 각황전을 있게 한 핵심이다.
글씨는 해서체로 최치원이 정강왕 2년(887)에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문과 비슷한데,
신라 명필 김생의 것이라고도 이야기는 전한다. 새겨진 글자 수는 10조에 달했다고 한다.
서체가 한 사람의 글씨로 추정되는데 글자 수가 10조개였다는 말은 어차피 확인이 불가능할 터이니
옛 사람들이 지어낸 낸 구라가 아닐까 싶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병의 방화로 장육전은 사라졌고 푸른 돌에 새긴 석경 또한
온전한 것 없는 파편이 되어 버렸다.
숙종 25년인 1699년에 장육전은 재건되었지만 석경은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100만 피스 퍼즐을 10개 세트로 선물 받고 맞춰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좀 난감할 것이다.
1963년까지 석경의 파편은 나무 궤짝에 담겨져 절집 구석에 쌓여 있었다고 한다.
온전할 수가 없었다. 누구 하나 그 석경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가세가 기울대로 기운 조선 말기의 불교계 입장에서는 어찌 해 볼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석경은 정유재란 이후 360년을 쓰레기로 뒹굴었다. 1964년에 이 쓰레기를 주워 모아 정리해보니
1만 3천여 점이 되었다. 이후 계속 추가로 보이는대로 주워 담아 보관을 했고 1990년부터
14,242점의 석경을 163개의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지방문화재로 등급 판정받았던 163개의 쓰레기 상자는 1990년 5월에 보물 제 1,040호로 지정된다.
화엄사는 이 석경에 대한 복원 불사를 그 당시에 시작했다.
퍼즐 맞추기가 아닌 새로이 새기는 작업일 것이었다.
여튼 각황전이 이전의 장육전의 온전한 지위와 의미를 되찾는 퍼즐 맞추기는 계속 되고 있다.









* 지금부터 전개하는 이야기는 단순무식한 이장이 정리하기 벅찬 내용입니다.
따라서 '주장이 아닌 사실 관계'가 틀린 대목은 전적으로 이장 책임이며 이를 지적해주시는
덧글을 기다립니다.


화엄종은 한국 불교의 한 종파다.
종파는 뭐고 종단은 뭔가? 머리가 심히 아파온다.
단순무식하게 인민적으로 이해하자면 종단은 대기업이고 종파는 계열사다.
그러나 대기업과 계열사의 철학이나 중심 경전이 같은 것은 아니다.
한국불교의 특징은 통불교다. 이게 뭔 말이냐면 종파별 입장이나 철학에 따라 찢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교집합'에 의해 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어떤 교집합' 중 주류는 '선종 또는 선불교'다.
다른 교집합으로 교종 또는 교학불교가 있다. 역시 이장 방식으로 단순무식하게 이해하자면
교종은 경전을 열심히 연구해서 부처가 되자는 입장이고 선종은 선수행을 통해서 부처가 되자는
입장인 듯 하다. 그렇다고 한쪽은 글씨만 보고 한쪽은 벽만 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여튼간에 한국에서는 선종이 역사적으로 대세였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경전 연구 중심의 교종이
득세했지만 이후로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선종이 자리한다. 처음부터 자리한 것이 아니라
저자거리에서 판을 벌이기에 힘이 부족해서 산으로 짐싸서 들어갔는데 9개 산의 절집이
유명했다. 이를 두고 구산선문이라 부른다. 대략 지금의 한국불교의 많은 종파는 이 구산선문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 사진은 국보 제 12호 석등石燈. 각황전 입구에 있다.


조선 말기까지는 선종과 교종이 양립하였다.
선종은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으로 교종은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으로 구분되었다.
파쇼적인 권력이 등장하면 사회 모든 부문 계열에 대한 정리 작업을 확실히 진행하게 되는데,
한국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사찰령寺刹令이란 것이 제정된다.
1924년,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조선불교조계종이라는 큰 덩어리로 정리된다.
이 정리가 지금의 거대 조계종단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선종 계열 중심으로 통합된 지금의 종단이 조계종단이고 화엄종은 그 속에 속해 있는
계열사가 되겠다. 파로 나누자면 뭐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조계종.진각종.원효종.보문종.법상종.
미륵종.총지종.삼론종.미타종.일붕선교종.태고종.관음종.총화종.법화종.화엄종.천화불교.원융종.
조돈종.열반종.염불종.천태종.법화종.일승종.진언종.용화종.법륜종.본원종.여래종.대승종.정토종...
이 종파들은 라이센스 취득한 집들이고 라이센스와 무관하게 소수정예로 암약하는 종파도
대략 쉰개 정도 되는 모양이다.









* 사진은 각황전 뒷켠이다. 예쁘다. 꼭 한바퀴 둘러보시기 바란다. 아, 이 사진은 2006년 늦은 여름.


조계종단에 속한 화엄종의 한 절집인 화엄사는 당연히 화엄경을 주 경전으로 모신다.
화엄경을 주경전으로 하면 석가모니불이 아닌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존으로 공양한다.
이제 정말 힘든 고비다. -,.- 화엄華嚴은 뭐고? 비로자나불은 뭔가?
<화엄경>이란 것은 준말인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정확한 표현되겠다.
범어로는 Mahavaiplya-buddha-ganda-vyuha-sutra라고 한다. 읽어보자면,
마하바이프라야붓다브이유하수트라하하하~ -,.-;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소小에 대칭을 이루는 표현이 아니라 절대적인 대大, 극대를 뜻한다.
시공을 초월한 '완전 대大'라 이해하면 되겠다. 방광方廣이란 당연히 넓다는 뜻인데 공간적으로
넓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방광불이란 겁나게 크고 넓고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의미한다.
그 붓다를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은 어떤 구체적 오브젝트가 아니다. 진리를 인격화한 것이다. 그 인격화를
부처라는 실체를 통해 표현한다. 이런 경우의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이다.
법dharma이란 현세를 가상 현실로 보는 불교의 특성상 우리가 아귀다툼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매트릭스 가상 세계 넘어 진짜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도달해서 드래곤볼 방식으로 싸운 동네하고는 좀 다를 것이다.
진여眞如라고 한다. 우주 만유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절대 진리의 세계이다.
법신불은 이 법dharma을 인격화한 것으로 모든 인간에게 영원불멸하게 존재하고 줄거나 늘어나지 않고
시작과 끝이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비로자나불이다.









* 사진은 각황전 때문에 찬밥 신세가 된 화엄사 대웅전.


화엄이라는 말의 뜻을 요약해서 한 줄로 표현한 말이 어디 없나 하고 검색에 검색을
거듭했지만 마음에 딱 드는 자료가 없다. 역시 이장 방식으로 단순무식하게 정리 들어간다.
정리라고 하지만 본문 읽지 않고 덧글만 보고 상황 판단하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다.
화엄華嚴이란 하나의, 그 어떤 긍극적인 '세계'인데 부처와 중생, 부처와 세상, 부처와 물질이 하나로
비빔밥이 되어 결국에는 그 모오든 존재 자체가 부처인 세계다. 온갖 꽃들이 이리 저리 얽혀있지만
그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조화를 이루는 장엄莊嚴 세계다. 알기 쉬운,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다." 불이사상不二思想이다.
화엄사상에서는 인간의 번뇌가 발생하는 원인을 그 무엇이건 '둘로 나누어 보는'
관점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생과 사, 나와 너, 안과 밖, 현금과 카드,
네이버와 엠파스, 여자와 남자,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나누면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려면 고민해야는데 스트레스 쌓인다. 뒷 목이 뻣뻣해오고 그래서 사십대 돌연사는 발생하고...
다 그런 것이다. 분별하고 판단하고 스트레스 받지 마라! 걍 하나다! 그것을 딱 한 동작으로
표현한 것이 비로자나불의 수인(불상의 손 모양)이다. 비로자나불은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오른손 손바닥으로 감싸 안고 있다. 다르지 않다!
세익스피어가 화엄경을 읽었다면 햄릿의 스토리는 이렇게 바뀌었을 것이다.
햄릿이 독을 묻힌 칼을 들고 날뛰는데 오필리어가 나서서 한 마디 하고 모두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것이다.
"오빠, 살고 죽는건 하나예요. 제발 오바질 집어치우고 밥이나 즐쳐드셈!"

이상, 이장의 화엄경 강의였슴돠. -,.-;









2007년 10월 20일. 화엄사로 발길을 옮겼다.
<2007 화엄제> 영성음악제라고 하는데 명상음악 계열로 이해하면 쉽다.
산 아래 살면 이런 것이 좋다. 2006년에 처음 시작했고 그 해의 테마는 '첫발자국'이었다.
2007년은 '길떠남'이었다. 그러고 보니 10월에도 화엄사를 갔었던 것이군.
몇 사람이서 어울려 화엄사로 올라갔다. 행사는 오후 2시였다. 그때도 이장은
"만약 문화재관람료 받으면 나는 안 본다!"라고 주장하며 올랐는데 그날은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지. 손님 청해 놓고 돈 달라고 하면 안 되불제.
문제는 날씨였다. 야외 행사 아닌가.
여튼 사월초파일 다음으로 큰 행사이고 공연도 그럴싸한 것이라
도시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올라오고 있었다.









산 아래 살면서 몇 차례 산사음악회를 보았는데 대략 나름으로 번잡하고
준비도 다양했다. 카메라 돌아가고 행사 참여자인지 자원봉사자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예쁜 아가씨들도 폴짝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세련된 의상의 장년층도 많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보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문화는 일종의 습관이다. 현지인은 행사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밥 한 그릇이라도 더
팔아주고 가면 좋은 것이고, 이런 큰 절집은 아랫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함께 하는 큰집의 도리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









보제루와 범종각 앞으로 무대가 준비되었다.
사진으로는 햇살 따사로운 정경으로 보이겠지만 이날 바람은 무작스러웠고
기온도 대단히 차가웠다. 좀 이른 추위였고 단풍은 시작도 하지 않은 시기였다.
일행은 공연 전에 급하게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담요를 들고와야 했다.
보제루 앞 마당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앉고 각황전 앞으로 몇 줄의 의자,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만원사례. 큰 절집 답게, 출연자들의 이름값에 답하는
관객 동원이었다. 무대는 소박했다. 뭔가 요란스러울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스님들이 각황전을 출발하여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영성음악제는 시작되었다.
영성靈性[명사] -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

<12일 새벽 4시 50분경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 조계사 총무원에 서의현 현조계종총무원장의
반대파 승려와 신도 등 80여 명이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난입, 서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유리창 80여 장을 부수는 등 난동을 부렸다. 경찰은 이들의 난입 직후 2백 여 명을 출동시켜
현장에서 경현용 스님(34)등 22명을 연행하고 이들이 갖고있던 "나는 총무원장의 정부였다"라는
제목의 주간지 기사를 복사한 유인물 1천 여 장을 압수했다.> - 동아일보 1989. 3. 13, 월요일 -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이날 새벽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에 모여, 버스 3대에 나눠타고
조계사에 도착, 대형절단기로 철제 정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침입해 기물들을 닥치는대로 부쉈다는 것.
경찰은 전경 1개 중대등 2백 여 명을 출동시켜 현장에서 승려인 현경용(34.법명 성호) 등 22명을
연행하고 이들로부터 주간지 기사를 복사한 서총무원장 비방유인물 1천 여 장을 압수했다.
경찰은 연행자 중 일부가 일당 2만~3만원을 받고 동원된 불량배들임을 밝혀내고 이들의 동원 경위
등을 조사중이다. 경찰관계자는 "경씨등 승려 7명을 포함한 연행자 대부분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 이라고 한다.> - 조선일보 1989. 3. 14, 화요일 -









1989년, 서울 하고도 강남 금싸라기땅에 위치한 봉은사 주지 자리를 놓고
큰스님들의 밥그릇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봉은사 주지가 이른바 사판승事判僧의
우두머리격인 조계종 총무원장집을 습격한 것이다. 가톨릭으로 보자면 바티칸 궁의
Pope에게 pipe 들고 맞짱 한번 뜨자고 달려간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한국 불교의 현주소와 수준, 전망이 도출될 것이다.
국립공원 입장료 폐지 이후 발생한 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는 사찰들의 갈취 행위,
이른바 '문화재관람료'라는 것에 대한 이장의 분노도 막연한 군중심리로 하는 소리가
아니란 것 또한 밝혀질 것이다. 영성음악제 관람과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짬뽕으로 진행해보자.









공연은 정시가 되어 아무런 예고 없이 조용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시작되었다.
티베트 라마승의 딸이지만 스위스로 망명해서 살고 있는 디첸 샥 닥사이Dechen Shak-Dagsay의
음악이 아주 짧은 시간에 객석을 파고 들었다. 흡입력이 강한 목소리였다. 객석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자기 입장이 명확한 아티스트였다. 다른 출연자들도 좋았지만 디첸 샥 닥사이의 공연이 가장 흡족했다.
세 곡을 불렀을(? 불렀다고 해야하나, 연주했다고 해야하나) 것이다. 첫 곡이 가장 강렬했다.
조용했지만 아주 강렬했다. 아직도 그 춥고 바람 부는 속에서 천천히 무대로 걸어나오며
완전히 자기 음악 속에 몰입하던 그녀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음반이 출시되어 있다고 하니 구할 수는 있을 것이나 제목을 모른다.
그녀의 사이트 인트로 페이지에 잠시 나오는 곡이다. 비겁하게 조금만 들려준다.
얼른 가서 한번 들어보시고 오시면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http://www.dechen-shak.com









이장도 이날은 300mm 렌즈 빌려서 그 추운 날씨에 줌-인 한다고 제법 손목이 시큰거렸다.
포토라인이 설정되었지만 대략 대웅전 계단을 별 의지 없이 막아서고 있는 진행요원 아가씨에게
'저 사람들 이 선 넘어오지 못하게 하세요!'라고 지시하고 무대 앞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날 공연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불자들일 것이다.
물론 단순히 공연을 즐기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화엄사에 연을 두고 있는
불자들로 보였다. 화엄사는 대한민국에서도 아주 큰 절집이다. 연간 방문자가 100만 명 선이다.
물론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산과 화엄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일반 관광객이 아닌 불자로서 화엄사를 찾는 사람들은 일주문에서부터 불이문, 종각, 대웅전, 각황전...
그 모든 곳에서 합장을 한다. 존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 속에서, 가슴 속에서
존중하고 염원하는 대상이 이 절집인지, 스님인지, 부처님인지, 그 모든 것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적으로 종교 자체에 대해 굉장히 인색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 가톨릭, 불교, 원불교, 이슬람... 여튼 종교라는 형식과 그에 관련한 사유와 행위 자체에 대해
나는 전혀 공감도, 이해도 하지 못한다. 믿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 이상의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소리도 가능하지만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이렇듯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나라에 살다보면 반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길거리 선교하는 사람들과 다투는 것은 금물이지만 두 번 아주 강하고 짧은 임펙트를 준 적은 있다.
서울 시절, 늦은 밤 지하철에서 한참을 떠들고 난 후 전단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눠주는 아주머니의 손을
거부한 적이 있다. "지옥가요. 이거 안 받으면." 잠시 후에 버릴 것이니 받아들고 외면하면
그만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좀 민감했다. "잘 되었네요. 천당 가면 당신들만 있을거 아냐."
잠시 째려보더니 그 아주머니는 그냥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대학 시절 학교 앞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넥타이 맨 통일교 선교하는 늘씬한 백인들이
"알령하세요~" 하고 접근했을 때 "I don't speak Korean!" 하고 그냥 지나치자 그 아해들이
잠시 멍해 있는 모습을 본 이후 실로 근 이십년 만에 길거리 선교 활동에 대해 반응한 것이다.
대학 시절의 대꾸는 유쾌한 것이었지만 서울 지하철에서의 대꾸는 짜증스러운 것이었다.
오죽하면 아무리 비신자라고 해서 지옥행을 자청했겠나.









제니퍼 베레잔Jennifer Berezan. 거의 마지막 순서였다.
캐나다 출신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는 교육가이자 운동가이며 싱어송롸이러인 그녀다.
포크 계열의 음악가인데 8장의 음반을 낸 베테랑이다. 가장 추웠던 시간이었다.
불심으로 버티기 힘들었는지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날 공연이 끝나고
몇몇 사람들의 후일담의 공통점은 '추워서 아무 생각 없었다'가 주류를 이루었다.
막상 사진 찍는다고 움직이다보니 이장에겐 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인도의 타블로 연주자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2008년 화엄제도 가 볼 생각이다.
지리산닷컴에서 미리 공지할터이다. 그런 공연 보고 하루 지리산 자락에 머무는 것도
인상적인 여행일 것이다.









대한민국 불교에서 교구본사나 큰 절집은 각 문중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치열한 전쟁터다.
조계종이 거느린 큰 절집을 한번 일별해보자.
조계사, 용주사, 신흥사, 월정사, 법주사, 마곡사, 수덕사, 직지사, 동화사, 은해사,
불국사, 해인사, 쌍계사, 범어사, 통도사, 고운사, 금산사, 백양사, 화엄사, 선암사,
송광사, 대흥사, 관음사, 선운사, 봉선사 등 조계종은 25개 교구parish 본사로 나뉘고
그 밑에 각기 말사를 두고 있다.
임명장 발부와 하극상에 항명이 빈번한 절집은 수입이 짭짤한 곳이다.

주지라고 한다. 한자로 住持. 그냥 살면서 심부름이나 한다는 매우 겸손한 뜻이다.
하지만 말 많은 절집 주지의 본 모습은 실상은 住 자가 아닌 主 주자다.
주지는 바쁘다. 바쁜 원인의 구할은 돈을 구하기 위한 분주함이다. 쓸 곳이 많다.
일단 절집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정치 자금도 준비해야 한다. 조계사 사건처럼
가끔 깡패를 사려면 비자금도 마련해둬야 한다. 민선이 아닌 임명직이니 상단에 로비도 해야한다.
속세 관리들한테도 봉투를 돌려야 한다. 이전에 문공부, 지금의 문화관광부 관리들에게
제법 돈이 들어갔었던 모양이다.









원래 절집은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만들어지는 재화로 운영되었다.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왕조를 거치면서 사찰들이 불하받은 땅이 어디 장난인가.
큰 절집의 주지와 아랫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시골이나 산중에 자리한 땅이, 더구나
국립공원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 당하고 있는 땅이란 것이 종잇장 이상의 뭔 대단한 경제적
효용성이 있겠는가. 현금이 돌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이전의 소작인들은 모두 절집 아래에서 닭과 술과 잠자리와 가무의 공간을 팔아서
살고 있고 주지는 옛날처럼 그 마을의 왕으로 대접받지는 못한다.
기독교는 십일조라는 현금 조달에 있어 대단히 유용한 조항을 장착하고 있어 불교만큼
현금 문제로 아쉽지 않다.
답답하다고 어느날 땅 속에서 "천년된 문건을 발견했다아~ 십이조라는게 있네!"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땅에서 불교는 1600년을 존재해왔다. 한국미술사 80%는
불교미술사라고 이미 앞서 이야기했다. 1600년 동안 축적되어 온 유무형의 관광 자원을
팔아 먹는 것이 가장 손쉬운 현금 조달 방법이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다른 대책은 없다.
그 수입의 많고 적음은 그 절집에 얼마나 많은 옛볼거리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경관 수려한 산에 자리하고 있다면 경관이 큰 자산이요, 국보나 보물 같은 것이 많다면
명성 자자한 고찰로 자리할 수 있다. 문화재관리법은 사찰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조율하고 결정하는 주무 기관이 문화관광부다.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진의 이 돌계단. 참 소담하고 아름답다. 꼭 보시기를.


2007년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국립공원입장료를 폐지했다. 그동안은 사찰 입장료가
국립공원입장료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장도 사실 수년간 그 사실을 몰랐다.
그것은 TV 시청료를 전기세에 끼워 넣는 비열한 짓거리에 버금가는 일종의 사기였다.
지리산 자락에서 아무 생각없이 절집 세 군데 돌면 두 당 만원씩 나간다.
일행이 4명이면 사만원 나갔다. '와 이거 비싸네'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던 기억은 난다.
그런데 어느날 국립공원입장료가 폐지된 것이다.
TV 시청료는 전기세 고지서에 기생하다가 이제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고지서 항목이 이른바 '문화재관람료'다.
지리산 자락을 끼고 있는 지자체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재관람료에 대한 관광객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원성의 이유는 이런 것이다.
노고단을 가려고 861번 지방도로를 타고 종주 도로를 오른다. 천은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이전 국립공원입장료 받던 그 매표소 자리에서 돈을 달라고 한다. 웃으면서,

"문화재관람료가 있습니다."
"저 천은사 안 가는데요?"
"그래도 천은사 부지를 통과해서 지나가셔야 하니 돈 내!"

화엄사 계곡을 지나 코재 넘어 무냉기로 올라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은 고전적인 지리산
종주 코스의 출발점이다. 화엄사 옆을 지나쳐야 한다. 이전 국립공원입장료 받던
그 매표소 자리에서 역시 화엄사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버티고 있다. 웃으면서,

"문화재관람료가 있습니다."
"우리 화엄사 안 가요. 연기암 들렀다가 노고단으로 등산해요"
"그래도 화엄사 땅을 통과해서 지나가셔야 하니 돈을 내셔야 합니다."
"아니, 그럼 매표소를 화엄사 입구로 옮기면 되자나요? 이거 뭐 통행료도 아니고 말이야!"
(약간 거칠게 나가본다.)
"매표소 자리도 저희 땅입니다. 돈 내!"









국립공원입장료가 폐지된 이후 속리산 법주사와 구례 화엄사는 원래 기생하던
요금에서 800원씩 인상해서 3,000원을 받는다.
문화재관람료를 받지 않는 덕유산은 올 1∼3월 23만3842명이 찾았다.
예년 평균(16만8519명)에 비해 39% 증가했다. 이에 반해 지리산 화엄사가 3000원의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지리산 국립공원은 32만5330명으로 예년 평균(35만2911명)보다 8% 줄었다.
39% 증가한 것도 놀랍고 8%, 그것도 연차적인 것이 아니라 단 몇 개월 만에 8% 감소한 사실도 놀랍다.
결국 절집 구경은 하지 않고 지리산만 가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절집 입장료 받는 매표소를 절집 앞으로 이동하면 되는 문제인데 그것을 하지 않고 있다.
문화관광부와 관리공단은 종용하고 있지만 사찰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자기들 땅이기 때문이다. 입장료에 준하는 지원금을 달라는 말이겠지.
문광부 입장에서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미울 것이고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자신들은
일단 '무료 맞고요'이니 답답할 일 없고, 지리산 자락 해당 지자체 홈페이지 게시판만
동네북이 된다. '산적들 좀 잡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글들이 수두룩하다.
화엄사 정도의 파워라면 막강한 신도 그룹이 있을 것이고 그들의 로비 능력은 탁월할 것이다.
선거라는 아킬레스건을 조계종은 쥐고 있다. 그래, 이래 저래 인민들만 계속 돈을 내면 되는 것이다.
원래 법과 권력은 가진자들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새삼스러운 현상도 아니다.
무엇보다 법이란 것이 힘 있는 집단에는 통하지 않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21세기 시장경제 논리로 보자면 집에 앉아 절간 앞마당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만 받아서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현대판 청복淸福이다.
어차피 절집의 자연 환경은 기본 아닌가. 아름다운 삶이다.









장기적으로 문화재관람료는 한국 불교를 회생 불능의 상황으로 몰고 갈
당장의 온실로 기능할 것이다. 이게 뭔 말이냐하면...
어떤 종교가 번성했느냐의 문제는 그 종교를 믿고 따르는 신도 수의 확장으로 가름할 수밖에 없다.
부처와 예수가 그리 가르쳤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예배당이나 절집의 현실적 존재 이유는
'사람을 모으는' 것에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교회와 절집을 만들지 않고 목회와 법회를 진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할 여력은 없다. 그냥 존재 자체로서 교회와 절집은 이미 있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미 절대강자다. 무엇보다 부시가 있지 않은가. 현실 세계의 절대 지배세력은
백색기독교남근주의다. 여전히 그렇다. 더구나 십일조와 교회 세습, 신도 머릿수대로
권리금 받고 교회를 양도하는 관행이 튼튼하게 자리하고 있다.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것이다. 불교는?
신도의 힘으로 절집과 종단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절집 구경하러 온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푼돈을 모아 살림을 꾸리고 있다. 이를테면 포교는 부차적이고 눈앞의 관광객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독약이다. 물론 문화적으로 개신교를 대하는 무신론자들의
입장과 불교를 대하는 무신론자들의 입장은 차이가 있다. 1600년 동안 이어져 온, 종교라기 보다
하나의 '생활 철학에 가까운 종교'이다보니 사람들은 불교에 부담 없이 접근한다. 그래서 그 본색이 엷게 변한다.
가혹하지만 솔직하게 평하자면 불교는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살짝 돌아가면 사진의 사인물이 보인다.
말사인 구층암으로 가는 길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놓쳐 버린다.
'뭐 절 생긴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하면서.
하지만 언젠가부터 개인적으로 화엄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진 포인트는
바로 이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야 얻을 수 있다.
때로 구경은 목적과 의식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너무 시각적인 만족감과
충격에 중심을 두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진은 대웅전 지나 몇 계단 오르는 발품을 팔아야 가능하다. 역시 기와지붕에 집착한다.
누군가 이 사진을 보고 화엄사를 찾는다면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그런 곳이 어딨어요! 다 뻥이야!"

그렇다. 사진이란 것을 전문적으로 찍지 않지만 가지고 놀다보니 결국은
사각형을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 하는 놀이더라. 같은 대상을 보고 있지만
같은 사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사각형을 확정하는 일이 사진 찍는 일의 51%다.
다른 사각형으로 사진을 만들면 아래와 같은 볼썽사나운 풍경이 된다.





앞에서 인용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사 시절로 돌아가보자.
당시 쇠파이프를 들고 정화淨化에 나선 스님들 모임 이름은 '자비회'다.
자비를 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지 그 깊은 뜻은 모르겠지만 그 자비회의
두목은 이른바 큰스님들이다. 절집을 찾는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큰스님들이다.
어찌하다가 이런 자비를 배후 조종하시는 분들이 큰스님이 되었을까?
이승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4년 5월 21일. 이승만은 어처구니 없는 개입을 결정했다. 대처승은 절집을 떠나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것도 불교계 정화淨化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대처승. 살림 차리고 아내와 자식을 거느린 스님을 이르는 말이다. 반대로 비구승이 있다.
대처승은 천태종 계열이 많았다. 일본은 천태종이 주류 종파다. 이승만이 나름대로 반일의 선봉에 선
대통령이라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풍기문란과 왜색근절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1954년 5월 21일 이후 400여 명의 비구승이 7천여 명의 대처승을 내쫓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집을 포함한 재산을 모두 빼앗는 것이다. 400명은 아무래도 머릿수에서 불리하다보니
비구승들은 인원 동원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승려로 부적합해 보이는 이력의 사람들이
졸지에 머리 깍고 대처승 쫓아내는 전쟁의 용병으로 대거 등장한다.
'절 빼앗기 전쟁'은 그렇게 제법 길고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감내해야 했고
당연히 비구승들의 승리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그런 역사를 가진 한국 현대불교이다보니
뭔 문제가 생기거나 해결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일단 쇠파이프를 드는 것이다.
그 주인공들은 일부 세상을 떠났지만 그 라인이 바로 파이프라인인 것이다.
지금 한국 불교계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큰스님들 중 일부는 중생제도를 위한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이판사판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갈 때까지 갔고, 막장이고 어찌 해 볼 도리도 없는데 선택을 강요받을 때
주로 사용한다. 뭘 선택하건 어차피 쪽박 차는 것이고 목숨을 내놓고 싸우다보면
뭔 방도가 보일 것이란 막무가내의 결정판이다.
원래 이 무지막지한 말의 시작은 화엄사상에서 출발한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여기서 理는 理法界를 가리키며 事는 事法界를 가리킨다.
저 앞 이장의 화엄경 강의 대목의 법dharma을 상기하자.
理는 법의 본체적 측면이며 事는 법의 현상적 측면이라고 이해하자. 이장도 잘 모른다.
천태종의 영향이 강한 일본은 이 이법계理法界와 사법계事法界를 심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화엄종의 영향이 강한 한국 현대불교에서는 본래 철학 개념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의 원리를 승가조직의 역할분담에 적용했다.
수행과 진리탐구에 용맹정진하는 수도스님들을 이판 또는 이판승이라고 불렀고,
절집이나 조직의 잡무와 경영을 전담하는 행정직 스님들을 사판 혹은 사판승이라 불렀다.
불교가 고생스럽던 시절에 이판승과 사판승은 역할 분담을 잘 이루고 지켜 절집을 지켰다.
조선의 건국은 신진 사대부인 유학자의 정권이 창출되었단 소리고 그동안 온갖 사회적 악습의
근원지로 지목 받은 불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이성계의 말머리 돌리기 놀이는
하루 아침에 불교를 지배세력에서 탄압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승려들은 천민계급으로 전락했다. 생존을 위한 활로를 개척해야했다.
우선은 절집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불법의 맥을 잇든 말든 할 것 아닌가.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노가다에 나선 사판승들,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雜役에
종사하면서 사원 경제를 유지했다. 한편으로는 은둔隱遁과 참선이라는 용맹정진 이외에는
집중할 일이 없었던 스님군도 있었으니 이들이 이판승들이다.
결국 사판승과 이판승이 둘이 아닌 하나였다. 불이不二 사상. 화엄사상이다.
그래서 불교를 지켜낸 것이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라는 화엄정신으로 바라보자면,
이理와 사事는 상대방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일체불이一體不二다. 理가 事고 事가 理다.
이판을 하건 사판을 하건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하나다! 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불교는 이판과 사판이 패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불교를 정통으로 고집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이판승은 거의 선승이다.
벽을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사람들이란 말이다. 수행정진은 좋은데 이 스님들이 은연중에
사판승들을 속세의 잡역이나 처리하는 '퀄리티 떨어지는 것들'이라며 약간 낮추어 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누군가 낮아지면 누군가는 높아진다. 거룩해지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무식해진 것이다. 무식하긴 사판승들도 한가지다.
그러나 사판승들은 현실적인 힘(권력)을 가지고 있다. '너거들 밥을 누가 먹여 주는데...'라는
이판승을 향한 인식이 팽배하다. 이판승들이 경제적으로 빌붙어 있는 것이다.
성철 스님이 이 난장판에 뛰어 든 장면은 이런 연유에서 발생한 하나의 '이변'이었다.
사판승들이 쇠파이프 수련에만 정진하고 대중들이 불교계를 점점 우습게 바라볼 무렵,
머리털 없기는 똑같은데 군바리 출신의 대머리가 등장해서 1980년 10월 27일 새벽 4시에
전국의 절집을 점령하고 스님들을 안기부와 합수부로 끌고가서 두들겨 패고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자!'라고
쥐어박고 한날 한시 한 마당에 모아 놓고 그 치욕스러운 불교계 정화淨化 궐기대회까지 열게 한
그 사건, '10.27법난'과 같은 낭패를 당하고 보니 사판승들은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판승이 이 난세를 잠시 맡아줘야 했던 것이다.
성철 스님은 1991년에 제7대 조계종 종정에 취임한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궁금하다. 왜 산을 내려 오셨습니까?
이판도 사판도 아닌 그 아사리판을 어떻게 접수하고 정리한단 말입니까?









결국 한국 불교계는 철학적 개념이 거세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공동경비구역이다.
관람객들은 이병헌과 송강호가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난맥상이다.
1600년 조선 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
해결을 위한 출발은 역시 인식의 전환에 있다.
우선 불교는 스님들의 것이 아니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냥 당연하지요'라는 언어적 긍정이 아니라 실천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절집도 조계종이나 스님들 소유물이 아니다. 앞서 간 수많은 진정한 수행자들과
그 돌 하나, 기둥 하나씩 세운 민중들이 진짜 주인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이룬 다음에 스님들은 진짜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무형의 관성과 타성에 빠져 있다. 활기가 없다. 인재가 없다.
모두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1600년 동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누가 그 소리에 귀를 귀울이겠는가. 근본은 변하지 않아도 말하는 방법은
변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 고고한 자태로 당신들만의 법문을 낭송할 것인가?
근본적으로 속가의 인간들이 스님들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개신교를 보시라. 목사만 설교를 진행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속세의 뛰어난 인재들보다
결코 탁월하지 않다. 이른바 '비출가 불자들'의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
재가법사제도라고 하나? 출가한 사람과 속세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한다면 미래는 암울하다. 21세기에 김삿갓을 뛰어 넘는 시조시인이 나오겠는가?
불가능하다. 2007년 현재 영특한 두뇌를 가진 대부분의 인재들이 바라보는 지향점은 다른 곳이다.
지금 각황전 같은 건축물을 만들 수 있나? 없다. 100층 넘어가는 건물은 잘도 올리지만
각황전 같은 목조건물을 현대 사람들은 만들 수 없다. 천 년 전에 당신들이 사유재산처럼 생각하는
그 많은 건축물과 불상과 탑을 만든 민중들은 당대의 인재들이었다.
그 당시 그들이 구사했던 기술과 상상력은 그 시대 초절정의 하이테크이자 최첨단 산업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력들이 대거 투입되었던 것이다.
왜 원효와 의상 같은 뛰어난 스님이 나오지 않는가? 같은 맥락이다.
이런 현실을 스님들은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문화로서 불교는 가능해도
종교로서 불교는 힘들 것이다.









문화재관람료 문제로 조계종 자체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높아지니
이런 공익 포스터도 만드는 모양이다. 내 눈에는 스스로 문화와 미술품을
영구 보관 중인 박물관으로 자처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선종은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
스님들이 절집에 경제적 기반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력으로 자급자족했다. 라이프스타일이 그랬던 것이다.
종교가 세간법과 속세 시스템에 의해 유지되면 절대, 네버, 에버, 순수해질 수 없다.
역시 자급자족 수평적 점조직이 오래간다.
인터넷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언어세계는 곧 그의 사유세계의 폭이다."

도올 김용옥의 이 문장을 두고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고민중이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아전인수의 해석이 가능한 문장이다.
며칠 사이에 상황과 경우에 따라 저 문장을 거부하기도 했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뜬구름 잡는 소린가...
집단으로서 한국 불교계는 저 비판적인 문장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는 화엄사를 여전히 사랑한다.
비록 옛맛을 잃어가리란 것은 눈 앞의 불을 보듯 뻔한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화엄사를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사랑이 넘쳐 오늘 이렇게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내렸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글이 많이 무거웠다.
글을 시작할 때 우려했던 그대로 역시 내我가 너무 많이 개입된 글이다.
후회는 하나 철회는 하지 않겠다.
단, 앞으로는 좀 조심하겠다는 말씀과 불편하신 내용이었다면 합장으로 사과드립니다.

다음 주, 화엄사 2편에서 좀 더 밝은 분위기의 여행 중심적인 내용으로
오늘의 오버를 만회하겠다는 흰소리를 남기면서 나도 지치는 이 긴 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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