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단풍본색丹楓本色 - 피아골 2

마을이장 2007.11.15 22:36 조회 수 : 14204 추천:811



피아골은 왕시루봉과 불무장등 사이에 위치한 계곡이다.
산 아래에서 올라오자면 연곡사燕谷寺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피아골 계곡으로 넘실댄다.
그렇다. 피아골은 많은 전설과 역사가 뒤범벅되어 있다.
흘린 피가 너무 많아 '피血'라는 의미에서 골짜기 이름이 생겼다고도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피아골 초입의 마을 이름은 직전稷田마을이다. 식용 피稷를 심었던 골짜기란 뜻에서 마을 이름이 시작되었고,
계곡 이름도 그로부터 연유한 것일게다.
여하튼 이 골짜기는 역사적으로 사람 내음이 물씬하다.
이제 그 이야기들 중 일부를 들춰내면서 산을 내려가 보자.
계곡이 유난하면 사람의 흔적도 유난한 모양이다.









씨받이.
인간계에서 침묵으로 용인했던 가장 잔인하고 이기적이었던 거래.
피아골의 씨받이 여인 이야기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전혀 임권택적이지 않다.
칸느영화제 따위가 한때 애호했던 오리엔탈리즘에 걸맞는 그런 뻔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오히려 피아골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이 아직 살아 있다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다.
계곡을 내려오면서 나는, 과연 어디 즈음이 옛날의 '종녀촌種女村' 터였을까 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종녀촌. 씨받이 여인들이 아예 떼로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다. 이곳 피아골에서.
하지만 전해 오는 이야기는 성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내용이 전혀 아니다.
치가 떨리는 반인간적 착취의 극단이다.









種, '씨 종'이다.
하나의 마을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은 충족되어야 한다.
적정 인구가 거주해야 하고, 그 수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대여섯 명이 살았다가 10년 후에 사라졌다고 한다면
마을村이라 칭하지 않는다. '종녀촌'이라는 마을 이름 자체가 섬뜩하다.
종녀촌 이야기의 정점에는 성신性神어미라 불린 절대 권력자가 자리하고 있다.
성신어미는 종녀種女들과 시동侍童들을 거느리고 마을을 이루었다.
물론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마을은 아닐 것이다.
아이 낳지 못하는 집안의 후사를 잇는 것이 씨받이의 임무 아닌가.
인근 마을 보다는 원행遠行을 나갔을 것이다.
'주문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이 일은 보안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이 일은 기간과 일의 성공 여부가 명확하다.
익명의 마을에서 종녀촌으로 기별이 오면 성신어미로부터 하산을 명 받은 한 여인은
야음을 틈타 익명의 대갓집 샛문으로 들어서거나 부근 안가安家에서 밤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 여인은 10개월 후에 재물을 안고 오거나 아니면 딸을 안고 올 것이다.
그 재물과 딸은 그 여인의 소유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성신어미가 차지한다.
아들을 낳아 혈육의 정을 끊기고, 쫓기듯 돌아오는 경우라면
차라리 파아골 계곡물처럼 흐르는 세월에 기대어 견딜만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딸을 낳는다면 종녀 자신의 업은 대를 잇게된다.
씨種를 원했던 집안도 좋을 것 없고, 씨받이 여인도 좋을 것 없는 거래지만
성신어미는 잃는게 없다. 아들을 낳지 못해 당장 재물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장기적으로 성신어미는 '생산시설' 하나를 더 장만한 것이다.
상상하건데 종녀촌의 시모始母 또한 씨받이였을 것이다.
한恨이 깊어 그랬을까? 왜 그 맨 처음의 여인은 씨받이들을 모았을까?









씨받이 여인은 천한 신분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 잘 낳는 과부도 씨받이로 동원되었다.
관상과 신체가 아들 잘 낳게 생겨 납치 당해서 종녀촌으로 들어 온 여인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 한끼니 힘든 집안에서는 몇 푼의 돈이나 무명 끝동 몇 마에 딸을 팔았을 것이다.
'가서 따순 밥 실컷 먹어라'
딸을 팔아 치운 어미의 기도는 아마도 이 이상의 내용은 없었을 것이다.
종녀촌 내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 여인과 그렇지 못한 여인으로 나뉘었다.
돈에 따라 어떤 여인이 원행을 나갈 것인지 정해졌다.
아들 잘 낳는 여인은 성교시의 신체 변화로 가늠한다. 피부는 보랏빛을 띠어야 한다.
입술은 진홍색에서 자주색으로 변하고 종극에 가서는 입술이 굳어지는 여인은 곱절의 보수를 받았다.
흰 면포로 월경피를 받아 그 색이 금빛일 때 아들을 원하는 집안의 남자는 어두운 방문을 열었다.

몇 백년 전 어느 가을날.
핏덩이 딸을 안고 피아골 깊은 골짜기로 돌아 오는 길.
여인은 투명하게 빛나는 붉은 단풍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1월 어느 날 힘겹게 눈 쌓인 이 골짜기를 걸어 내려갈 때에 여차하면 도망갈
말미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망한 기대를 품기도 했을 것이다.









종녀들의 삶은 비참했지만 마을의 절대권력자 성신어미는 그 모든 것의 소유자이자
세상에서 가장 반인간적인 게토ghetto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밤이면 성신어미는 스스로 가장 난삽한 성性도착적 파티의 주재자가 되었다.
이 性스러운 의식은 종녀촌의 안녕과 번성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되었다.
성신굴性神窟에 횃불과 모닥불이 밝혀지면 제단에 좌우로 세워진 성신상과 남근상이
둘러 앉은 종녀들의 얼굴에 그림자로 일렁였을 것이다.
성신어미는 주문을 외우고 춤을 추고 스스로 한바탕 트랜스trance 상태로 자신을 몰아갔다.
그것이 강신이건 접신이건 목적은 하나였다. 자신의 탐욕을 종녀들의 생산 능력 증대라는
마을의 대의로 둔갑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성신어미는 그 사적 제의를 종녀들이 보는 앞에서
거느리고 있던 시동들과 광란의 혼음을 즐기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 한바탕 색욕의 카니발을 뜬 눈으로 지켜본 종녀들이 부디 아랫배에 욕정을 느껴
그 아랫배로 아들씨를 생산하라는 추악한 기원이 깃든 의식인게다.
짐승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참 가혹한 인생이 많다.
그래서 피아골 단풍은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물 가까운 곳에 종녀촌이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런 게토에는 침입자도 없었을 것이다.
치외법권도 유분수고 인면수심도 결국 그 끝은 있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이 따로 없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산객들에게 이 길은
무간지옥이 아닌 선仙계로 진입하는 입구인냥 신비롭기만 하다.
나무는, 계곡은 그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계곡과 나무들은 아직도 씨받이의 현대적 변형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이제 과학이라는 근사한 외형으로 그 일이 진행되고 있다.
자본이 가장 유능한 대목은 야만을 문명으로 화장하는 둔갑술을 발휘할 때이다.
종種의 엔딩크레딧은 멸滅이다.
그것이 순리다.









단풍에 웃고 전설에 울면서 계곡을 내려 오는데 저만치 다리가 보인다.
피아골대피소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다.
뜨거운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좀 쉬었다 가야겠다.
함선생님을 혹시 만나뵐 수 있을까...









피아골대피소 해발 850m.
1984년에 세워진 대피소다. 산중의 이 대피소도 주소는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 386번지 피아골 삼거리. 하지만 뭔 의미가 있겠는가.
적요寂寥하다. 적적하고 고요하다라는 '寂寥'는 피아골대피소를 위한 맞춤 형용사다.
사람 발길이 많은 주능선 코스에 자리한 대피소가 아니라 찾는 사람도 많지 않다.
지금같은 단풍철이 가장 번잡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피아골대피소에서 사람은
이 날 내 눈에는 '구성요소'로 보였다.
피아골대피소에 전기가 들어 온 것이 2006년이다.
전기 신청해도 산간오지라 거절당하기 수 차례인데 이동통신사 기지국이 인근에 들어서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의 요청이 아닌 놀러 온 외지인들이 '전화 좀 터지게 해 달라!'고
외장을 지르자 전기가 들어 온 것이다.
피아골대피소에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이 잘 된 일인지는 세월이 좀 더 흘러 판단을 해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이곳에서 살고 있는 대피소 사람들에게 전기는 정말 소중한 이기이다.
치밭목대피소만 아직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피아골대피소는 규모가 작다. 수용인원은 50여 명 정도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직영하는 곳이 아니라 드물게도 민간이 운영한다.
그래, 건물 분위기도 '관리공단적'이지 않다. 개인적으로 피아골대피소의 '엉성함'을 좋아한다.
계곡 속에 제법 너른 마당이 들어앉은 이곳의 기운은 사람을 평화롭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오래된 활엽수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강하지만 부드럽다. 강해서 따스하고 부드러워 숲과 하나된다.

남부군 지도자 이현상李鉉相은 지금의 대피소 자리에서 연설을 하였을 것이다.
아랫쪽으로 천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분지형 마당이 펼쳐져 있다.
그렇다, 종녀촌의 반인간적 전설을 지나오면 현대사의 협곡 속에 버려졌던 수 많은 젊은 주검들과
만나게 되는데 빨치산이 바로 그들이다.









지리산 자락에 폭 안긴 마을에 터를 잡고 지리산과 관련된 자료를 뒤적이다보면
빨치산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피할 수 없이 자주 만나게 된다.
그 이야기들 중 일부는 이전에도 읽은 것들이지만 지리산 자락에서 읽는 픽션과 논픽션은
모두 그 '현실성'이 남다르다. 생생하다는 표현이 이토록 소름 돋듯이 자극적인 경우도
없을 것이다. 구례읍내 봉동리 구석방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에서
봉동리의 과거와 현재는 하나의 반죽처럼 뒤엉키고 되살아나 과거가 현실같고 오히려 현재가 비실재적인 느낌이다.
봉동리는 지금과 다를 바 없고, 산책을 나가곤 했던 봉성산에 누워있는 수 많은 주검이
포연과도 같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아연히 말을 건네는 듯 하다.
금년 여름 그 첫 발굴이 시작되었다. 드라이브 길에 무수히 넘었던 토금고개는 고사리가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날 한시에 삼십여 명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던 기록도 있다.
지리산과 마주하고 있는 백운산은 현대사의 가장 첨예한 능선암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외면하고 지리산 자락을 논할 수는 없다.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백여 미터 윗 마을 아파트 어느 한켠에 불이 켜져 있다면
<빨치산의 딸>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노인이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
피아골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지리산 자락 이야기에서 이미 사라진 대다수의 그들과
절대 소수의 생존자들을 피해가기는 힘들 것이다.

잠시 옆으로 빠져서 '큰산아래이야기'에 대해 변명하고자 한다.
지리산에 관한 이야기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최화수 선생님, 이름 없는 향토사학자 선생님들,
이태, 정지아, 정순덕, 조정래, 박경리, 김훈...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지리산을 언급했다.
앞의 종녀촌 이야기나 이제 전개될 이야기는 모두 이 분들의 땀을 훔쳐 조금 각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걱정스러운 것은 독서에 인색한 이장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 집중력 있게 자료를 계속 읽어 낼 수 있을지이다.
피아골이건, 만복대건 이야기를 '이미' 해버린 다음에 수정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래서 '큰산아래이야기'는 예상보다 그 진행이 쉽지 않고 속도 또한 느리다.

정지아의 손을 먼저 빌린다.









1948년 12월 31일, 이옥자李玉子는 갓난 아기를 안고 질매재에서 밤을 보냈다.
질매재는 지리산 문수골짜기에서 왕시루봉을 넘어 피아골로 넘어 가는 길목이다.
해발 1000m의 산허리에서 그믐밤을 보낸 것이다.
정지아는 <빨치산의 딸>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군당 아지트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마침 아침 준비를 하느라 콩을 삶고 있었다.
새해 첫날이었다. 쌀이 떨어졌다고 다들 삶은 콩 한 줌씩을 아침밥으로 배식받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저만치 시아버지의 모습이 스쳐갔던 것이다.
"아버지!" 그녀는 포대기가 땅에 질질 끌리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시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시동생이 "형수!" 하고 외치며 뛰어왔다.
그녀가 막 시집왔을 때 젖먹이였던 일곱살 짜리 막내 시동생과 아홉살 짜리 시동생 둘이
시아버지보다 먼저 달려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반가워서 야단이었다...>

정지아의 소설을 읽다가 '이건 좀 소설로서는 값이 떨어지는 듯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지아 스스로도 세월이 흘러 이 소설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토로했지만 이를 소설이라기 보다
실존했던 인물이 등장하는 전기나 하나의 '기록'을 대한다는 자세로 읽는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
더구나 구례 땅에서 읽는 구례에서의 이야기는 각별한 것이다.
예정하지 않았던 피아골에서의 가족 상봉은 기쁨인가 슬픔인가?
'입산'으로 상징되는 저항은 과연 자의적 선택인가 의지와 무관한 쫓김인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오십여 년 전에 일어났던 상봉은 그래서 애틋하다.









축제가 있었다.
세력이 거의 소멸되어 가던 빨치산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이른바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이다.
그는 피아골에서 그의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의식을 열곤 했다. 그는 무공훈장을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 중 아닌가. 북쪽과 단절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북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하해서 지리산에 자리를 잡았던 것 또한 이현상의 결정이었다.
상훈식은 빨치산 부대의 사기 진작을 위한 하나의 이벤트였다. 줄어들 대로 줄어든 300여 명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고 연단에서 이현상이 실물 훈장이 아닌 '훈장을 상신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발표하는 것으로
상훈식은 거행되었다. 짐작하건데 이현상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남과 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자신의 병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의식과 소속감이었다.
1951년 이후 사실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부대였다.
1953년 7월, 휴전협정문서가 만들어졌다. 적진의 후방에 남겨진 물자와 장비의 철거, 전사자의 시신 발굴과
반출에 관한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었지만 지리산을 중심으로 여전히 '전쟁 중인' 빨치산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회담 막바지에 유엔군측은 후방 게릴라의 안전 철수를 요구했고 북한 노동당은 묵살했다는 기록만 있다고 한다.
짐작하건데 이는 '하산'하여 이후 남한에서 지하조직을 재건하는 일을 수행하라는 요구를 암시했다.
협정 사항 외의 일이니 추후 발생하는 일은 북한측의 책임이 아니라는 복선도 깔려있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남부군은 어떤 정치적 배려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 버려졌다.
그 수뇌부가 이른바 남로당 출신이었다는 연유였을까?
그가 죽기 전인 1953년 2월, 북한은 이현상에게 영웅 칭호를 내렸으며 영웅훈장을 지리산으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평양 신미동에 애국열사릉이 1968년에 만들어졌다. 이현상의 묘지가 제1호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나의 질문은 지극히 단순하다.
왜?









상훈식이 있던 날 밤.
피아골에서는 축제가 벌어졌다.

"...그날 밤 피아골에선 춤의 축제가 벌어졌다.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둘레를 돌며 <카추사의 노래>와 박수에 맞춰 남녀 대원들이 러시아식
포크댄스를 추며 흥을 돋우었다.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도 흥겨웠다."

- 이태의 <남부군> 394p

영화 <매트릭스 2 - 리로디드The Matrix Reloaded, 2003>에서 '시온의 축제' 장면이 길게 펼쳐진다.
죽음을 각오한, 예정한 사람들의 축제는 격렬한 춤과 혼음을 상징하는 코드들로 점철되는데,
나는 시온의 축제 장면을 보면서 전혀 퇴폐와 문란함을 느낄 수 없었다.
카메라는 지극히 리바이스 광고적인 세련됨과 슬로우모션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빨치산이 생각났다. 극한적 상황에서 일반의 도덕적 잣대는 무망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리산의 빨치산 축제가 '소름 끼치도록 야성적'이었다는 대목은 그래서 충분히 공감되는 장면이다.
젊은이들이었다. 빨치산은 이른바 기본계급과 인텔리켄차로 양분되는데 '포크댄스'를 추었다는 기록에서
이들 좌파지식인들이 유학파 또는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대학 출신으로서 숨길 수 없는 정서를 품고
있었음이 갈파된다. 정말 '아름다운 밤'이었을 것이다.









최문희라는 여성 빨치산이 있었다.
그녀는 남부군의 문화지도원이었다. 평양 출신이었고 20대 젊은 여인이었다.
오페라 가수 출신이다. 평양에서 공연한 카르멘에서 카르멘 역을 맡았을 만큼 미모와 재능이 출중했던
여성이다. 이 문화지도원의 주도하에 피아골의 축제는 진행되었다.
1952년 1월 20일. 눈밭 속에서 최문희는 문화공작대원 3명과 함께 생포되었다.
이태의 <남부군>에서 최문희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끝이난다. 그녀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갔다.
1989년 10월7일. 지리산 치밭목 산장.
자정이 지나면 음력 9월 9일이었다. 숨진 날을 모르는 죽은 자를 위해 제사를 모시는 그날.
10년째 매년 음력 9월 9일이 되면 지리산을 찾아 이 산에서 숨진 원혼들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는
여인이 있었다. 남부군 출신이라는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하지만 그 여인은 빨치산 뿐만 아니라 토벌 군경, 등산하다 조난당해 죽은 원혼까지 모두 달래준다고
제사를 모셨다.
자정이 되고 그 여인은 산장 문을 열고 나가 제물들을 운반했다.
통돼지, 생선, 떡, 막걸리, 과일, 밥, 나물... 소복을 입은 60대 후반의 그녀는 제문을 읽고 술을 올리고
큰 절을 올린 뒤 심연의 먹墨바다 지리산을 말없이 한참 바라보았다.
치밭목 산장지기 민병태씨의 전언에 의하면,
사는 곳은 서울이고, 음악 레슨으로 생계 유지를 유지한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공부했고 일본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지리산 박사 최화수 선생은 이후 영화 남부군 개봉 후 이태 선생으로부터 그 여인이 바로 피아골 축제의
그 여인, 최문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살아 있었다.









피아골 뿐만 아니라 지리산 골마다, 능선마다 우리는 빨치산과 관련한 이야기를 만날 것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의병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임진년 어느 날 이 산에서 일본군 조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의병 이야기도 만날 것이다.
이 산은 피를 많이 머금고 있다. 그것은 이 산이 그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역사가 그리한 것이다.
이현상의 사망과 함께, 아니 실질적으로는 그 일년 여 전부터 남부군은 궤멸되었고 역사 속으로 퇴장당했다.
그들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다.
그들로 인해 목숨을 잃은 남편이나 아버지를 잃은 가족 또한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이장만 해도 아버님 위로 형제 두 분이 빨치산에 의해 돌아가셨다.
80년대를 걸어 나오면서 우리는 잃어 버린 많은 이야기들을 복원했다.
화염병을 들고 서 있었던 나는 보훈대상자 집안의 자손이었고 방패와 곤봉을 들고 서 있었던 그때 그 전경은
빨치산의 자손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단 한 번도 반복되지 않았다.
매번 새로운 학살자와 새로운 주검을 등장시켰다.
80년대 후반 그 당시 나는 내 집안의 내력과 나의 머리 속이 충돌하는 그런 세상을 가능하게 했던
그 뿌리가 무엇인지 헤매어 찾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2007년 11월 13일 점심 무렵.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어제.
이장은 화개장터 인근의 팥국수 집에서 뜨거운 팥국수를 먹고 있었다.
1953년 9월 17일 화개장터 앞 섬진강 모래밭. 빗점골에서 의문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한 빨치산의
시신이 태워졌다. 48세였던 그 남자의 이름은 이.현.상.
어제 팥국수는 유난히 뜨거웠다.









현실의 피아골로 돌아오자.
피아골 산장 마당으로 내려서자 산장 앞에 우두커니 앉아 계신 함태식 선생님이 보였다.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1970년에 노고단산장이 세워지자 직장 그만 두고, 가족도 인천에 남겨 두고 단신으로 짐 싸들고
지리산으로 내려 온 사람. 노고단 산장지기 20년, 1989년 노고단산장이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영으로
바뀌면서 쫓겨난 이후 왕시루봉 외국인 별장촌에 머물다가 지금은 피아골대피소에 자리하고 있는
전설적인 지리산지기.
2007년이다. 선생이 지리산에 머문지 37년이다. 지리산을 떠나서는 숨 쉴 수 없는 분이다.
선생에 대한 그 긴 이야기는 노고단을 다룰 때에 인터뷰와 함께 소개할 것을 약속드린다.

"함 선생님 아니십니까?(넙죽)"
"어디서 오셨는가?"
"사무실은 오미동에 있구요, 잠자리는 구례읍에 있습니다. 봉동리요."
"내가 태어난 곳인디..."

때때로 나는 이곳에서 전설 속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곤 한다.









대피소에 좀 머물렀다.
커피도 마시고 백련차도 마시고 함선생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함선생님을 뵙고 난 후 산을 내려가서는 버스 시간이 좀 넉넉했던 관계로 대피소 주변의 화려한 단풍숲을
촬영했다. 긴 산행이 예정되어 있지 않었던터라 방심하고 셔터를 눌러댔고 1GB 메모리가 꽉 차버렸다.
이런... 이제 절반도 못 왔는데. 한번씩 메모리 에러가 나면서 아주 쓸 수 없게 되어 버린 경우가 있어
나는 1GB 이상의 메모리는 좀 겁이 난다. 소중한 1GB도 날리고 나면 지독한 후유증이 오는데
4GB, 8GB 메모리카드 에러나면 아마도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가진 것은 고작 64MB 아주 오래된 메모리 2개. 파인더 상태에서 이미 찍은 사진 70여장을 지웠다.
그리고 64MB 2개를 우선 소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좀 찍긴 찍은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발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오늘 풍광이 워낙 그랬던 모양이다. 아껴 찍자.
대피소 주변은 아주 평화로웠다.









함선생님께 조만간 연락드리고 꼭 찾아뵙겠다고 인사드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올라왔다.
드문 드문하던 인적은 이제 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피이골대피소를 종점으로 삼고
오르는 길일 것이다. 단풍은 피아골대피소 아래로 내려갈수록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피아골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여전히 선명한 녹색들과 어울려 있기 때문이다.
이제 거의 완만한 내리막이다. 그냥 계속 이런 풍광을 즐기면서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흥겨운 산책길처럼.









1992년 9월20일.
피아골의 전형을 볼 수 있었던 날. 앞선 이야기의 어두운 춤판이 아닌 밝은 축제도 피아골에서 벌어졌다.
혼례식이다. 바로 함태식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함천주군(당시 32세)이 부산의 여성 산악인 오문순(31세)양과
백년가약을 맺는 축제였다.
함선생님이 혼주인 결혼식 아닌가. 함천주군도 산사람이고 예식은 당연히 산에서 해야지.
피아골 마지막 마을인 직전부락의 '마지막 집'인 '구암산장' 뜰에서 야외 결혼식으로 진행되었다.
구암산장 뜰은 산상(山上)이나 다름 없어 통상 이 결혼식을 '산상 결혼식'이라고 이야기한다.
난리 북새통이었을 것이다. 전국의 좀 논다하는 하객들 300여 명이 몰려들었고
주례 선생도 등산복 차림이었는데, 당시 광주 '거시기 산악회' 회장이자 전국인권변호사협회장이셨던
이돈명 전 조선대 총장님이 바로 그 주인공. 주례사의 한 대목도 지리산적이다.

"그대들은 지리산 자연의 섭리대로
이 세상을 맑게 가꾸고,
밝게 지키는 등불이 되기를 바라오."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라,
카메라 밖의 산행객들 모두 쫓아내고 혼자 이 계곡을 즐기고 싶었다.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몰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들은 꼭 소주 냄새가 진동한다. 떠든다.
심지어 시절에 맞지 않게 "야~ 호~~~" 도 한다. 돌겠다.
요즘 누가 산에서, 특히나 국립공원 1호 산에서 '야호'를 외친단 말인가.
반달곰이 뭐라 그러겠나.

"아 ㅅㅂ 너거만 사나!"









피아골은 계곡으로 진입이 힘들다.
물가로 내려서기 쉽지 않다.
삼홍三紅이라고 했다.
산이 붉어 산홍山紅
그 산을 물이 받아 안아 수홍水紅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얼굴까지 붉다하여 인홍人紅.









구계포계곡을 흔들다리로 건너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119를 부를까 하다가 11월 중순이면 불길은 잡힐 듯 하여 그만두었다.














색色은 해발 800m 이하에서 더 화려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해발 1100m에서 피아골대피소까지의 원시림 계곡이 더 좋았다.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에 적합한 수식어를 찾는 것은 무망하다.
단풍 한번 오지게 겪어 본 것이다.









아직 2.5km? 도대체 이 계곡은 언제 끝이 난단 말인가.









지그재그로 계곡을 건너는 마지막 다리를 지난다.









잠시 후 직전 마을까지 이어지는 신작로 같은 길이 나타난다.
실질적인 산행은 여기서 끝이 난다. 길이 넓어지고 사람도 많아진다.
다리가 팍팍하다. 내리막은 허벅지보다 발목이 아프다.









후반부로 올 수록 산행처럼 타이핑하는 나의 손목도 시리다.
더 이상 쏟아 낼 이야기가 없다. 더 있어도, 더 이상 자료를 뒤적이기 싫다.
이제 산행도 타이핑도 막바지다. 무엇보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지구력이 떨어지는 것은 넘쳐 흘러 내리는 글이 아니라 짜집기하는 글이라 그런 것이다.
지식이 박하고 노력이 미약하니 노년까지 책을 들여다보아야 할 팔자다.
그것은 독서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형벌과 같다.
무엇보다 피아골 산행을 한지 보름이 훌쩍 지났다.
주민 여러분들은 내년이나 되어야 오늘 이장이 주절거린 풍광들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기동력 없어 죄송하고 미리 알려드려 함께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또 송구스럽다.

직전 마을 첫 식당과 민박집 근처까지 내려오면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한 시간 또는 두 시간 간격이다.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평상에 가방을 내려 두기 미안해서 음료수 하나를 사 먹었다.
보통 이런 시간에는 카메라를 들고 오늘 산행을 일별한다. 느낌이 온다. 제법 건질 것 있겠다...
버스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버스가 올 기미가 없다.
무릇 버스란 예정된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하고 여유있게 정차하다가 신속하게 출발해야는 것 아닌가?
10여 명의 산객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4분을 남겨 두고 식당 주인이 묻는다.

"버스 기다려요?"
"예. (아니 그럼 버스 팻말 아래에 서 있는 이 뻔한 사람들이 뭐 하는 것이겠나?)"
"여그 버스 안서는디. 저 아래 만남으 광장에 서는디."
"예? (아니 그것을 이제 이야기하나? 물론 당신이 그 말을 해주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좀 너무 한 것 아닌가? 이런 식이 장기적으로 직전 마을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은가?)

뛰었다.
여러분, 직전마을에는 버스 팻말만 있고 버스는 서지 않습니다.
산행 끝에는 직전 마을에서 10분 아래 있는 만남의 광장까지 내려가십시요.









나른한 몸을 버스에 실었다.
구례읍으로 가는 버스다. 2,500원이다. 좀 비싸다.
연곡사 지나서도 계곡은 8km 정도 더 이어진다. 그리고 19번 국도로 들어선다.
새벽부터 오후 2시 넘어 까지 산 속에 있다가 만나는 섬진강이 반갑다.
외지 사람으로 보이는 여성 산객이 홀로 창밖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 속을 나는 알 것 같다.
17개월 전에는 나도 당신처럼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다시 오지 않기 위해 나는 지리산으로 와 버렸다.









굶었으니 먹어야겠다.
영실봉. 전화번호 보이지요. 지역번호 061.
갈치 찌게가 주 메뉴다. 여름에는 녹두 넣고 끓인 삼계탕도 한다.
갈치 구이도 있는데 그냥 갈치 찌게가 좋다.
지리산닷컴 형이 2002년 5월에 이장을 광주 행사장에서 납치해서 야밤에 구례에 감금시킨 다음 날
처음 데리고 간 식당이다.

"뭔 산골에 갈치 찌게요?"









갈치 찌게도 좋지만 밥맛이 탁월한 식당이다.
주문 받고 무쇠솥에 밥을 하기 시작한다. 항상 햅쌀밥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정말 밥이 윤기가 자르르하다. 듣자하니 일본의 오래된 여관이나 식당들은 손님이 음식을 주문하면
그때 쌀을 도정하고 밥을 하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 그 맛이 어떨까?
우리 식당들도 이런 아이템은 받아 들여야 한다.
하지만 영실봉 아주머니에게는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냥 원래 그렇게 '장사 했시유'.









도시에서 파는 몇 만원짜리 갈치 조림이나 남대문 갈치 조림은 밥도둑 노릇하느라 양념 맛이 강하다.
하지만 영실봉의 갈치 요리는 조림이 아닌 말 그대로 '찌게'다. 국물이 시원하다.
나는 그 비결이 두껍지 않고 얇고 넓게 썰어 넣은 무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매일 아침 영실봉으로 그날 사용할 갈치가 배달된다. 하루는 아침을 먹은 적이 있는데 제법 큼직한
은빛 갈치가 가득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흰소리 했다.

"하이고 돈 봐라."

제주도에서 먹는 고등어 두께의 갈치를 기대하지 마시라.
영실봉의 소박한 밥상에 놓인, 시원하게 끌여 낸 갈치는 중간 두께 정도의 크기다.
이 집은 나물류의 찬도 바로 손님에게 대접하기 바로 직전에 무쳐 낸다.
그래서 중간에 더 달라고 하면 여의치 않을 때가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갈치 찌게라 할 수는 없다.
고등어만한 갈치를 쓴다면 어떻게 일인분에 오천원이겠는가.
하지만 맛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팁을 알려드리겠다.
어지간한 대식가가 아니라면 이 집에서 밥 더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식 후 무쇠솥에서 끓인 누룽지가 나오는데 그 양이 장난이 아니고,
만약 '밥 좀 더 주세요'라고 말하면 식당 공기밥이 아닌 무쇠솥에 남은 밥 전체를 다 퍼서
코 앞에 들이민다. 정신력으로 모두 먹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누룽지 숭늉이 나오는 것이다.
숟가락 넣어 보면 누룽지 밥알이 밥 한 공기는 된다.

오늘 밥상은 길었던 피아골 산행의 전설과 역사에 대한 음복으로 생각한다.
갈치는 산에서 비린 것 구경하기 힘들었던 빨치산 혼령들과, 같은 기본계급 출신의
토벌군 영혼들에게 드리고 흰쌀밥은 가난에 팔려 온 씨받이 여인들에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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