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하고 있었는데 벚꽃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가지가 붉게 달아 오른 상태의 나무가 99%이지만
아주 간혹 만개한 나무들도 보인다. 그 몇몇 나무들만 만개한 이유를
물론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빠르면 이번 일요일, 늦어도 다음 주 초반에는
팝콘이 펑펑 터질 것이란 사실이다.
오늘은 벚꽃 중계 리허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재첩언니 트럭 옆에는 장한 벚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작년에도 일찍 꽃을
피우더니 올해도 그러하다. 패러글라이딩씨와 재첩국수 한 그릇을 위해
이동하지 않았다면 이장의 방심은 며칠 더 지속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항상 휘어져 구례로 향하는 섬진강의 곡선과 꽃을 함께 담을 수 있다.
재첩 트럭 옆의 벚나무는 큰 편이다. 그것이 꽃이 피어서만 장한 것이 아니라
나무의 연륜만으로도 장한 것이다.









조금 더 상류의 휘어진 벚나무 만큼은 아니지만 이 나무도 가지가 휘영청하고
강으로 강으로 뻗어 있고 쳐진 모양새다. 이 사진을 언제 찍었더라? 26일 수요일?
여튼 재첩을 먹은 다음날이었는데 오후 시간을 염두에 두고 다시 방문했지만
조금 이른 듯 하다. 해가 좀 더 서쪽으로 이동해야는데 예측이 틀린 것이다.









시간이 갈 수록 나무가 좋다.
물론 큰 나무가 좋다. 때로 산에서는 아주 큰 나무를 볼 수도 있지만
일상으로는 잘 생긴 길 가의 나무만으로도 뭐랄까... 좀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기억해보면 문명 앞에서 경건했던 기억 보다 자연 앞에서 경건했던 경우가
훨씬 많았던 듯 하다. 사람 앞에서도 경건해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사진을 찍다보면 대상을 더 잘 보는 것일까, 아니면 주변을 놓치는 것일까?
보이지 않았던 그 무엇을 나는 물론 알지 못한다.
말 그대로 나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질문한다. 왜 찍냐고.
간혹 그냥 온전히 내 눈만을 위해서, 사진이 아닌 기억의 힘 만으로 '그 순간'을
간직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내 기억 속의 '그 순간'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았던 동해안 망양정의
어느 순간과 속초에서 후포에 이르는 도보 여행의 그 바다와
1995년 지리산 정령치에서의 그 초록일 것이다.









청사포 바다의 표정과 지리산에서의 놀라운 광경을 사진에 담으면서
기억의 유효기간은 없어졌다. 앞에서 주절거린 '그 순간'들이 결코 사진으로
남긴 '그 순간'보다 뛰어난 광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그 순간을 더 소중하게 추억하는 것은 역시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기에
그럴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지만 기억의 여운을 거세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카메라 없이 그냥 상황을 즐기는 여행자들이 부럽기도 하다. 가끔.









위의 사진으로부터 이틀이 지났을 것이다. 아마.
그러니까 금요일 아침이었을 것이다. 목요일 오후에 아주 조금씩 내리는
비 사이로 카메라 없이 한바퀴 돌았다. 그냥 그렇게 떠돌고 싶었다. 목요일은.
하동에서 구례로 오자면 연곡사 입구 좀 지나 송정마을이 나오는데 오른편으로
휘어지는 작은 도로가 나온다. 그 초입에 폐교가 하나 있다.
몇 년 전에는 이 폐교에 부부와 아이가 살고 있었다.
오후 햇살에 폐교 운동장의 벚나무 세 그루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았고 그 모습을 가능하면 눈을 통해 가슴에
인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내려오는데
폐교 정문에 다운증후군 전형의 두 여자가 앉아 있었다.
폐교의 주인이 바뀐 모양이다. 사실 나는 그 '두 여자'인지 그 '아이들'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순간적으로 벨라스케스가 그린 '라스메니나스'라는
그림의 오른편 귀퉁이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난장이 마리바르볼라를 본 듯 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다음날 아침. 폐교의 벚나무를 찍었지만 마리바르볼라는 없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사진을 넣다가 나는 양희은이 부른 '임진강'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임진강이라는 노래는 자연스럽게 조선학교와
직렬로 이어진다. 폐교 - 마리바르볼라 - 임진강 - 조선학교는 이 사진을
앞에 둔 나의 개인적인 소회의 키워드들이다. 그것들은 어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복잡할 것도, 난해할 것도 없이 그 공통분모는 바로 '슬픔'이다.









폐교의 벚나무를 찍고 이틀 동안 미루어 두었던 휘어진 벚나무를 찍기
위해 다시 조금 이동했다. 구례에서 연곡사 지나 조금만 내려가면
강 쪽으로 한 그루 서 있다. 이 벚나무는 버드나무처럼 가지가 축축 쳐져 있다.
작년에 누군가 이 벚나무의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나는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이 나무 사진을 작년에도 가장 먼저 올렸었다. 일찍 핀다.
누가 사진을 찍더라도 이 나무와 섬진강 앞에서는 이 포커스로 찍을 것이다.
마치 그렇게 해 달라는 듯 나무는 서 있다.









풍경은 치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풍경은 슬프고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우선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세로 사진을 찍지 않도록 강제하는 것은 모니터다.
포커스의 절반은 모니터가 정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강을 배경으로 늘어진 가지의 꽃을 찍은 날은
풍경이 포커스를 강제한다. 그것이 정상이겠지.









사진을 찍고 있기엔 마음자리가 뒤숭숭한 날들이다.
며칠째 사진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그런 연유가 있을 것이다.
꽃을 보는데 사람들이 겹친다. 사람이 겹치면 살아 온 날들이 겹치고
살아갈 날들이 보인다. 하지만 상황이 강제하는 예측이란 대부분
'판단'이 아닌 '기분'에 가깝다.









남도대교를 건너 861번으로 옮겨 탄다.
곧이어 이 나무가 등장한다. 작년에도 이 나무 때문에 화들짝 놀랐었다.
꽃잎은 햇살에 정직했고 이 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한대 피웠을 것이다.









집을 짓는 것일까?
나의 오늘은 몇 그루 벚나무로 기억될 것인데 저 남자의 오늘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지극히 단순한 대비. 포크레인과 저 남자, 카메라와 나. 근면과 성실, 게으름과 불복종.
놀이는 체제전복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금요일 아침 그 유명한 19번 국도의 벚나무 대부분은 이런 모습이다.
오늘, 토요일 오후 내리는 비 속에서 달린, 사진으로 남기지 않은
이 길의 꽃은 하루 만에 조금씩 꽃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일 이 길은 붐비겠다.
월요일 아침에 이 길을 다시 찾을 것이다. 쌍계사 길을 방문할 것이다.









이 나무 기억하시는가?
살구나무.









꽃이 피었다.
험한 이주와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웠다.
숨김 없이 기쁜 마음이다.
살아 나는 살구나무를 본다.
가지는 여전히 많이 상했지만 가을이 되면 좀 더 많은 가지를 보여 줄 것이다.
생물학적 연대기는 사춘기가 아니지만 정신적 연대기는 사춘기를 살고 있는
이장에게 살구나무는 발레리의 그 문구를, 메시지를 전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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