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 여름 끝자락에 주절거리다

마을이장 2010.09.13 18:13 조회 수 : 6573 추천:175








2010년 8월 8일 말복.
이번 여름이 더웠다는 것은 분명하다.
광복절 지나서 우리집은 결국 에어컨을 설치했다. 지난 2년간 각종 핑계를 들이대면서
낮 동안 집에 있는 마누라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들을 넘겨왔다.
석고패널 스타일의 조립식 주택은 열을 보전하는데 탁월한 기능이 있어 밤에도 따뜻한 집이었다.
물론 겨울에는 찬 기운을 저장하는 기능이 강해서 서늘함을 제공한다.
광복절 넘겨 설치한 에어컨이 뭔 기능을 발휘할까 싶었는데 9월 초순인 현재 여전히 한낮이 덥다.
8월 8일 오미동 말복은 지리산닷컴에서 마을에 쏘았다. 닭을 건지는데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대구댁은 알아서 닭의 위치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자태가 확실하도록 협조한다.











같은 날.
고기와 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공무원 K형이 피아골로 관공서버전 여름 계곡 사진을
촬영하러 간다기에 '같이 갑시다' 하고 따라 나섰다.
그럴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냥 어쩌다가 한번씩 그렇게 컴퓨터에서 탈옥한다.
신촌, 남산 마을 즈음의 계곡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시기에 이런 곳에 오지 않으니 월급쟁이들이 이렇게 이런 계곡에서 이런 자세로
'디스이즈휴가'를 보내는지 몰랐다. 왜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삶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불쌍한 사람들'도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대목의 표현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듯 하다. 죄송. 그러나 삭제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지리산 자락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에 코 쳐박고 살고 있으니
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역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서로, '왜 그렇게 살아?'











8월 10일 오미동.
여름 동안 촬영을 많이 하지 못했다. 날씨 요인도 있고 개인적인 상황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여름시즌이 되면 외지에서 이곳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칩거했었다.
그래서 한여름 작업량이 항상 많았다. 가학성이 있다. 금년 여름은 정말 기념비적이다.
마을의 사무장네가 30일 중 29일 정도를 손님과 밤을 보내는 동안 우리집은 단 한차례도
손님을 받지 않았다. 물론 이곳을 통해서 '오지마라, 오지마라!'는 뉘앙스를 폴폴 풍긴 덕을 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 주에 구례를 떠나있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마을의 대부분의 집들이 손님들을 맞이한다고 분주해보였다.

"손님 막 보냈는데, 바로 전화가 와서 여덟 명이 온다는거야!"
"도착해서 전화하는데 뭔 수가 있나!"
"출발하면서 방 구해둬라는데 미쳐불겠네."
"조카네가 시방 일주일째 있구만."
"여그가 워데여? 관광지에 사는데 밸 수가 있남."

역시 품성에 대한 평판이 좀 떨어지더라도 여름 손님은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래도 바탕화면용 사진은 필요하기에 몇 발 걸어나가서 백일홍을 찍는다. 지정댁이 지나간다.

"엄니 요짝으로 붙어서 좀 지나가쇼! 얼굴은 안나올란게 걱정하들 마시고."
"호랭이 물어가것네."











8월 17일 아침 오미동 출근길.
대부분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에 일어나 사무실로 움직인다.
에어컨 덕에 집 안이 뽀송뽀송하고 밤이 편안하다. 역시 화석연료를 많이 소비할수록 육신은 편해진다.
이번 여름 대부분의 밤을 필훈씨가 보내 온 원두로 만든 아이스카푸치노를 옆에 끼고 누워
NCIS시리즈와 EBS의 몇몇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보낸 듯 하다.
특별히 외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출퇴근 길에 '비슷해(그림이 될 것 같은)' 보이면 일단 사진을 찍어둔다.
2년 전에는 이 길 들어서면 바람만 황량한 들판과 잡초, 갈필의 길만 있었는데 한옥이라니... 심란하다.











8월 25일 오후 오미동 퇴근 무렵.
아마 사천에서 냉면 먹고 온 날일 것이다. 배가 부른 상태였고 오후에 갑작스럽게
순영이 형의 호출을 받아 둔 상태에서 약간 어중간한 시간 사이 어디즈음에서 오래간만에
카메라를 들고 사무실 뒤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갔다. 오미동. 오미동을 참 좋아했었다.
지금도 여전히 어떤 날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경관을 가진 마을이다.
그러나 점점 내 기억 속의 오미동 경관은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 5년 내에 지금 바라보는
view 정도를 방어할 수 있다면 선방한 것일게다. 저 들판에 뭐가 들어선다고 상상해보라.
후배가 다큐멘터리 'Helvetica 헬베티카'를 보내 온 것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번 8월에야 그것을 열어보았다. Helvetica는 디자인 작업에서 내가
거의 유일하게 사용하는 영문서체다.


디자이너의 삶은 싸움의 삶입니다.
조악한 것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의사가 병과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시각적인 병은 주변에 늘 있습니다.
우리가 애쓰는 것은 디자인으로 그것을 치료하는 겁니다.
- 마시모 비녤리Massimo Vignelli


업계의 전설 중 한 사람인 마시모 비넬리의 인터뷰를 리플레이해서 보았다.
그의 말에 공감해서 반복해서 본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말과 같은 디자이너가 되지 못해서 아팠다.
몇 년 전에 나는 스스로 '삼류가 아닌 이류'라고 말했는데 지나고보니 역시 삼류다.











8월 30일.
나는 가끔 '이번 일은 최선을 다하지 않겠어!' 란 말을 한다.
특히 시골에 내려 온 이후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지금도 그런 맥락에서 진행하는 일이 있다.
최근에는 간혹 생각한다.

'그것은 결국 내가 한 일이다.'

이곳 사람들은, 기관은 수용하지 못할 것이란 예단으로, 몇 차례의 경험으로 미리 나의 의지와
무관한 방향으로 디자인하고 글을 만든다. fine arts였다면 팔아 먹지 않고 내 생각대로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시각물을 팔아서 밥과 바꾼다. 돈과 생각의 타협은 필수적이다.
그 사이로 난 아주 좁은 통로를 누구의 발걸음으로 만들어 내는가 하는 지점은 철저하게
디자이너의 철학이 좌우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겠어'란 말은 삼류들이나 하는 소리다.











9월 2일 토지면 봉소마을.
역시 사진이 필요했기에 읍내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섬진강변 봉소마을로 차를 몰았다.
해 질 무렵 강을 염두에 두었지만 배추모종을 심는 농부사진을 건져 나왔다.
사진을 찍다가 나도 빨리 배추모종을 심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어떤 일을 마감하고 그 다음에 뭔가를 하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시골에서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지금이 아니면 안되는 파종'이 간혹 충돌한다.
그것이 간혹 귀찮지만 이곳에 살면서 땅과 작물이 나에게 울리는 경종이라는 생각도 든다.
심어야지. 그래야 2011년 김치가 있는 것이다.











9월 3일 상사마을 모닥불 연탄석쇠구이 돼지군.
하루 전에 기별을 받았다. 상사마을의 후배가 사는 집 마당에 식당을 개업한다고,
정상 오픈 전에 시식하고 품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 자리라면 당연히 가야쥐!
이곳에서는 무조건 다슬기수제비를, 다슬기수제비만 먹었기 때문에 해물수제비라는
메뉴는 개인적으로 흡족했다. 재료의 퀄리티도 가격대비 훈늉했다. 연탄불에 석쇠로 구운
돼지전지살도 맛이 있었다. 수제비 6,000원 돼지불고기 10,000원. 매운 것과 맵지 않은 것
각 두 종류다. 몇 가지 의견을 전달했다. 밥값을 해야하니. 김치보다 겉절이가 좋겠다.
고기 위에 양파와 부추를 좀 더 많이 올려서 나오면 좋겠다. 하긴 야채값이 장난 아니지.
석쇠불고기는 밥을 부르는데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등등.
대략 열다섯 개 정도의 로테이션 식당 명단에 이 집을 추가하기로 했다.











9월 6일 오전 운조루 뒤 밤나무밭.
늦은 아침에 운조루 엄니가 카메라를 들고 오란다.
뭔 일이지? 따라갔다. 운조루 사당 뒤 밤나무에 구례의 토종벌은 모두 붙어 있는 듯 했다.
큰 밤나무 한 그루 전체에 붙어 있는 사진도 찍었지만 식별이 되지 않아 이 사진을 올린다.
운조루 엄니도 마을의 다른 팔 순 어르신도 이런 것은 처음 본다고 하신다.
금년에 대한민국에서, 전 지구적으로 벌들이 문제다.
우리집도 한봉 한 통을 분양받았지만 며칠 전에 작파했다. 바이러스로 이곳의 한봉은 거의 전멸이다.
꿀 한 방울도 먹지 못했다. 월인정원은 그래도 아깝고 원통하고 미안해서 법집을 끓여 초를 몇 개 만들었다.
이 벌들이 왜 이 나무에 모여 있는지? 너거들 중에 혹시 우리벌도 있뉘?
좋은 광경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세계적으로 벌들의 활동량이 형편없다고 한다.
벌은 자기장과 중력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생명체다. 그 아이들이 이렇게 태업을 하고,
병으로 사망하는 지구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모든 식물 수분의 70%를 벌이 담당한다.
벌의 태업은 식생과 식량문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것이다.
내년에도 다시 한봉을 분양받을 것인지...
장기적으로는 어차피 디자인도 잘 못하는 고령디자이너인 나는 먹는 것을 직접 생산 쪽으로
생존전략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9월 7일 상사마을회관.
뭔 작업을 한다고 화요일 마을요가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는 상사마을요가반에서 '남들 잘 안되는 자세의 달인'이자 요가반의 차세대지도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끝나는 시간 즈음인 밤 9시 30에 마을에 도착한 김에 카메라를 들고 거의 찍지 못했던 요가수업
장면을 찍기 위해 방으로 들어섰는데 이 지경이다. 내가 빠져서 그런지 오늘은 결석이 좀 많네.
그래서 평소에 비좁아서 하지 못하는 '쫘악~ 찢는' 자세를 감행하고 있는 중이다.

"자자, 얼굴 안나온게 그냥들 하시던거 하세요들."

음... 내가 없다보니 모범적인 자세를 보이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다.











수업은 끝났지만 신장 180cm가 안되는 요가반원들에게 신장이 돋보이는 자세를 요구했다.
얼굴 안나온다니까! 음... 두 분은 바지를 많이 먹었군.
요가를 통해서 뭐랄까, 허물이 없어진다. 동작 자체가 서로가 아름답지 않은 꼴을 보여야하다보니
관계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무게 잡으려고 해도 지난 수업시간에 '니가 방구 흘린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몸도 건강해진다. 이미 몇몇 엄니들과 '젊고 썩은 몸뚱아리' 소유자들은 요가예찬론자들이 되었다.
요가시간을 지키기 위해 일주일에 일곱 번 먹을 술을 네번이나 다섯번 정도로 줄이기도 한다.
3년이 지나면, 혹시 상사마을을 방문한 여러분들은 물구나무서서 손가락으로 걸어다니는
상당수의 주민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다른 요가단원들이
위화감을 느낄까봐 불편한 직립보행을 계속 하고 있다.











9월 8일.
하나의 일을 마감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하루를 투자했다.
고추와 토마토, 가지 등 계속된 비에 '녹아내린' 작물과 고구마 일부를 뽑고 다시 밭고랑을 만들었다.
점심 지나 문척 육묘장에 가서 '청방 105개 짜리 한나요!'를 외치고 바로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하늘이 흐려 일하기 좋은 날이다. 모종이 보기보다 좀 부실해서 90개 못되는 모종을 땅에 심었다.
그리고 완전히 탈진상태다. 저녁에 순영이 형네 가서 감박스 논의하기로 했는데... 띠리링~

"형님, 저 오늘 못가겠슴돠. 배추 심고 나니까 죽갔네요."
"하이고 월매나 심었길래?"
"모든 사람이 형님만큼 농사 짓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란께, 몇 판이나 심어냐고오."
"한 판요."
"...."

다시 배추밭 물주기 시즌이 시작되었고 벌레잡기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름 끝자락이 분명하다. 배추농사 4년차 아닌가.











9월 9일 광의면 월곡 매천사.
어르신들이 부복하고 있다. 매천 황현 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식이다.
매천은 이곳 월곡에서 1910년 자결했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꼭 매천 선생의 추모제를 촬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두어 번 행사 때 참석했지만 내가 건질 장면은 별로 없다.











매천 황현의 초상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단 하나의 초상화를 고르라고 한다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을 선택할 것이고 단 한 사람의 초상화가를 택하라면 채용신을
선택할 것이다. 채용신의 황현 초상은 그의 많은 초상화 중에서도 걸작에 속한다.
2007년 5월 3일 개인사이트의 기록을 보면 나는 이 초상화를 실견하는
순간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몇 개월이 지난 2007년 12월 어느 날 나는
모처에서 채용신의 황현 초상화와 마주하고 있었다.
정식의 촬영을 해야했다. 대형카메라, 조명 등등의 정상적인 촬영 수단을
동원했다. 그림을 보관하고 있던 분은 촬영 장소에 대한 정보도 공개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 날 촬영한 진본 작품이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다. 먼 과거도 아닌 근대기의 걸작인데
그림을 접어서 보관하고 계셨다. 두 줄의 세로 선이 그림을 접은
경계선이다. 소중한 것이라 공개하지 않고 보관하다보니
접지 상태의 한지는 표구를 해서 더 균열이 심했다. 전체적인 변색의
진행도 빠른 듯 했다. 햇볕도 좋지 않지만 어둠 속에 사는 것도
좋을 것은 없다. 이런 경우 참 입이 마른다.
'국가나 박물관에 기증하시는 것이 오래 보전하고 다른 분들도...'
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공무원도 아니고.











여하튼 내가 이 현장에 서 있게 된 것은 2007년 5월, 매천사에서
사당 뒤에 모셔진 사본 매천의 초상화 상태를 보고 경악했기 때문이다.
일단 사당이 일상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였다.
사람이 찾지 않는데 관리가 철저할 수는 없다. 촬영한 사진을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듯 한 느낌의 칙칙하고 불쾌한 영정을 보았다.
'저건 복원해야 해욧! 내가 대한민국에서 젤루 잘 할 수 있어욧!' 라는
주장을 했다. 공무원 K형이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연말에 추경인지
뭔지 예산을 따내고 일을 성사시켰다. 돈은 받지 않아도 관계없었지만
돈도 준다니 받았다. 사실 나는 진본을 실견하는 기회만 잡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촬영, 충분한 용량의 드럼스캔, 마음을
기울인 컴퓨에서의 복원, 비용을 아끼지 않는 종이, 천 등의 실사출력
데스트 과정을 12월에 진행했다. 3장의 말끔한 출력물을 액자 상태로
매천 선생의 후손들, 군청 그리고 사당에 납품하는 것이 서류상 나의
역할이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데 삼백만 원이 되지 않는 예산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디지털 복원이라도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림 전체에 가해진 두 줄의 파손된 세로 접이선이 힘들었다.
망건의 질감과 바느질 라인이 틀리지 않게 채색이 떨어져 나간 부분을
채워 넣는 일은, 기존의 망건에서 실 한 올 질감을 뜯어와서 바느질 하듯이
밀어 넣는 방식으로 좁은 면적을 채워야했다.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지만
채용신이 실제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의 마음에 10%라도 접근한다는 생각으로
복원 작업을 했다. 이런 것은 사실 작업한 놈만 아는 문제지 1년에 한번
매천제 때에 행사를 진행하는 제관들도 모를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구차스러워서 지난 3년 동안 말하지 않았는데
매천사의 영정사진은 2008년 1월에 교체되었다.
나는 속으로 그냥 혼자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석지 채용신의 그림을 모니터에서나마 만졌기 때문이다.











창호색을 보면 알겠지만 강조하기 위해 after를 밝게 처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처음 만난 채용신의 황현 초상은 before 상태였다.
추가와 변형 없이, 최대한 원본 상태에 가깝게 만드는 것,
그리고 저 상태를 좀 보라. 도대체 왜 사당의 영정을 저런 박스형의
벽장 속에 넣어두고 일상적으로는 감금하는가? 귀한 분이라서?
건물 짓고 도로 닦고 쓸데 없는 유물관 만들지 말고
이미 있는 것이라도 거시기 좀 하자.










9월 9일 광의면 월곡 매천사.
박정희 때에 초등학교를 다닐 때, 몇 번 도로로 동원되어 나갔다.
태극기 들고 흔들고 박수 치고. 마음이 없는 '모심'은 아무런 교육효과가 없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나오신 몇몇 유림 어르신들과 나와야 해서 나오신 몇몇 어르신들과
학교에서 나가라고 하니 나온 학생들이 같은 공간에 서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참석은 했지만 사진의 거의 찍지 않았다.
나는 아직 매천에 대한 글을 작성하지 않았고 지리산닷컴이 매천을 다룬다면 어떤 관점과
방식이어야할지 결정하지 못했단 소리다. 또는, 내가 가진 지식의 한계로 인한 이해의 부족
때문인지 나는 매천 선생의 죽음을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이 내가 구례에 살면서 매천에 관한 글을 작성하지 못하는 본질일 것이다.
매천 떠나고 하루 지나 9월 11일. 지구 반대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세상과 대면하고 떠난 사람이 있다.
아옌데.

여름은 갔거나 가고 있는 중이다.
해가 갈수록 여름이 힘들다. 기후는 명백하게 변하고 있다.
가을에는 우서 나부터 좀 더 여유롭게 지리산과 시간을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주말을 우울하게 보내기 위한 아옌데에 관한 긴 이야기
   http://blog.naver.com/mudyist/70046832170

* 여기까지 쓰고 올리려는데 사이트가 먹통이다. 갑자기.
  금요일(9.11) 자정을 넘어서 1시간 정도 지났을 것이다. 단독서버호스팅 서비스를 받고 있는데,
  서버 IP를 교체했다고 한다. 이장은 사후에 알았다. 토요일 오전에 서버회사와 통화하고
  상황을 파악했고 호스트 IP변경하고 길면 48시간 정도 후에 사이트가 정상화된다고 했다.
  이를테면 문패는 그대론데 주소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대략 50시간 이상 경과한 월요일(9.13)
  오후에 사이트가 열렸다. 지리산닷컴과 같은 서버를 사용하고 있는 서른 개 정도의 집이 물론
  50시간 이상 먹통이었다. 죄송합니다. -,.-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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