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 마을에서 살아간다는 것

마을이장 2010.08.22 23:42 조회 수 : 7027 추천:172








2010년 8월21일 토요일.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 주민화합 한마당 잔치가 열리는 날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마을청년회가 주최한다. 청년회가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은 세 가지가 있는데
설날합동세배와 대보름달집태우기 행사, 그리고 주민화합잔치다.
어르신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하고 오후에는 노래방기계를 빌려서 한바탕 노는 것이다.
힘든 여름이 끝났으니 한번 놀아보자는 이야기다.
나는 당일 아침에 인근으로 짧은 관광을 떠나는 버스에 탑승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을찍사’로서 이 날을 기록하는 것이다.











하동 쌍계동천을 지나 칠불사로 갔다. 60세 이상 주민들에게 자격이 주어지는데
하동 쌍계동천을 지나 칠불사로 올라갔다. 60세 이상 어르신 서른다섯 분이 타셨다.
부위원장님, 부녀회장님, 철호 형과 점식 씨가 동승해서 가이드 겸 도우미 역할을 했다.
칠불사 입구까지 대형버스가 오르지 못해 10분 정도 걸음을 하셔야 했다.
10분 거리지만 오르시는 속도는 모두 다르다. 마을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거리지만 처음 오시는
분도 계시고 몇 번 오신 분도 계시다. 오희수 어르신은 국립공원 근무 하던 당시에 칠불사 아자방
공사를 했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보고 '누구?' 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사진의 태극부채를 드신 할머니는 나를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전에 마을 인근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
몇 테이블 건너이기도 했고 방심하기도 해서 그냥 밥을 먹는데 건너편에서 나를 보시고
'사진작가?' 라며 웃으신다. 황망하게 뒤늦은 인사를 드렸지만 민망했다.
아시는게다. 마을에서 더 이상 투명인간은 불가능하다.
우리끼리는 호호할머니라고 부른다. 우리끼리는 우리끼리 어르신들의 별명을 짓고 부른다.











뒤처지는 분들이 있다. 버스에서 내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몇몇 분들이 예상을 깨고
경사 급한 길을 오르신다. 수평댁과 사촌댁이 맨 끝이다. 수평댁은 내가 김장때마다 평상을 빌리는 엄니다.
무릎수술을 하셨는데 힘들게 오르고 계신다. 오리탕을 잘 끓이신다.
그리고 사촌댁이다. 팔순이 넘은 어르신이다. 마을청년회 회장님의 엄니이시니 오늘 행사는
아드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다.
나와 같은 2반에 사시는 분들이라 하루에도 오며가며 몇 번은 만난다.
읍내로 가는 길에 자주 길 위를 걷고 있는 엄니들을 태운다.
마을에서 면까지 걸어나가시는데 30분은 잡아야 한다. 대부분 마을버스 시간을
놓치면 걸어서 면까지 나가신다. 그 짧은 거리의 동행 동안 '히치하이킹 당한데에 대한'
치사를 끝없이 들어야 한다. "옛날에는 걸어댕겼어. 암시랑토 안혀."
그리고 대부분은 그 한번의 신세 아닌 신세를 잊지 않는다.
장날이면 읍내 축협마트 앞 버스정류장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혹시 마을 분들이 계신가 살피는 것이다.
'엄니 타세요!'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인지 차 안을 살펴보고 아는 얼굴이면 부끄러움과 반가움이 섞인
웃음으로 차를 타신다. 그때, 옆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다른 마을 엄니들에게 '나 먼저 가이~' 라는
멘트를 날리는 경우가 많다. 우쭐한 것이다. 일종의 친절을 넘어선 존중으로 받아들이시는 듯하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아, 그 사람이 나를 시피(쉽게)보면 그라것어?'
우리들의 어머니세대 여성들은 존중받지 못한 삶을 살았다.
사랑받고 싶으신게다.
  










연못가에서 잠시 쉬었다.
오심석 어르신과 이응원 어르신이다. 마을은 해주 오씨와 영천 이씨가 대종을 이루는 집성촌이다.
두 어르신은 현재 두 집안의 가장 윗대에 계신 분들이다. 두 분 모두 팔순이 넘었다.
집성촌으로 귀촌하는 것은 통상 '좀 힘들다'는 소리를 들었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 다른 시골마을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보지 않아 예단할 수는 없지만 돌아다녀보면
내가 사는 마을에 정착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 같지는 않다.
한번은 역시 길 위의 두 엄니를 히치하이킹시켜서 읍내에 나가는 길에,
'저한테 말씀 편하게 하세요.' 라고 했는데 '타성 사람들한테 그라녀!' 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존중이라기 보다 거리두기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나를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다.
관계의 단계가 어느 정도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몇몇 실세 어르신들과 불화했다. 답답할 정도로 보수적인 어른들과 어느 정도 각도 이하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나의 속성이 만나면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엄니들과 다르게 남자들은
'영역싸움'의 DNA를 여전히 내장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동물행동학적으로 상황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조용한 마을이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서당이 있던 마을이다.
5년여 전부터 외지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부동산 업자가 시작한 일이다.
마을에서는 한 가구가 아닌, 순차적으로는 십여채로 예상되는 외지사람들의 마을로의
유입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다. 이미 땅을 매도한 마을사람들도 있었다.
땅을 구입한 개인이 재산권을 행사한다는 딱딱한 문장을 들이대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건
집을 짓지 못할 일은 없다. 결국 '마을 문'은 열릴 수밖에 없다.











특별한 벼슬이나 관직으로 진출한 사람이 없는 마을이다.
그럴수록 마을은 방어적이다. 공사차량이 오가고 어느날부터 고급차가 마을길을 가로지른다.
외지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기존의 주민들 중 일부의 생각으로는 '마을에 큰일이 났다.'
큰일이란 '변화'다. 달갑지 않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겪은 것이 5년이다.
그러다보니 나같은 놈들도 마을로 들어와서 산다. 컴퓨터로 뭘 한다고 하고, 사진작가라고도 한다.
정체가 불분명하다. 집도 없다. 월세를 살고 언젠가는 떠날 놈이다. 그런데 자꾸 보인다.
이런 놈과 마을의 젊은 것들이 휩쓸려서 뭔가를 작당한다. 포괄적으로 점점 불편하다.
마을에서 살아간다는 것, 일정하게 개입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개입이 꼭 선善은 아니다. 조용히 사는 것이 꼭 악惡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본디 제가 타고난 그대로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최근에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아무래도 개입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다.
개입의 결과가 스스로 판단해도 꼭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을 연못가에 잠시 모이게 했다. 단체사진을 찍을 생각이다.
기록의 필요성은 더 느낀다.











칠불사를 관람하는 동안 철호형과 점식씨는 주차장에 상을 차렸다.
떡과 치킨, 음료와 술을 준비했다. 마을로 돌아가면 점심상이 차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빈입으로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닐 수는 없다.
자꾸 술을 권하시니 때로 난감하다. 술을 먹지 않는 남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시지 못한다.
이곳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마을회관에서는 지금 청년회와 부녀회에서
상을 차린다고 분주할 것이다. 너무 일찍 도착하면 대략 난감하다.
부위원장님이 소리하신다.

"닭 하나 남겨두세요. 송샌도 잡숴야지."











12시 30분에 도착해야 한다. 일부러 조금 돌아가는 길을 잡았다.
관광버스 안에서는 대한민국 관광버스의 본 기능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르신들이 섭섭해 하신다.
철호형과 점식씨가 계속 어르신들에게 술을 돌렸다. 필요에 의한 것이다.
마을에 들어설 때까지 쿵쾅쿵쾅 버스 전체가 요동을 쳤다.
조선사람들의 이 신명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그녀들의 이 뜀박질은 때로 접신한 무당의 그것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리고 도착하면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조신한 할머니로 변해서 내리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은 점심 식사 이후 노래방기계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니, 버스 안에서의
이 뜀박질이 마지막이다. 아쉽지만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르신들도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사실을 인정하신다.











회관에 점심상을 마련했다.
사무장, 청년회장, 외지에서 들어 온 이윤경씨가 음식을 배달한다고 분주해 보인다.
에어컨을 켰지만 불고기라 열몇 개의 불판에 불을 피웠으니 실내온도는 덥다.
돼지를 잡자라는 이야기가 잠시 나왔지만 '누가 장만할꺼냐?' 라는 질문 앞에 대책이 없었다.
'장샌 살았을 때는 장만을 잘했는데...' 라는 말씀은 이미 과거형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모여 밥을 먹는' 경우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밥상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다.
밥상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가장 요긴한 도구다.
나는 이렇게 마을에서 큰 밥상이 차려질 때, 내가 마을에 살고 있다는 소속감을 강하게 느낀다.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비교적 젊은 아주머니층들도 이 날은 보인다.
날이 날이니 모이는 것이다. 품앗이를 한다. 이들 세대의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면
마을의 큰밥상 풍경이 이어질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식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귀찮은데 식당 하나 빌리지.' 라는 의견이 우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물은 냉천댁이 젤루 잘 무쳐.' 라는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을주민의 연령별 분포는 역피라미드순이다. 나와 불화했던 노인들이 걱정한 것은
덩어리로서 '마을 자체'였다. 그 방식이 옳건 그르건 그렇다. 우리세대의 주요한 관심은
나와 나의 가족으로 범위가 좁혀진다. 세대를 거듭할 수록 더욱 바빠졌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걱정하고 집중하는 범주는 점점 좁혀진다. 공동체가 나와 가족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골도 대부분은 더 이상 농경사회가 아니다.











1개월 전부터 마을회관에서 요가를 한다. 화, 목, 토요일 저녁이다.
월인정원의 지도로 진행하는데 생각보다 호응이 높다. 나도 참여한다.
하루 종일 일을 하는 시골엄니들이 주타겟이다. '과연 올까?' 라는 것이 시작 전의
고민이었지만 통상 12~15명 정도의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미 건강상의 효과도 느끼고 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나오신 엄니들은 앞으로도
나오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그렇다.
마을요가를 공지하기 위해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다. 외지에서 들어 온 우리와 기존의
주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것, 그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마을요가모임이 좋다. 내 건강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다른 어떤 시도보다
기존 주민과 '외지껏들'이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문화적으로 다르고 살아 온 이력이
달라 서로가 소 닭보듯 쳐다보았던 것이 지나간 시간의 대부분이었다면, 인위적인 결합에의
노력이 지나간 시간이었다면, 이 마을요가 시간만큼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가동된다.
요가 동작은 간혹 방귀를 유발시키고 방귀는 마음을 벽을 허무는데 만병통치약이다.
하하호호, 키득키득하다보면 그 동안 눈인사만 나누었던 사람들이 가까워진다.
백 번의 '화합을 위한 회의' 보다 한 번의 요가가 효과가 좋다.
외지에서 들어 온 사람들은 제 각각의 기능이 있을 것이다.
사실 구례의 땅값을 생각하면 '귀농' 이라는 이미 고전적인 개념의 귀촌방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기능과 재능을 그대로 가지고 시골에서 살아가고 생존하는 것이 이후의 귀촌모델이
될 것이다. 그 기능과 재능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더욱 요긴할 것이다.
어쩌면 진작부터 원했던 모양새다. 나는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사진과 디자인과 기타등등한
사인물들로 봉사하고 월인정원은 제빵과 요가로 마을에 기능하고 봉사하는 것.
결국은 '소용'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를 설명할' 필요도 없어진다.











2008년 주민화합한마당잔치 때에 시암재에서 마을 어르신들 단체사진이다.
나는 그때 마을에 들어 온지 2개월 정도 지난 다음이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나를 모르고 계신 상태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사진의 어르신들 중 네 분이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한 해에 4~5회 정도 상을 치룬 듯 하다.
사진을 만지다보니 간혹 이 어르신들 중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내 사진 속 그 순간에는 여전히 계신 것이다.
오늘, 2010년 8월 21일 또 다시 새로운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파인더 속에서
유난히 생각이 많았다.

'내가 이 마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송정원 어르신이다. 여든세 해를 사셨다.
하루 전, 그러니까 2010년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연락받고 지난 밤에 몇몇이 우선 문상을
다녀왔다. 발인은 일요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2010년 상사마을 주민화합 한마당 잔치에는 노래방기계가
동원되지 않았다. 힘들게 잡은 날이라 취소하기도 힘들었다. 아마도 하루 일찍 별세하셨다면 마을행사는
취소되었을 것이다. 발인하는 날 잔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돌아가시던 날 오후에 나는 우연히 어르신의 이 사진을 만지고 있었다. 나의 필요에 의한 작업이었다.
사진 아래 '상사마을의 걸어다니는 데이터베이스 송정원 어르신' 이라는 캡션을 달았었다.
이 사진은 2009년 6월 8일 오전 10시 48분에 찍었다. 마을신문을 위한 촬영이 있던 날이었다.
어르신 댁에서 구한 말 집안 어르신이 민영익과 홍콩에서 찍은 사진을 구경하기로 했었다.
그 사진이 낡아서 내가 스캔받아서 보정해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이제 지켜질 수 없다.
빈소의 영정사진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 사진에 상의를 양복으로 합성한 사진이었다. 흑백으로 처리가 되어 있었다.
솜씨가 좋아보이는 합성은 아니었다. 사진관에서 처리했을 것이다.
작년 연말에 나는 어르신에게 위 사진을 A4로 인화해서 드렸다.
칠불사 주차장에서 부위원장이 하신 농담, '닭 하나 남겨두세요. 송샌도 잡숴야지.'는
어제까지 마을에서 함께 살았던 송정원 어르신에 대한 조사였다.











8월 22일 늦은 4시경.
교회 장례절차를 따르다보니 산소에 도착하신 시간이 늦었다.
마을사람들이 어르신의 봉분작업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먼저 가신 할머니와 함께 하셨다.
고인의 뜻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모두들 땀으로 샤워를 했다. 오후 5시 넘어 장례는 끝이 났는데
우리 눈에 해는 여전히 중천이었다. 산소로 카메라를 들고 갔지만 막상 사진은 한 장만 찍었다.
나 역시 봉분작업을 하는 것이 속이 편할 듯 했다. 봉분의 잔디 다진다고 밟고 있는데
철호 형님이 한 마디 하신다. '찍새가 뭔 일이여.'
한켠으로 비켜서 있던 상주들 속에서 송 어르신의 따님이 나에게로 걸어왔다.

"혹시 사진 찍는..."
"예 맞습니다."
"영정사진을..."
"예, 좀 바꾸신 줄 알고 있습니다."
"아셨구나... 아버님이 말씀을 하셨어요. 선생님이 찍은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하고 싶다고. 그런데 아무래도..."
"저는 관계없습니다. 곡괭이 잡고 서 계신 사진으로 하면 다른 분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칠순 때 양복입고 찍은 사진도 있는데 선생님이 찍은 사진을 좋아하셨어요."
"아버님 사진이 몇 장 더 있는데 인화해서 드리겠습니다."











다시 단체사진을 찍는다.
2010년 8월 21일, 상사마을 어르신들의 단체사진은 하루 전의 송정원 어르신 생각에
개인적으로 조금 더 각별하다. 어르신들 한 자리로 모이시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자 조금 더 모이세요. 송정원 어르신 안계시잖아요."
"아, 그라게 뭐하러 찍어싸."
"찍어둬야 뒤에 기억하지요."
"못냄이 얼굴 기억혀서 뭣허게."
"자, 하하하~ 웃으세요!"

대부분의 일들을 짐작할 수 없다.
내가 다음 해 마을 어르신들의 단체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이 사진의 어르신들이 2011년에도 모두 그대로 건강하게 마을에 계실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결국 이별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23일 월요일은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다.
여름은 결국 끝이 날 것이다. 처서가 지나면 풀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한다.
세상 만물은 아직은 우주의 순행에 따라 움직인다. 사람이 나고 떠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생명이 사라짐을 슬퍼한다. 이별이기 때문이다.











상사마을에서 행사를 끝내고 오미동 사무실로 돌아와서 사진을 정리하는데,
'똑똑!' 지정댁 엄니가 사무실 문을 연다.

"어이, 있다가 와이. 방아 찧어놨슨께."
"방아?"
"아, 쌀 좀 들고 가라고."
"엄니 나 쌀 많아."
"아, 잔소리 말고 가져가라면 가져 가. 있다가 와이."

일전에 농협에서 서류 일 도와드린 것에 대한 인사를 하실 모양이다.
이곳에서 항상 '그냥'은 없다. 언젠가는 어르신들의 방식으로 꼭 갚는다.
나는 그것이 불편하지만 피할 도리가 없다.

구체적인 방법에의 고민 여부를 떠나 나는 아마도 내가 사는 마을 속에서
계속 기록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엄니들과, 영감들과 친분을 쌓고 정을 쌓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엄니, 아부지들과 이별하게 될 것이다. 간혹 삼만 원 봉투 하나 마련해서
문상가는 길에 상상을 하곤한다. 나와 많이 가까운 엄니들을 떠나 보내는 때가 오면
내가 제법 힘들겠다는 생각. 더구나 그것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
더 이상 미루지 않아야겠다. 두 마을에 '영정사진 찍기'와 '어머니한글교실'을 열었으면 한다.
설득하고 다툴 일이 많은 성격의 일이다.
내가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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