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 산에서 길을 잃다

마을이장 2010.07.23 02:21 조회 수 : 6530 추천:172





마을 일 논의하다가 마을 사람 몇몇이 산행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리산 아래에 사는 주민들이 지리산을 너무 찾지 않는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았다.







7월 20일 화요일.
화엄사 주차장에서 성삼재행 새벽 6시 버스에 올랐다. 얼마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리산닷컴에서 산행으로 분류된 글은 2009년 10월의 피아골이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산행다운 산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교적 맑을 것이란 예상을 했지만
노고단대피소에서 KBS중계탑으로 향하는 길을 오를 무렵의 상황은 쉽게 하늘을 보여줄 날씨는 아니었다.










01 - 이름이?

산 아래 원추리는 이미 전성기를 경과했지만 노고단 원추리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개인적인 미션이고,
가능하다면 오른 김에 바로 촬영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오르는 길에 야생화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2009년 기록을 살펴보니 8월 중순에 노고단을 찾았다. 7월 마지막 주에 방문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사진이란 것은 결국 내가 얼마나 부지런하게 접근하느냐와 하늘이 내려 준 날씨가
합체해서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02 - 이름이?

KBS쪽 전망대에 섰지만 한 마디로 완전한 평면 상태였다. 사진 한 장 찍지 않을 정도로.
구름과 안개가 합세한 전형적인 여름산의 아침 컨디션을 보여 주고 있었다. 몸이 축축해질 정도로
공기는 습하고 시원하고 짙었다. 깊은 호흡을 했다. 몇 걸음 앞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KBS중계탑 아래 어디 즈음에서 일행은 길을 찾고 있었다.
시야를 장악한 구름 속으로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이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집어 넣었다.
나는 산행 시간의 대부분 동안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는 스타일이다. 물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옷깃을 여미고 바람에 밀리지 않고 시야를 확보하는데 집중했다.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원추리 군락지와 다른 야생화들 그리고 풀들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불확실한 시야 속에서 그 광경은 아름다웠다. 몇 초 동안 다시 카메라를 잡을 것인지 고민했지만
그냥 그 구간을 통과했다.
지금도 후회스럽다. 앞 선 일행의 꽁무니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사진을 포기했지만
다시 그런 광경을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그 모습은 내 인생에서 어쩌면 마지막이다.











am 8:00. 길은 길이 아니었다. 일행은 길의 입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타진을 했다.
우리가 찾는 것이 입구인지 출구인지 목적 조차 희미해진 듯 했다. 여튼 이 구름 속 상황에서
입구든 출구든 한 줄기 길의 흔적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바위는 당연히 미끄러웠고
땅 위로 올라온 늙은 뿌리들은 더 미끄러웠다.











앞 사람의 흔적과 발 아래의 위태로운 상황에 집중하면서 안개구름 속을 헤매다가 어느 순간
좁은 산 길 위에 내 발이 놓여 있었다. 바람과 안개구름에 두들겨 맞은 듯한 멍한 머리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잠시 정신을 챙겨야 했다. 1400m에서 느닷없이 큰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어딘가? 미로迷路는 아니다.
여기가 어디건 능선길은 외길이고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지를 모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능선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산 길은 이어지기 마련이다.











21세기에 길을 잃는 일은 전혀 문학적이지 않다.
하지만 21세기에 길을 잃는 일은 하나의 로망이다.
길을 잃고 고립되는 것, 어쩔 수 없이 나의 모든 일상이 정지되고 돌아가기를 포기하는 것.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추억하며, '그는 봄나물처럼 나긋한 사람이었지.' 라고 말하는 것.











지난 밤 멧돼지의 잠자리였던 모양이다.
좁은 길의 흔적 중간중간에 산죽을 뿌리째 헤집은 흔적이 낭자했다.
이 산 중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멧돼지가 분명하다. 멧돼지는 마을에도 내려오는
아주 흔한 산짐승이지만 마을의 밭을 식탁으로 아는 녀석들과 이 녀석들이 동일한 팀인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순전히 혼자 생각에 이 녀석들은 멧돼지 중에서 재야파가 아닐까.











숲 사이로 하늘이 보였지만 여전히 원근감은 없었다.
그것은 그냥 밝음이었다. 조금만 시야를 내리면 숲의 전체 모습은 미궁이다.











처음으로 전망이 나타났다.
아이폰의 나침반은 우리가 거의 정남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저 멀리 구름라인의 능선이 왕시루봉으로 향하는 것인지 불무장등 라인인지 나는 모르겠다.
멀리 있는 것이 불무장등 능선이라면 가까운 낮은 능선은 질매재로 이어질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생각났다.

"똥은 누고 다니냐?"

고라니는 아니고 누구 똥인지 모르겠다. 여름 산의 습기에도 불구하고 딱딱한 것을 보니
하루 이틀 전의 것은 아니다. 몇 개 풀잎을 뜯어 바람에 날려보았다. 바람은 남에서 북으로 불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짐승들의 냄새를 맡기 위해 집중했다. 여차하면 장기간 산에서 생존에 필요한
사냥을 준비해야했다. 사냥장비는 아이폰으로 택배주문하면 될 듯 했다. 와이파이 지역은 아니니
별도요금이 나갈 것 같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그 정도 지출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석이버섯이다. 귀한거다. 아니 맛 있는거다.
채취해야할까? 이곳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건조하고 저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급선무는 일단 길을 찾는 일이다. 위치만 봐 두었다. 3초가 지나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자연 속에서 생존능력을 상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나 온 길을 올려다 보았다. 노고단은 저 위 구름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촬영시간이 9:55으로 나온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길의 가닥을 잡기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단 소리다. 오전 10시가 목전인데
산의 날씨가 여전히 이러하다면 아랫 마을의 날씨도 맑다는 장담은 힘들겠다.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났다.

"넌 누구냐?"

상태로 보아 하루 지나지 않은 멧돼지똥이다. 일행이라기 보다는 점점 부족의 정서가
형성되어 가는 우리들의 결론은 그러했다.

"똥상태 보아 좋은 놈 잡자 우리."
"우두머리 먼저 정하자 우리."
"우리 가는 길 등산로 아니다. 짐승로다. 뱀 많아."









길은 인적이 희박한 기색이 역력했다. 짐승들만 다니는 듯 했다.
잠시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우산을 펴면 된다는데."
"빨리 뛰는게 쵝오!"
"잡아 먹자."
"니가 잡아라 곰."
"대화로 해결하자."
"현 정권 하에서 소통은 힘들다."











"마을이다!"
"문수족 구역이군."
"외지껏들이 장악한 지역이라고 들었다."
"나 아는 사람 저기 산다."
"일단 계속 내려가보자."
"마이 멀어."
"그럼 너 다시 올라갈래?"











'띠리링~'

"예? 여보셔욘? 잘 안들리세욘?
제가 지금 산에서 길을 잃어서요."

왜 핸드폰을 죽이지 않은 것이지. 이왕 통화가 되었다면 빨리 구조요청을 하라니깐!
노고단 중계탑 아래에서 형제봉 사이 어디 능선이라규!

"아, 그 날 민박은 예약이 다 되었구요."

오늘 밤을 산에서 산죽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할지 집에서 잘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이 엄중한 상황에서 서울것들 민박이 뭔 대수라고 전화기 잡고 난리야!











다시 길을 떠난다.
길이 길이 아닌 듯 보였지만 길은 그 흔적을 보여주었다.
좌우의 능선을 살펴보면서 산의 등뼈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 좀 드실래요?"
"방금 마셨는데. 왜 밥가방이 무거워서?"
"아뇨... 생각해서 하는 소리죠. 근데 냉매는 버리면 안되요?"
"냉매를 버리면 점심 세느위치가 맛이 없다규! 냉매 그거 하나 뭐 무겁다고!
그리고 산에서 뭘 버린다규!"
'띠리링~'
"예? 십사만 원요? 그러면 그냥 취소할께요"
"뭔데?"
"회관에 그 아이스께끼 냉장고 수리때문에."
"아 씨, 정신 차리라규! 우린 지금 길을 잃고 고립 중이란 말이야!"











산짐승의 눈높이는 어느 정도일까.
사슴이나 고라니는 이 정도 높이일까.











오소리나 너구리는 이 정도.











아 깜딱이야!
짐승로 주변인데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독버섯이구나.
노랑망태버섯. 많은 비가 온 다음이라 산은 마치 버섯엑스포에 온 듯 하다.











얼굴 높이까지 올라 온 산죽을 헤치고 나가기 위해 두 팔을 방패처럼 세웠다.
제법 내려섰을 것이고 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11:19. 배가 고프다. 원래 아침을 먹지 않지만
능선 숲길을 헤치고 나오느라 체력적인 소모가 많다.











형제봉 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다. 짧은 오르막이었지만 힘들었다.
다시 뒤돌아 보았다. 노고단은 여전히 구름 속이다. 그러건 말건 일단 뭘 좀 먹어야겠다.











멀리 지천리와 용방면이 보였다.

"여기서 먹나요?"
"조금 더 갑시다."
"-,.-;"











오른편으로 멀리 화엄사 계곡의 연기암이 보였다.
산행은 산행다웠지만 사진작업엔 좋지 않은 조건이었다.
산행과 촬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니 산행이 드문 것이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지 못한다. 뭔가 그림을 챙겨와야 한다.











갈림길. 바라보자면 왼편으로 빠지면 문수골 밤재가 나올 것이고,
오른편으로 빠지면 청내 배밭 위로 빠진다고 한다. 그리고 일행이 서 있는 지점은
두 마을 사람들의 과거 교차로이자 읍내로 가는 최단거리 지름길이기도 했단다.
여순사건 터지고 이 길은 거의 사라졌다. 좌우에서 올라오던 사람들의 마을이
소개당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까?"
"옙!"
"그럼 각자 흩어져서 식량을 구해온다, 실쉬!"











12시 37분.
전망을 바라보면서 준비해간 햄계란감자허브각종야채샌드위치를 먹었다.
사무장은 무엇보다 자신 분량의 식량아이스팩 무게가 거의 줄어드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그 무게는 우리 배 속으로 다 이전되었는데 몸은 무겁지 않고 힘이 난다.
역시 산에서는 고열량 샌드위치가 간편하고 쵝오!
음식 사진은?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아사 직전이었다.
비로소 천천히 우리가 걸어 내려 온 길의 경로를 바라보았다. 한 마디로 길다.

"사람 걸음 무시 못하겠네요."











왼쪽으로 우리가 조난 위험을 뚫고 겨우 내려 온 형제봉 능선이고,
오른편으로 왕시루봉 능선이다. 그 사이 계곡이 문수골이다.
옛날에는 우는 아이에게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구례의 부모들은 말했다고 한다.

"자꾸 울면 문수골 숯쟁이한테 시집 보낸다이!"

지금은 각종 스딸의 민박집과 펜션과(민박과 펜션의 차이가 뭐냔 말이쥐?)
원래 살던 사람과 외지에서 들어 온 사람과 닭을 잡는 사람과 닭을 먹는 사람이
뒤엉켜 땅값을 올리고 있다. 구례에서도 땅값이 비싼 곳이다. 아이러니다.











아래로 고개를 돌려 오른편으로 한번 더 돌려주면 섬진강과 구례읍내가 훤히 보인다.
이렇게 보면 제법 사이즈가 되어 보이는데 강 쪽의 도로에서 반대편 읍내 끝 아파트 2동까지
도보로 25분이면 끝난다. 그것이 구례사람들이, 구체적으로는 구례의 7개 면민들이
표현하는 '시내사람들'의 모든 것이다. 여전히 나는 읍내로의 포괄적 열등감(주변 면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뭐지? 인구 8만 정도까지 되었던 시절에 읍내에 산다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방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부러움에 연유하는 것일까?











숲은 빛이 들어 올 여유가 보다 많아졌다.
길도 편해졌다. 사진이고 뭐고 여름 산행에서는 햇볕이 괴롭긴 하다.
그래서 이른 새벽부터 최대한 진도를 나가는게 답인데... 역시 새벽잠이 문제다.
예정은 6시간 정도의 산행이었는데 이미 7시간을 넘어섰다. 그리고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더 하산을 해야한다.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내가 아무리 7월 하모(바다장어)를 먹지 못했지만 네가 나타날 이유는 없어야!
살모사란다. 그렇다면 독사잖아!
녀석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다. 표정도 없었다.
아무리 니가 독사래도 사람이 오면 좀 일어나서 인사라도 해야지!











걸음아 날 살려라는 아니고...











거의 내려왔다.
왼편의 물은 문수제이다. 저수지 높이를 더 올린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아래로 내죽, 하죽, 오미동을 합쳐서 오미리라고 부른다.
종자뜰이라고 불렀다. 땅이 비옥하단 뜻일 것이다.











오른편 소나무 사이로 섬진강이 보인다. 문척교가 젓가락처럼 보인다.
다리 왼편이 문척면이다. 70년대까지도 비가 많이 오면 문척에서 읍내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강이 불기 전에 일찍 하교했다. 강 건너라고 읍내 아이들에게
'촌것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2시 22분. 다시 갈림길이다.
직진해서 내려가면 용두주유소가 나오고 바로 19번 국도다.
우리는 우회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상사마을로 내려갈 계획이다.
원래 이번 산행의 목표가 '산에서 바로 집으로'였다.











경사가 급하다.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 길의 폭과 관계 없이
발바닥을 받아 주는 땅의 느낌이 피곤하다. 이미 8시간째 걷고 있다.
이미 12km 정도를 주행 중이다. 몸은 소금에 절은 솜이다.











그러나 강은 점점 시야에 낮게 다가온다.
마을 위지만 처음 오는 산길이고 우리마을에서 섬진강의 이런 전망이
보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마을신문에 사용해야겠다.
근데 마을신문 언제 만드는데? 아, 실수... 빠른 시일 내에... -,.-;











2시 57분.
우리마을 3반 꼭대기에 도착했다. 드디어 산행이 끝이 난다.
엄지발가락이 열라 아프다. 하루 종일 하이힐 신은 여자들의 통증이 이런 것이겠지.
그러나 저 마을이정표. -,.-
왜 디자인을 해서 주면 계획했던 50% 정도의 퀄리티로 돌아오는지 이해는 되지만
용서가 힘들다. 할일 없이 철쭉 심는다는 돈을 마을이정표로 돌렸는데 내 손으로
점점 마을을 망치는 기분이다. 그리고 방금 직접 하산해보니 저 이정표는 안되겠다.
'등산로' 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방금 내려왔던 길을 올라가란 소린데 그것은
등산로가 아닌 고행길이다. 산 길 정비가 필요하다. 마을 뒤산을 큰 사이즈로 한번
돌아봐야겠다.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역시 가봐야 정확하게 알겠다.

"어이, 화엄사 주차장으로 바로 내 차 가지러 좀 가자규."
"아 형님 내일 갑시다. 피곤해요. 걸어가시던가. 30분 정도면 갈텐데."
"뭐야? 지금 나 보고 내일까지 걸어다니란 소리야.
지금 손님이 터미널에 도착했다규! 픽업하러 가야한다규!"











포근한 기분이었다. 샤워를 할 수 있고 뭔가를 먹을 수 있고
누군가를 불러내어 맥주 한 잔 정도 할 수 있는 곳.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역시 산으로 잠적해서 인생을 사는 것은 산행 초반부의 로망이고
산행 후반부로 오면 사람의 마을이 그립다. 더구나 우리마을 아닌가.
능소화가 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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