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편지도 펑크 내고,
별 해명도 없고,
그에 대해 여러분들 역시 별 질문도 없는 것을 보니,
짐작하건데 '그러려니'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냥 일을 좀 했고 사진은 찍을 조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메일을 비롯한 몇몇 메일은 편지 발송이 되지 않고 있지만 역시 별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고 외국에서는 사이트 접속 자체가 힘든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래저래 여튼 포괄적으로 좀 송구스럽습니다.
이 비에 송홧가루가 길 가장자리 물 고인 곳마다 가득합니다.

늦게 일이 끝나고 스스로 '너무 방치하는거 아냐?' 라는 캥김이 있어
이미 있었던 글들 조합해서 긴 글 하나 만듭니다.
원고 살펴보다가 있던 글 리모델링한 것이지요.
보리와 밀밭 사진은 2007년 것입니다.
원고 중 전라도 사투리 교열은 '전라도닷컴' 남인희 선배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2007년 08월 03일
도라지꽃 주인은 광주 큰 병원으로 가셨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밭과 들판에서 노동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근자엔 아침마다 토지면의 용하다는 한의원으로 침을 맞기 위해 걸음을 하셨다.
오른쪽 어깨죽지가 천근 만근이었던 것이다.
당신의 마당에서 매일 오전 벌어지는 대화.

"아, 좀 쉬시라니까!"
"상추 조까 뜯어갈란가?"

저녁에 전화를 드렸다. 광주 큰 따님이 받았다. 수술은 잘 되었다.
가시면서 나에게 남기신 당부는 이러했다.

"비 오믄 우리 꼬치 좀 넣어줄란가."


2007년 08월 16일
지정댁은 새벽 잠결에 리모컨을 잘 못 눌러 TV가 나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나를 보시고 유난히 반색하신다.
TV 전원을 켜고 상단 귀퉁이에서 깜박이는 '비디오1' 이라는 사인을 보고
신묘한 손놀림으로 '비디오2'를 지나 단 두 번의 터치로 지정댁의 '테레비'를 소생시켰다.
지정댁은 비디오플레이어가 없다. 비디오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어도 사실 무용지물이다.
30가구 마을에서 비디오 가게를 개업할 사람은 이후에도 없을 듯하다.
따라서 TV리모컨의 그 많은 버튼들은 지정댁에겐 열에 아홉은 불필요한 것들이다.
지정댁의 핸드폰 뒷면에는 전화번호가 딱 네 개, 종잇장에 쓰여져 찰싹 붙어 있는데
지정댁은 두 아드님과 두 따님을 두고 있다.
맥가이버는 어깨에 힘을 주며 아침 담배연기를 날렸고 비닐에 담겨 있는
풋마늘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엄니, 나 이 마늘 몇 개 가져가도 될꺼나?"
"먼 마늘? 쪽파 모종이여. 아 그런 것도 모른단가."

지정댁 얼굴에 의기양양한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역시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2007년 09월 13일
배추를 심었다. 한 판에 오천 원 주고 모종을 사 왔다.
알배추와 청배추 각 한 판씩이다. 모두 해서 일백 팔십 개 정도다.

"숭궈 보고 우리 준다고 혀. 남을지 모지랠란가."

생각보다 모종이 많이 들어가서 거들어 주신 아주머니들에게는 스무 개 가량 넘어가는 모종을 넘겨 드렸다.
개수는 적지만 보기에 가장 예쁜 놈들로 골라 와서 그런지 모두 사무실 배추모종에 대해 덕담을
한 마디씩 해주신다. 하룻밤 지나고 아침에 만난 배추 모종은 힘차고 싱싱하다.
의기양양해서 엄니들에게 물었다.

"물은 며칠 안줘도 되겠죠?"
"배추 허는 행동 보고."

배추가 하는 '행동'이라… 참 낯선 표현이다.
하지만 그 표현 속에 살아 있는 생물이란 느낌이 물씬하다.
그렇게 비가 많이 왔지만 어린 배추모종들에게 한낮의 햇살과 거친 가을바람은 견디기 쉽지 않은 조건이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수분을 끌어올리기엔 힘이 모자란 것이다. 한낮 세 시간 동안 배추는 말라 죽어버릴
듯한 모양새로 바뀌어버린다.

"일단 물을 조깨만 줘. 해그름에 조까 더 주고."

불과 십여 분 지나서 싹들이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한다. 그래 다시 배추의 '행동' 이란 표현은
참으로 타당하단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배추의 '행동'은 지금 땅 속에서, 햇살이, 바람이 자신에게 작용하는
모든 에너지에 그대로 반응하며 살기 위한 치열한 몇 시간을 오롯하게 보여주었다.
모니터 너머로 배추 모종을 자꾸 흘깃거리게 된다.


2007년 09월 17일
월요일 편지를 받을 즈음이면 제주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태풍 나리는 한반도를 벗어 난 다음일 것이다.
이미 이틀 동안의 비와 바람으로 일부 들판의 벼는 쓰러졌다. 일요일 늦은 10:30. 아직 사무실이다.
바람이 몇 시간 사나웠고 지금은 별이 총총하다. 들판은 묵墨바다이니 상황을 알 수 없다.
출렁이는 황금빛 가을 들판을 상상하기엔 아직 이르고 인간은 거대한 힘 앞에서 너무 무력하다.
당신이 지난 가을에 어느 들판 길을 가로질러 그 황금빛 물결 속을 유영했다면 그것은 그 모습을
가능하게 한 늙은 농부의 피나는 노동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라보아서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즐기고 감탄하는 것은 '눈길'이고 가꾼 것은 '손길'이다.

"엄니, 오늘 밤에 태풍이 여수로 올라온다네요. 큰일이요."
"하이고 헐 수 없제. 하늘 허잔 대로 혀야제 벨 수 있단가."











2007년 10월 04일
열무를 내려다보다가 지정댁이 독백했다.

“마루 밑에 신 두 커리 있을 때 돈 못챙기믄 그 담서부텀은 심들어...”
(자식 생기고 돈 모으기는 이미 늦다는 말씀)

딱히 대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정댁의 소리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2007년 10월 10일
지정댁이 마지막까지 밭에서 거두어들인 고추가 오십 근 넘게 나왔다.
자식들 보내주고 김장 이백 포기 이상 담으려면 스무 근 정도 더 사야 한다.
경제와 살림 이야기로 담배 한 개비가 금세 공중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은 항상 이만하기 다행이고 족하다는 것으로 마감한다.
돌아서 나오다가 며칠 전부터 물어보려고 했던 일이 생각나 목에 각을 좀 세우고 약간 사납게 물었다.

"지정 엄니, 엄니가 형한테 내 배추 농사는 엄니 입으로 짓는다 했소?"
"그라제. 나 시킨 대로 허잖여."

밤중에 다시 몰래 와서 지정댁 감나무를 사정없이 흔들어버려야겠다.











2007년 10월 11일
대평댁과 지정댁이 큰 소리로 싸운 것이 보름은 지났다.
두 집은 지리산닷컴의 좌대평과 우지정으로 자리하고 있고 나는 두 집을 모두 들락거린다.
대평댁 마당의 홍시를 따기 위해 대나무 작대기를 잡고 씨름 중인데 대평댁이 소리한다.

"지정댁은 몬차 와서 잘못혔다 소리를 안하까?
입 달린 사람은 다 지정댁은 그러는 거 아니라고 소리를 허는디.
행이나 지정댁한테 가믄 이런 소리는 허들 말어. 자네는 입 안 달린 겨."
"예."

다음날 지정댁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지정댁이 소리한다.

"대평댁은 그라고는 나한테 말을 안혀.
입 달린 사람은 다 대천댁은 그러는 거 아니라고 소리를 허는디.
대천댁한테 가믄 절대 이 소리는 허들 말어. 자네는 입 없는 겨."
"예."

입 달린 사람들이 누군지는 뻔한 것이고, 두 집에서 소리한 입들은 모두 같은 입들이 틀림없다.


2007년 10월 24일
영화 <황산벌>에서 전라도 사투리 '거시기'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내려 오는 손님들은 가끔 물어온다.
정말 '거시기'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지. 많이 사용한다. 특히 오늘은 정말 '거시기의 날'이었다.
부산, 서울, 산행을 하느라 사무실 이웃들의 가을걷이를 도와주지 못했다.
화요일 해거름에는 급기야 지정댁의 다급한 SOS가 타전되었다.
사무실 창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큰 소리로 말한다.

"거시기, 내 오도바이가 거시기 되얐는디 자네 거시기로 거시기 한번 혀 줄란가?"
<번역 / 어이, 내 전기오토바이가 고장났는데 자네 차로 나락 한 번 옮겨줄 수 있나?>

지정댁의 마지막 단지 논을 수확한 벼를 말려서 한 가마니씩 길가에 세워 놓았다.
이것을 차로 집까지 옮겨 드리는 미션이다. 트렁크에 두 가마니, 뒷좌석에 한 가마니 해서 두 번을 나르고
미션은 끝이 났다. 해는 지고 온 마을이 쌀가마니 운반하는 경운기와 오토바이, 수레로 정신이 없다.
쌀가마니 옆에 쪼그려 앉은 지정댁이 차창 밖의 다른 아주머니에게 소리한다.

"거시기, 나 거시기 혀 놓고 갈텐께 자네도 거시기 혀 놓고 거시기로 와 잉!"
<번역 / 어이, 나는 창고에 쌀 부려 놓고 갈테니까, 당신도 쌀 부려 놓고 다시 논에서 보자고.>
"거시기 빼고는 말씀이 안되요?"
"왜 거시기헌가?"
<번역 / 이건 좀 어렵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왜? 알아듣기 힘들어? 2. 왜? 꼽냐?>











2007년 11월 12일
마을에 뭔 일이 있는 것인지 하루 동안 세 번째 떡을 담은 접시가 사무실 창을 통해 전해졌다.
대평댁이었다. 나에게 전해 준 손은 오른손이었고 왼손은 뒤로 감추고 있다.

"대평 엄니, 그 뒤로 감춘 건 뭐요?"
"언제... 암껏도 아녀..."

대평댁 왼손엔 다른 떡 그릇이 하나 더 들려 있었고 지정댁 마당으로 들어간다.
달포 전에 싸운 뒤로 말도 하지 않더니, 내가 화해하시라 그렇게 일러도 두 분 모두 꿈쩍도 하지
않으시더니, 떡 그릇을 들고 가? 지정댁 마당에 들어서는 대평댁 등 뒤로 고함을 질렀다.

"아, 그 집을 왜 들어가시요? 펴엉생 말 안 하고 살지!"

대평댁은 대꾸가 없고 마당에서 참깨 두드리던 지정댁이 소리 한다.

"엠뱅하고 자빠졌네. 말 안허고 워찌케 살어!"


2007년 12월 13일
3일 장날에 차를 좀 타자고 하시니 해거름에 지정댁 마당으로 들어섰다.

"낼 장에 몇 시에 나갈라요?"
"자네 나갈 때."
"뭐 사실라고?"
"배추."
"배추?"
"누가 좀 폴라고 혀서 이만완 받고 냉기고 낭께 지(김장) 꺼리가 모지랠 성 시푸네."
"얼매나 사실라고?"
"한 사만완은 혀얄 것이여."
"배추 지어서 이만 원에 팔고, 사만 원 주고 넘 배추 사는 건 뭔 산수요?"
"그... 책으서 산수허고 사는(生) 산수허고는 원래 달른 것이여."











2008년 01월 23일
지난 며칠간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까지 내려갔다.
별 생각 없이 언제나 사용하는 지정댁 마당의 외부 화장실에서 큰놈을 때리고 물을 내리는데
'쏴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변기 물이 꽁꽁 얼어버렸다. 난감하다. 빙판 위의 똥이라니…
지정댁에게 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얼른 생각난 방법은 커피포터를 동원해서
얼어붙은 변기 물을 처리하는 방안이었다. 신속하게 움직였다. 사무실은 물도 얼었으니
지정댁 부엌을 들락거릴 수밖에.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물을 데워서 화장실로 들어서는 순간
지정댁에게 딱 걸렸다.

"멋 헌다고 그리 들락거려 싼단가?"  
"아 예… -,.-"
"화장실에 물이라도 샌단가?"

지정댁은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말릴 틈도 없었고, 이내 화장실에서는 지정댁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마이도 싸 놨구마 잉"


2008년 02월 21일
퇴근하려다가 지정댁 마당에서 나무 패는 소리가 들려 들어섰다.

"아, 하루 종일 어디에 있었소?"
"잉, 노인정에. 글고말이시... 그 거시기 리모콘이... 아니제 그 거시기..."
"핸드폰?"
"잉, 핸드폰. 그거이 말이시, 손자가 만져가꼬 거시기가 나들 안혀."
"진동으로 했다고?"
"잉, 진동. 거시기를 좀 거시기 해 줄란가?"
"소리 들리게 바꿔 달라고?"
"글제, 당췌 전화가 오는지 알 수가 있남."
"그거 힘든 기술인데..."
"아, 좀 해 줘!"

진동 모드를 벨로 바꾸고 내 전화기에 입력된 지정댁 번호로 확인 전화를 한번 한다.
잠시 후 신호가 울리고 전화벨이 울린다.

"하이고, 요로코롬 간단한 거이..."
"간단하다니요. 이게 얼마나 힘든 기술인데!"
"엠뱅허고 자빠졌네! 그거이 뭐가 심들다고!"
"그래요. 앞으로 김치냉장고 안 열리고 테레비 리모콘 안되는거 나는 모르는 일이요!"
"호랭이 물어가겄네!"

도끼로 쪼갠 나무를 아궁이로 던져 넣는다.

"내일이 보름이요."
"그랴. 너물이라도 해 묵어야제. 혼차 살아도 그런 거슨 다 챙겨 묵어야 사람 구실허는 뱁이여.
워쨔, 내일 너물해서 점심밥이라도 헐란가?"











2008년 03월 28일
지정댁 핸드폰이 ‘또’ 도착했다.
며칠 전에 일하시다가 물에 한참을 담가 둔 핸드폰은 완전히 사망했다.
몇몇 전화번호를 다시 저장해 달란다.

"나 동상을 7번, 자네를 8번으로 거시기해 줘."
"지금 전화번호가 네 개 들어있네요. 그러니까 삼촌 먼저 입력하면 5번이 되고 제가 6번이 됩니다."
"머시여? 안 되야! 손자 둘이 번호가 5번하고 6번 해야 혀."
"일단… 제가 이 전화기를 잘 모르겠는데… 입력 순서대론지… (궁시렁)"
"하여튼간에 넣어봐."
전화기를 주물딱거린다.
"아 씨…"
"왜?"
"아니… 모음이 다 안보이네요… 이게 한글이 그 참…"
"또 안 되야?"
"일단… 제가 이 전화기를 첨 만지니까 잘 안되네요. 아 씨… 모음이 어디 간 겨… (궁시렁)"
"쩐번때는 잘 허드만… 영 션찮구만."
"아니, 이게 남에 전화기 잡고 저라고 바로 해결 되는 게 아니라니깐요.
뭐 어디 설명서 같은 거 없었쏘?"
"중고 폰인디. 요거이만 딸랑 왔는디…"

다시 전화기 버튼을 잡고 씨름을 한다.

"아 씨… 나 이거 돌겠네. 아니 모음이 다 어디 간 겨…"
"자네가 아주 쑈를 하는구만."
"엄니 이거 쑈폰인데요."


2009년 07월 09일
오후에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지정댁 혼자 나무 아래 앉아 계시다.
간만에 지정댁과 대화를 시도한다.

"엄니, 집은 언제 된다요?"
"몰러, 지그 맴이제."

한옥으로 집을 개축 중이라 지정댁은 2개월 이상 허드레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
계절도 계절이지만 피난살이 같은 살림살이가 노인에게는 힘들어 보인다.

"참나무가 셋바닥을 내밍거 본께 또 비 오겄네. 참말로 징허네."

사무실에 들어와서 일기예보를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1주일 분량이 모두 우산 아이콘이다.
참나무 셋바닥이 네이버보다 정확할 것이다.


2007년 08월 28일
지리산닷컴 사무실이 놓여 있는 땅의 백여 평 밭을 나누어서 배추랑 무우를 심기로 했다.
여름내 잡초 무성했던 땅은 일요일 아침에 트랙터로 갈아서 엎었다.
배추와 무우를 함께 갈아 먹을 동지들 모시고 읍내 종묘상 가는 길에 깜박 잊고 음악을 끄지 않았다.
게이코 리(Keiko Lee)의 ‘I will wait for you’가 나오고 있었다.
뒷좌석의 대평댁이 결국 한마디 하신다.

"먼 놈에 노래를 디져불 모냥으로 해쌌냐? 살기 오지게 심든 모냥이네."











2008년 03월 25일
오전 10시쯤이나 되었을까?
좌측 방향에서 컨테이너 모서리부터 두드리고 오는 것을 보아하니 대평댁이다.

"여그 와서 괴기 조깨 먹어."
"예? 아침부터 뭔 고기요?"
"아 잔소리 말고 언능 나와."

하던 일 접고 신발 신고 밭고랑 따라 쫄래쫄래 따라간다.
어제 잔칫집 다녀오셨는데 돼지수육이라도 얻어 오신 모양이다.
그래도 아침에는 부담스러운데… 대평댁은 꽃이 피지 않은 배춧잎을 몇 주먹 따서 앞선다.

"쌈 싸서 묵으믄 괘안허겄네."

대평댁 부엌. 삼겹살이 프라이팬 위에서 가득하니 익고 있다.

"시방 아침부터 이것을 나보고 먹어란 말씀이신가?"(방백)
"어여 조깨 들어."

눈앞이 캄캄해진다.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데 고기를 구워 놓고, 그 양도 만만치 않다.
대략 몇 점 먹는 시늉하다가 일어서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엄니도 같이 듭시다."
"나는 금방 그만치 꿔서 묵었어. 자네 줄라고. 다 묵어."
"아니 저… -,.-"
"자, 배추 쌈하고이잉."

먹자. 이미 구워진 것을 어떻게 하겠나. 그런데 이거 양이 장난이 아니지 않나.

"밥도 조깨 할란가?"
"아니요, 엄니 이따 점심 먹어얀께…"
"머슬 시방 벌린 짐에 기냥 다 해결해뿔어."
"그럼 아주 쬐끔만 주세요. 쬐끔요."

머슴밥이 담겨져 온다. 각오는 했지만 너무 가혹하다.
"묵고 모지래믄 더 도라고 혀."
오전 10시. 절반은 타버린 유럽풍 베이컨 스타일의 삼겹살. 그리고 고봉밥.


2008년 04월 18일
동네 한 바퀴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늦은 2시나 되었을까.
옷에 붙은 풀과 흙을 쓸어내고 사진을 집어넣는데 대평댁이 창 밖에서 뭐라 소리를 한다. 문을 열고,

"왜요 엄니."
"이리 와. 언능 조용히 와."

음식인가 보다. 각오를 다지며 대평댁 뒤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퍼지기 전에 잡사 봐."

잡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시골 잔칫집 뷔페에서 잡채와 김밥에 집중하는 할머니들을 이해하지 못하곤 했었다.
역시 접시에 한 가득 담는다.

"엄니 좀만 주쇼. 밥 먹은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먹는다. 불어터진 잡채를 맛있는 표정으로 먹는다.
"되야지괴기가 밑으로 싹 다 빠져뿔었네."

돼지고기를 빌미로 2차 당면 공수가 감행되었다. 다시 한 그릇이다. -,.- 모두 비웠다.

"쪼까 마셔."

큰 병 환타다. 본 지도 간만이다. 무지 달짝지근한 환타.
좋아하지 않는다. 마셨다.

"여그 파적도 지져 놨응께 한 장 묵어 봐."

파전이다. 밀가루 7, 파 3 레시피의 대평댁 파전이다. 지난번에 맛있게 먹어 드린 것이
역시 화근이었다. 대평댁 파전의 지름은 기본적으로 30센티미터는 된다.
이번에는 물리적으로 속도가 나지 않았고 아주 천천히 그 달짝지근한 환타까지 한 잔 더 부어서
천천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모두 먹었다. 배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이고 엄니 잘 먹었쏘. 다음에는 저 땜에 이런 거 준비하지 마쇼."
"여그 떡 묵고 가."
"예?"
"찰시리떡 쪼까 쪘응께 한 장만 묵고 가. 쩌번 참에 그 잡지 사진 크게 뽑아줘서
고마워서 내가 준비한 거잉께."
"언능 묵어."

대평댁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찜통을 막 연다.
지난번 아침 삼겹살 공세보다 더 검은 먹구름이 몰려온다. 다시 환타를 한 잔 부었다.

"하이고 잘 마시네. 그 쎤한 거 싹 다 마시고 가 이."











2006년 10월 28일
장터를 빠져 나오는 길목에 이너웨어 전문점이 있다.

"한장에 마넌 하는 백화점 빤스가 처넌!, 여자 삼각이 오백 원!"

멈추어 선 할머니, 딜러의 의표를 찌른다.

"녀자치 삼각빤스 삼백완 짜리는 엄쏘?"


2007년 08월 22일
장터 국밥집에서. 구석에서 혼자 아주 천천히 국밥을 드시는 할머니.
그 속도가 식욕과 연관이 있어 보였는지 주인 아주머니가 묻는다.

"혼자 드시니까 밥 맛이 없소?"

할머니는 주인장을 바라보지 않고 대꾸 하신다.

"내가 올해 팔십 일곱이요. 내 나이 쉰일곱에 혼자되야서 이제꺼정 혼차 밥 묵었소."
"영감을 하나 구하지 그랬소?"
"하이고, 술구신 보내고 또 머더러 영감을 구한당가."

3자 입장이지만 나 역시 예정된 영감인 탓에 '구한다'는 말씀에 고추가 유난히 맵다.
국밥 값 계산하고 나서면서 삼십년 동안 혼자 식사하신 할머니는 한 말씀 더 남기고 떠나셨다.

"술구신도 한번썩은 짠헙디다."


2008년 04월 29일
"형님 거시기 콧잔등에 긁힌 거요?"
"술 묵고 올라온다고 긁어 불데…"

국밥집에서 영감 서넛이 모여 국밥에 소주를 곁들이며 하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전에 국밥집 엄니가 하시던 소리가 생각났다.

"썩을 영감들 영겁을 살아봐라 철드나!"


2008년 07월 09일
뜨거운 날, 뜨거운 국밥으로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장터 국밥집으로 들어선다.
환갑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식당으로 들어선다.
국밥 두 그릇이 주문되고 곧이어 먼저 한 그릇이 놓여진다.

"우리 영감 먼저이. 그 담으로 나 각시꺼이."

부부금슬에 대한 자찬이 식사중 계속 이어진다.

"우리 영감은 항시 나에게 말을 헌단 말시. 긍께…
'자기야, 나 오늘 모임 있응께 늦소이잉' 그란당께"

맞은편 젊은 사람들이 묻는다.

"연세가 워떠케 되시는데 '자기' 라고 하신데요?"
"우리 영감이 올해 환갑이여."

영감님은 말없이 국밥 그릇에 코를 박고 계신다.
입구 쪽 다른 노부부와 주방 쪽으로 싸한 냉기가 흐른다.
잉꼬부부는 대각선의 나에게 계속 눈길을 던지며 그들의 일상사를 나열한다.
명백하게 나의 추임새를 원하는 눈초리다. 나 역시 황혼의 잉꼬부부가 좀 부담스러운 면이 있어
좀 서둘러 겨우 한 그릇 비우고 일어났다. 맞은편 젊은 사람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그란디 본 마누라, 본 남편 맞어요? 원래 본 마누라 본 남편은 글안허는디?"

당돌한 질문에 잠시 식당이 뒤집어지고 잉꼬부부는 뭔 소리냐고, 열아홉에 시집 온
사람이라고 항변중인데 주인아주머니와 다른 노부부는 안심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얼핏 그리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표정도 함께 본 듯하다.











2008년 09월 09일
장터 국밥집.
세 분의 할머니가 맥주 한 병 놓고 이야기 중이시다. 가운데 할머니는 팔순은 넘어 뵌다.

"여그 얼매요?"
"이천오백 원요."

호기롭게 천 원짜리 두 장과 동전 다섯 개를 꺼낸다.
"엄니 오늘 돈 많이 써뿔어서 어짠다요."
"아야, 큰 가게 가믄 이만완도 쓴 적이 있는디야!"

먼저 일어나셔서 길을 재촉하신다. 허리가 곳곳하시다.
국밥 그릇에 코를 처박고 있다가 남은 두 젊은 할머니들에게 물었다.

"저 엄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팔십… 일곱 되시제."

자주 나오지 않는 매운탕 감 생선이 보여서 샀다. 세 마리에 만 원이다.
부가세 환급 받아서 만 원짜리 몇 장 있다. 나는 반성해야 한다.


2009년 02월 04일
국밥집.

"어쪄 다 못 잡사?"
"찔거(질겨)."

느린 걸음으로 할머니가 국밥집을 벗어나신다.
뚝배기에 국밥을 말던 아주머니가 혼자 말씀을 하신다.

"저 어르신이 10년 만에 우리집 고기가 질기시구나."

생선전을 벗어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시선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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